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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 김종남 Oct 28. 2022

 이태백은 왜 '혼술'을 예찬했나?

 '삼배통대도(3잔술로 통하는 대도)'는 합자연(合自然)으로 가는 큰길

이태백이 3잔 술로 통한 ‘큰길(大道)’은 큰 깨달음이었나, 아니면 근심을 없애는 약이었나?

삼배통대도(三盃通大道)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합자연(合自然)’으로 가는 길이었다.

 ‘합자연’은 도를 닦는 사람이 고된 수련을 통해 이를 수 있는 경지다.

속인은 술김에 합자연한다고 강물 속 달을 잡으려 뛰어들지 모른다. 




 잘 가는 중국식당이 있다. 이태백의 시 ‘독작(獨酌; 혼자 술을 마심)’이 다섯 자씩 새겨진 병풍이 칸막이처럼 세워져 있는 곳이다. “三盃通大道(석 잔을 마시면 큰 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한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醉中趣(다만 취한 중에 흥취를 얻으면 그만이지) 勿爲醒者傳(깨어있는 사람에게 전할 생각은 말아라) ---” 


 술에 취해 강물 속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술과 인연이 많은 이태백(李太白;701~762)은 모두 1,100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그중 술에 관한 시는 몇 편이나 될까. 서당에서 배운 ‘고문진보(古文眞寶)’를 펼쳐보니 그 안에만 ‘독작(獨酌)’, ‘월하독작(月下獨酌)’, ‘산중대작(山中對酌)’ 등 3수나 나온다. 


 ‘독작’은 요즘 말로 ‘혼술’이다. 일인 가족이 많은 요즘 유행하는 주법이다. 1천3백 년 전, 중국 최고의 시선(詩仙) 이태백은 왜 혼술을 예찬했을까. 세상에 펴보지 못한 천재의 큰 포부를 술자리에서 받아줄 아량 넓은 사람이 천하에 얼마나 될까, 더구나 한자리에서 300잔을 마신다는 주선(酒仙)과 맞술 할 주량도 찾기 힘들었을 터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이태백은 자신, 달 그리고 그림자까지 3인이 춤을 추며 술을 마신다. 


 배갈을 작은 잔에 따라 마시며 “삼배통대도!”, 건배하듯 소리 내어 불러본다. 배갈 잔은 엄지손가락만큼 작은 잔이다. 40도가 넘는 증류주라 3잔인데도 취기가 돈다. 이태백이 말하는 잔은 얼마나 큰 잔일까, 삼배(三盃)하여 통할 수 있는 대도(大道)는 어떤 길일까.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거칠 것이 없다)’이란 불가의 문구가 생각난다. 불가에서 말하는 대도는 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술고래로 알려졌던 친지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 70대 후반 큰 수술을 받게 되자 의사 선생이 금주 명령을 내렸다. 몇 달간 술을 참아내던 친지는 의사 선생께 빌어 ‘하루 소주 3잔’이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분은 가끔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3잔을 했다. “건강에 나쁘다는 술을 왜 못 끊으십니까?” 물어본 적이 있다.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는데---” 그에게 ‘3잔 술’은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약이었다.


난 술은 하지만 애주가는 아니다. 반주는 하지만 혼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다. 왜 술을 마시는가? 맘에 맞는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떠들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가끔 ‘합자연’ 근처까지 가본 적도 있다. 그러나 숙취 다음 날 새벽, 속 쓰림에다 전날 술자리에서 쏟아낸 망언들 생각에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잠시 잊었던 걱정도 다시 몰려온다. 술에서 얻은 흥취는 술에 취해있던 그때뿐이다. 


주선 이태백도 “다만 취한 중에 흥취를 얻으면 그만이지(但得醉中趣), 깨어있는 사람에게 전할 생각은 말아라(勿爲醒者傳)”고 당부한다. 혼술을 즐기는(?) 이태백 스스로 자신에게 하는 당부였을지 모른다. 역시 ‘독작’은 혼술 때 읽어야 할 시구다. 성인, 현인도 아닌 속인은 엄지 손가락만큼 작은 잔에 술을 따라 통대도만이라도 이루길 기원하며 술잔을 든다.  '삼배통대도'.      201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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