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전하지 않는다.
버스나 택시도 타지 않는다. 남의 차를 얻어 타도 안절부절 냅다 비명을 내지르며, 속도 줄여라, 이래라저래라, 오두방정 잔소리를 해대니 운전자 미안해서 못탄다.
28살, 33살, 결혼한 두 남동생이 1년 사이에 연달아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어린 조카 두명씩, 넷을 남겨두고 죽었다. 그 후로 나는 네 바퀴 달린 건 장난감 차도 혐오한다. 동생들이 사망한 다음해, 나는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 생활은 학교와 집을 다람쥐 쳇바뀌 돌듯 하는 단순한 일상이었고 그 당시에도 이미 맨하탄 지하철 노선은 촘촘해서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할 일은 거의 없었다. 운전은 자연스레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되어갔다. 이젠 운전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는 서커스같은 묘기 일 뿐이다.
집앞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노트북과 운동복, 운동화와 책 그리고 단백질 음료까지 든 가방을 메고 초행길 아트페어 전시장까지 거의 1시간 가량 걷는 건 헥헥거리는 내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전시장은 집에서 일직선 상에 위치해있다. 분명 시내 버스가 있을 듯 했다. 집을 나서며 혹시나 해서 정류장 버스 노선표를 살폈다.
앗! 있다. 80번 버스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대형 버스가 스르르 코 앞으로 다가와 활짝 문을 열어 젖힌다.
"대령했나이다. 어서 타시옵소서.
모셔다 드리겠나이다."
"에헴! 오랫만에 호강한번 해보자"
얼른 올라탔다.
전시 관람 후 하차했던 버스정류장 반대편으로 갔다. 승차했던 방향으로 되돌아 가는 버스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버스정류장 노선표를 확인했다. 집 앞에 대령했던 80번 버스는 안보이고 60-1번이 롯데백화점으로 간다. 거기서 거기다.
버스를 기다리며 설레기까지 했다.
미세하게 흔들흔들, 부드럽게 덜컹거리는 승차감, 차도에서 차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스쳐지나가는 길거리 풍경, 차 진행 방향으로 향한 좌석 등받이의 안락함, 요리조리 살살 미끄러지는 가벼운 긴장감, 버스 탑승의 그 달콤함이 기다려졌다. 버스가 왔다. 반가웠다.
버스 맨 앞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 앞으로 마구 달려드는 거리 풍경을 통유리, 와이드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다.
악!
자리에 앉자마자 소낙비가 퍼부었다. 차창은 금세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물로 물감을 풀어 뿌려 놓은 듯 했다. 순식간에 차도에 빗물이 차올랐다. 앞서가는 차량들과 건너편 차선의 차량들의 차바뀌에 마구 튀어 오르는 빗물은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폭포수처럼 여기저기서 소리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낙비 내리는 차창 밖 길거리, 아름다웠다. 정겨웠다.
그런데 이 버스가 ...?
어디로 가는거야 ? 왜 계속 논과 밭이야? 고속도로 같은 휑한 광경이 소낙비 속에서 계속된다. 기사님에게 물었다
"롯데백화점 아직 멀었나요?"
"차고로 들어가는데요"
하차 버스정류장 반대 편에서 탑승하면 승차했던 곳으로 반드시 되돌아 간다고 누가 그래? 버스는 알 수 없는 엉뚱한 곳으로 부천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창에 부딪혀 부서지는 억수같은 빗물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 내리는 서울 화곡역 근처, 종점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다시 길 건너 반대편으로 가면 부천으로 되돌아 가는 버스는 있겠지만...? 있을까? 익숙한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화곡역까지 가는 동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5호선을 탔다. 신길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고 온수역에서 7호선으로 척척 환승했다. 노련했다.
전시장에서 부천시청까지는 겨우 다섯 개 교차로만 건너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버스 탑승 초보자의 제멋대로 생각으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빙 돌아왔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괜찮았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고 넉넉하고 평안했다. 기이하다. 그다지 낙천적인 성격이 아닌 나로선 기분이 안 좋을 만도 한데 어찌된 일인지 실성한 듯 싱글벙글이다.
도대체 몇 년 만에 버스를 타본 거야?
컴컴한 땅 밑으로만 주로 다니는 지하철 (지상 구간은 대부분 방음벽으로 막힌)과는 사뭇 다른 버스 탑승이 어린아이처럼 마냥 재밌고 신났겠지....
대형 버스로 즐긴 빗속 여행,
호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