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일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은 특별한 사람만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그걸 10년 넘게 다양한 디자인 영역을 경험하면서 체득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디자인은 예술가들이나 하는 거지. 난 감각도 없고, 포토샵도 못 다뤄.” 그런데 아니다. 그릇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방식, 스마트폰 배경화면을 고르는 기준조차 ‘디자인’이다. 물론, 오해하지 말자.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디자인만큼 실력 차이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분야는 드물다. 잘하는 사람은 탁월하고, 못하는 사람은 한없이 모른다. 심지어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른다.
이 차이는 어디서 갈릴까? 디자인의 본질은 늘 감성과 이성의 중간 지점에 있다. 감각만 앞세우면 ‘예쁘기만 한 쓰레기’가 되고, 이성만 앞세우면 ‘쓸모는 있으나 감흥 없는 무언가’가 된다. 디자인은 이 둘의 충돌이 아니라 조율이다. 심미성과 기능, 주관성과 객관성, 아름다움과 효율성. 겉보기엔 상반된 개념들이 디자인 안에서 하나의 조화로 존재한다. 이 조화를 얼마나 예민하게 인식하고 조율할 수 있는가? 바로 그 감각이 실력을 결정한다.
문제는, 이 감각을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브랜딩 디자인, UX 디자인, 모션 그래픽, 공간 디자인 응 각 분야가 요구하는 판단 기준과 시각이 다르다. 어떤 분야에서는 정보의 전달력이 전부고, 또 어떤 분야에서는 사용자 동선이 핵심이다. 그러니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늘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저자 올리비아 리 덕분에 꽤 강력한 기준을 갖게 됐다.
디자이너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험하고
사용자의 편안함을 위해 치밀한 질서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 올리비아 리
그녀에게 디자인이란 시스템을 설계하고, 사용자 경험의 본질을 파고들며, 디자인의 출발점을 ‘사고방식’이다.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자체다. 그녀는 계속해서 본질을 강조한다. “좋은 디자인은 기술이 아니라, 사고하는 방식이다.” 문제를 보는 관점, 맥락을 읽는 힘, 본질을 추출해내는 사고가 없으면, 아무리 도구를 잘 다뤄도 좋은 디자인은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올리비아 리는 UX 법칙 중 ‘테슬러의 법칙’을 인용한다. “모든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줄일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사용자에게 단순하게 보이는 것 뒤에는, 반드시 복잡함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좋은 디자인이란 그 복잡함을 디자이너가 떠안고, 사용자에겐 단순한 경험으로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디자인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최고의 사용자 경험이 된다.
본질이든 기술이든 실력을 키우려기 위해 중요한 건 ‘배우려는 자세’다. 하지만 완벽하게 전체를 다 배우려 하지 말고, 필요한 부분만 빠르게 흡수해서 즉시 적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학습을 ‘지식 축적’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진짜 학습은 ‘활용’이다. 바로 써먹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지식은 힘이 된다.
“학습은 리스크가 아니라 선점이다.”
— 올리비아 리
그렇다면 ai는 디자이너에게 어떤 의미일까? ai는 모든 걸 바꿔놓고 있다. 올리비아 리는 “원툴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어떤 툴을 완벽하게 다룰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ai가 간극을 메워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제 대충해도 괜찮을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는 넓이를 메운다. 깊이는 사람의 몫이다.
ai가 멋진 비주얼을 만들어 줄 순 있다. 하지만 그 비주얼이 진짜 ‘쓰일 수 있는 것’인지는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다. 비주얼이 예쁘다는 이유로 무조건 통과시키면, 결국 사용자 관점에서는 오류가 발생한다. 디자이너가 그 오류를 미리 감지하고 맥락에 따라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여기서 진짜 실력이 나온다.
나 역시 ai를 쓸 때마다 1차 결과물에 놀란다. 정말 빨리 그럴듯한 이미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문제는 2차로 결과물을 다듬는 과정이다. 세밀한 톤 조정, 구도 미세 보정, 사용자 흐름 고려, 타 디자인과의 연결성 검토 등 종합적인 판단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다시 말해 ai의 결과물은 재료에 불과하며, 요리는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한다.
올리비아 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강력한 사고 프레임을 제시한다.
추상화 → 구조화 → 적용 → 검증
1. 추상화란 문제의 본질을 뽑아내는 것이다.
2. 구조화란 본질을 기존 지식과 연결해 맥락을 짓는 것이다.
3. 적용은 빠르게 실행해보는 실험이다.
4. 검증은 그 실험이 유효했는지 살펴보는 되짚기다.
이 프레임을 반복할수록 사고의 힘은 커진다. ai를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ai에게 명령을 당하고 있다. 본질을 모르고, 자신의 머릿속에 ‘명확한 구조’가 없어서다. 앞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지만, 그럼에도 실력의 격차는 줄어들지 않고 극명하게 벌어질 것이다. 겉보기에 비슷한 결과물은 많아지겠지만, 진짜 좋은 디자인은 ‘방향’을 결정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ai가 발전할수록 개인의 사고력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디자이너라면 눈에 보이는 것 이전에, 사고의 구조를 먼저 설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사고하는가’에 따라 ai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