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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 김종남 Jan 24. 2024

나이 드니 좋은 일 많아지나요?

슬픈일 괴로운 일 고통 쾌락, 심지어 꿈도 추억이 된다 

  

넥타이를 매지 않아 좋다  (---)

때로는 수염을 깎지 않아 좋다 (---)

아무도 만나자고 하는 사람 없으니

나 홀로 숲길을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산책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문득 푸른 하늘 바라볼 수 있어 좋다 (---)” 


1945년 순천에서 태어난 시인 허형만(목포대 명예교수)이 쓴 <이제 나이 들어>라는 시 한 부분이다. 전체 시문에는 ‘좋다’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온다. 허형만 시인 말대로 ‘이제 나이 드니’ 정말 좋은 일이 많아진다. ‘나 홀로 숲길을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숲길이든 골목길이든 외워둔 시를 암송하거나, 감춰둔 추억을 꺼내 되씹으며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는’ 맛은 더 좋다.      


인생은 추억이다. 기쁜 일, 슬픈 일, 고통, 고난, 쾌락도 나이 들면 다 추억이 된다, 심지어 오래 잊혀지지 않는 꿈도 좋은 추억이다. 얼마 전 꿈을 꾸었다. 전쟁이 났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손발이 떨렸다. 6.25 때 전주서 광주로 피난 왔던 기억까지 몰려왔다. 요즘 전쟁은 피난 갈 데도 없다. 이상하게 주위에 친구들마저 하나도 안 보인다. 우왕좌왕 애태우다 식은땀 흘리며 깨어났다. 새벽 4시였다.    

 

꿈인데도 실제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흉몽대길’, 오늘도 그 꿈을 되새겨본다. 전쟁이 안 난 오늘이 얼마나 좋으냐. 이처럼 ‘어슬렁거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지금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행복은 자유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런데 자유는 욕망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나이 들어 높은 산 오르고 싶은 욕망을 줄이니 대신 집 부근 산책하는 자유가 늘었다.     

 

새벽에는 창을 열고 무등산을 올려다본다. 군왕봉, 바탈봉, 장원봉, 조대 뒷산 깃대봉이 녹색 병풍을 두른 위로 무등산 천지인왕봉이 청록색 얼굴을 내밀고 찬란한 햇빛을 빛고을에 뿌린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시, 어떤 추억을 끄집어낼 것이냐? 온전히 자신의 자유다. 무등산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햇빛 주사> 시를 외워본다.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듯이 내 몸이 힘들고 우울할 땐 햇빛 주사를 자주 맞는다 // (----) // 복도를 걸어갈 때도 두꺼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나를 생명의 빛으로 초대하는 나의 햇빛 한줄기로 //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 < 햇빛 주사 이해인 >” 시인 이해인은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스물에 수녀가 된 후 수도 생활을 시로 담아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치유, 희망의 시를 전달하고 있다. 이해인 수녀는 2008년부터 몇 차례 암 투병을 해 왔다.     

 

햇빛 한줄기, 시 한 줄이 위로가 되고, 주사가 되고, 치유가 되고, 희망이 될 수 있구나! 골목 안 빈터에서 욜랑거리는 낭미초(狼尾草) / 석양에 금빛으로 물드는 것 보니 좋다 (<이제 나이 들어마지막 연) ”. 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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