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 세종문화회관 계단 옆 길거리에는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누구라도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다. 아무나 연주할 수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무라도 털썩 피아노 앞에 앉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곳 피아노 연주자들은 거의 초등학생 아니면 미취학 아동들인 데다 그들의 연주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피아노 앞에 절대 함부로 앉지 않는다. 자기 연주 다음 타자는 분명 꼬맹이 연주자일 테니 자기 연주와 비교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앞에 오는 꼬맹이들은 엄마가 등 떠미니 쭈뼛쭈뼛 피아노 앞에 앉긴 앉지만 부끄러워서 몸을 배배 꼬는 걸로 봐선 콩쿠르나 무대 연주를 앞둔 꼬맹이 연주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연주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 손가락은 건반 위를 냅다 내달린다. 번개 치듯 번쩍번쩍 현란하게 휘몰아친다. 단 한 명도 '학교 종이 땡땡땡' 정도로 피아노 앞에 앉는 아이들은 없다. 쇼팽의 에튀드, 프렐류드는 흔하게 듣는 레퍼토리다. 리스트의 에튀드 초절기교 중 한 곡도 그곳에서 꼬맹이 연주로 들은 적이 있다. 장난감 놀이할 손가락으로 쇼팽, 리스트, 라니.... 피아노 소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연주가 끝나면 으레 박수를 보내지만 박수에 쑥스러운 꼬맹이는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얼굴을 폭 묻으며 수줍어한다. 어린 자녀에게 무대 연주 경험을 간접적으로 나마 쌓게 하려는 엄마의 생각이었으리라. 광화문 광장에 나갈 때마다 놀라운 손가락 놀림은 늘 "볼거리" 다.
볼거리?
피아노 연주가 볼거리라니? 형편없는 표현이라고 불쾌해하시겠지만 자주 찾는 볼거리인 건 맞다. 어린아이들의 손가락 놀림이 현란하다고 연주까지 놀라울 거라 기대하기에는 연주자가 아직은 너무 어리다. 어린 학생들의 클래식 음악 연주가 무척 대견스럽고 신통한 건 분명하지만 말러의 '아다지에토' 류의 느려터진 아다지오 음악이라야 가슴에 꽂히는 불치의 개인 취향이 어린 학생들의 조급한 연주를 그저 볼거리 정도로만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부천시청 잔디광장에 초등학생부터 일반인들까지 83명의 브레이커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2026년 제20회 일본 나고야 아시안 게임에 참가할 브레이킹 국가대표 선발전이 부천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초등부(초등학생) 예선으로 배틀은 시작되었다.
헉!
어린아이가...?
현란한 고난도 몸놀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린 선수들의 브레이킹은 난생처음 보는 놀라운 볼거리였다.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거꾸로 서고, 사지를 사정없이 비틀고... 모든 기술을 실수 없이 (실수가 없었는지는 확실치 않다)해낸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계속되는 꼬맹이들의 몸놀림을 보다 보니 광화문 광장의 길거리 피아노를 연주하는 꼬맹이들의 현란한 손가락 놀림이 떠오른다. 모든 어린 선수들의 브레이킹은 하나같이 동작일 뿐이었다. 춤이 아니었다. 서커스를 하듯 사지를 뒤트는 어린아이들이 안쓰럽게 보일 정도였다. 흥이 날 리 없다. 올림픽이 요구하는 고난도 기본 동작(탑락, 다운락, 파워무브, 프리즈) 기술을 잘 해내긴 하지만 서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다. 볼륨을 잔뜩 키운 힙합음악이 시끄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음악에 녹아들며 독창적인 고난도 동작을 실수 없이 보여주는 종목이 브레이킹이리라. 어른과 비교하면 몸이 유연한 어린 학생들에게 유리할 듯한 종목이지만 힙합음악에 춤을 실어 흥을 만들어 내기란 어린 학생들에게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세월의 벽이 분명 존재하는 종목이다. 올림픽 브레이킹 종목은 규정상 음악을 필요로 한다. 스포츠와 예술이 접목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의 브레이킹은 춤 따로, 힙합 뮤직 따로, 동작들을 순서대로 보여주기에 바빴다.
일반부 B-boy 예선이 시작되었다.
그가 춤을 추고 있다. 춤이다. 브레이킹을 모르는 내가 봐도 어깨가 들썩거린다. 점점 과감해진다. 에라, 모르겠다. 엉덩이도 흔든다. 양손까지 흔들어 댄다. 브레이킹이 만만해 보인다. 트위스트나 고고 댄스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별안간 브레이킹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부 B-boy 8강전에 당연히(?) 그도 올라왔다. 그를 무대 뒤에서 만났다. 아직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홀로 앉아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던 그를 가까이에서 보고 놀랐다. 크고 깊은 눈이 번쩍한다. 눈이 무척 크고 맑았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등 액세서리에 콧수염 턱수염까지 기른 요란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눈이 진중해 보여서 용서? 했다. 겉멋이 아닌 무척 세련되고 조용한 얼굴이다. 사진 찍자하니 막 벗어 놓은 두건을 훌러덩 다시 뒤집어쓰고 카메라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웃지도 않는다. 그냥 앉은 채다. 이상하게도 불량하고 건방지다는 느낌이 안 든다. 브레이킹 이외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듯한 무심해 보이는 얼굴이다. 브레이킹을 깊이 사랑하는 젊은이로 여겨졌다. 브레이킹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죠? 내가 물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망설임 없이,
음악요.
음악에 맞춰 그냥 춤을 춥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기술이 쉬워 보였구나. 춤은 기술적인 몸동작이 아니고 여유와 완급이 매끄럽게 이어져 흥을 만들어 내야 춤이다라는 대답일 것이다. 춤을 추는 자가 흥에 겨워야 보는 이도 흥이 나겠지... 그의 춤엔 전혀 조급함이 없었다. 기술이 춤에 녹아들어 있다. 그는 '춤꾼'이었다.
결승전이다.
그가 당연히(?) 결승에 올라왔다. 사진을 미리 찍어두길 잘했다.
결승전에 올라온 두 사람 중 또 한 사람도 만났다. 사무실에서 급히 무대 위로 막 올라온 대기업 인사부 직원처럼 품행이 단정하다. 매우 공손한 청년이다. 같은 질문을 그 인사부 직원에게도 물었다
창의성요.
남들과 다른 독창적인 동작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사진을 찍자 하니 벌떡 일어난다. 두 손을 단정히 앞으로 모아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활짝 웃는다. 볼수록 단정하고 공손한 모범생 청년이다.
'대기업 인사부 직원'과 '춤꾼'의 국가대표 B-boy 선발 마지막 대결이다. 쓸데없는 유교의식 강박이 여전한 고집불통 동양 노인네의 결정은 공손하고 단정한 모범생 청년을 속으로 응원했다.
승자는....
춤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