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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남 Feb 17. 2024

루이저 로스차일드의 벼룩 실험 -E-

과한 통제 속에서 자란 아이의 삶이 흘러간 방향

<벼룩 실험>

미국의 루이저 로스차일드 박사는 어느 날 벼룩의 점프력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그는 한 무리의 벼룩을 실험용 대형 용기에 집어넣고, 투명한 유리로 덮었다. 그러자 뛰어오르는 습성이 있는 벼룩들이 유리 덮개에 부딪혀 '탁탁'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 뒤 소리가 잦아들자 그는 유리 덮개를 열었다. 벼룩들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모두 뛰는 높이가 유리 덮개 근처까지로 일정했다. 충분히 용기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벼룩들은 덮개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으려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벼룩 실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봤으리라 생각한다. 보통 벼룩 실험 이야기를 통해서 얻어가야 할 교훈은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이고, 그래서 이 실험은 자기 계발서나 투자 관련 도서에 간혹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로스차일드가 진행한 벼룩 실험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추가 실험>

로스차일드는 한 가지 실험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벼룩이 들어 있는 용기 밑에 알코올램프를 두고 불을 붙였다. 5분도 안 되어서 용기는 뜨거워졌고, 모든 벼룩들이 자연스레 생존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벼룩들은 머리가 유리 덮개에 부딪히든 말든 최대한 높이 뛰어 모두 용기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로스 차일드가 수행한 모든 실험에 대해 알게 된 후,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이 이 실험으로 대변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입대를 하는 시점에 이미 강원도로 자대배치가 될 것은 확정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원하는 시기에 군대를 가버리고 싶어서, 102보충대(춘천)로 입대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102보충대 까지 같이 가고 싶어 하셨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어머니와 함께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수차례 거절한 후, 결국 102보충대로 한방에 가는 관광버스를 혼자 타고 입대를 하게 되었다. 관광버스를 타는 곳이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였는데 관광버스까지 가는 것 조차도 어머니와 함께 하기 싫었었지만, 자식된 도리로써 차마 거기까지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창밖으로 울면서 귀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입대한 날은 누군가의 방화로 대한민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불탄 날이었다. 버스에서 뉴스로 그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내가 지금 현실에 있는게 맞는지, 내가 정말로 입대를 하고 있는게 맞는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102보충대에서 더럽게 맛 없는 밥을 몇끼 먹고, 사단 신병 교육대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재수도 더럽게 없었다. 나는 강원도에서도 그 누구도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인제에 위치한 12사단에 배치되었다. 남쪽 지방에서 오랜기간 살았던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추위로 고통받기도 했지만, 공기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줬다. 만성 비염으로 매년 고생했었는데 신병 교육대에 있는 동안 비염이 말끔히 해결됬다. 또한, 그곳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한 덕에 생각보다 살이 많이 빠지게 되었다. 팔굽혀 펴기 10개를 채 못했던 비루한 체력을 가졌던 내가 신병 교육대를 수료할 즈음에는 50개도 거뜬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자대에 배치 받고, 그리 힘들지도 편하지도 않은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군번줄이 풀린덕에 나는 꽤 빠른 시기에 부대의 체력 단련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나날이 체력과 몸이 좋아졌다. 불과 1년전만 해도 뒤룩뒤룩 살찐 몸을 가지고 자존감이 붕괴되어 있었는데 몸이 좋아지니까 부족한 자존감이 많이 채워졌다. 더 나아가 제대를 1년정도 남긴 시점부터 꾸준히 독서를 했다. 제대전까지, 어림잡아 1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도피성으로 군대에 입대 했지만, 생각보다 그곳에서 얻은게 많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타의가 아닌 자의로 목표를 세워보았고, 그 곳에서 크고 작은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다. 군 생활 자체는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는 순간이었다고 확신한다.  


전역 후에 복학을 할 지, 휴학을 유지한 상태로 공부가 아닌 다른 걸 할 지 고민 했다. 체력적으로는 자신감이 만땅 이었지만,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나에게 퍽 두려운 일이었다. 2달의 기간이 있었기에 선택을 보류하고 우선 외삼촌이 소개해준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말이 공장이지 노동 강도는 노가다나 다를게 없었다. 나는 볼트 창고에서 지게차에 끼워진 파레트 위에 올라가서 각 선반에 있는 규격별 볼트 자루를 차곡차곡 파레트 위에 쌓는 일을 했다. 금속 볼트로 꽉 채워진 자루는 매우 무거 웠고, 체력이 좋다고 자부한 나조차도 혀를 내두룰 정도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 곳에서 일을 하면서 느낀게 두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생각보다 내가 몸으로 하는 일에 소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깡마른 사람이 들어와서 같이 일을 했는데 그 분이 나보다 힘이 약해도 성과는 월등했다. 나는 일을 하는 동안 잦은 실수로, 공장장님께 혼나는 일이 비일 비재했고, 몸으로 하는 일에 대한 최적화가 매우 서툴렀다.

두 번째는 환경에 맞춰서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공장에는 남자답고 호탕한 좋은 형/삼촌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벌이가 많지 않았지만 유흥을 즐겼고, 내일이 없는 것 처럼 하루 하루 살아갔다. 공장에서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형이 한 분 계셨는데 우연히 술을 같이 마시게 되면서 본인 인생 얘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괜찮은 대학교를 1년정도 다녔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져서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형은 이 정도 수준의 인생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 형이 나에게 해준말은 명료했다. 

"돈 몇푼 번다고 지랄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교는 졸업해라. 여기 일하는 삼촌들 보면 알겠지만, 너 대학 졸업 안하고 기술도 없이 몸쓰는 일하면 좆 되는 거니까 이번에 배웠다 생각하고 여기서의 기억은 그냥 추억으로 남겨둬라. 그리고 형이 봤을 때, 넌 몸으로 일하는 체질 아냐. 다시는 이런데 얼씬 거리지마. 다음 방학때도 여기와서 알바한다고 얼쩡거리면 그땐 진짜 죽는다!"

이미 내가 느끼고 있었던 걸 그 형이 확인 시켜 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부로 나는 복학을 결심하고, 낮에는 몸이 부숴져라 일하고 밤에는 전공과목 공부를 했다. 선행학습이면 좋았 겠지만 부끄럽게도 1학년 때, 하지 못했던 공부를 전역하고 나서야 하게 되었다. 인생을 살면서 공부하다 코피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복학을 했고, 어머니께 간절히 부탁했다. 공부를 제대로 열심히 해볼테니 생활에 스트레스 받지 않을 정도로 용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그 부탁을 들어주셨다. 덕분에 나는큰 걱정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복학 후, 첫 학기에 우수한 성적을 이뤄내면서 장학금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스스로 공부를 해도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헤이해질 때마다 공장에서의 기억을 리마인드 하면서 마음을 다잡아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내 인생 첫 1등을 대학에서 이뤄보았다. 학부 건물에서 성적표를 출력하는 기계앞에서 성적표를 출력하면서 학부생 150명중에 1등이라는 숫자를 확인 했을때의 그 희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복학 후, 겪은 5학기 중에 1번 빼고 성적 우수로 장학금을 수령했다. 그만큼 열심히 공부했지만 4학년 1학기가 끝난 시점에 번아웃이 와서, 난 휴학을 하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호주에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격한 반대가 있었지만 난 이미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올라갔고, 여러가지 성취도 이뤄냈기에 이전과는 달리 어머니를 설득하고 호주로 떠났다. 호주에서의 삶은 평온했다. 멜번 도시 한가운데에서 거주하면서 호주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접시 닦으면서 F로 시작하는 욕도 많이 먹어보고, 호텔 방 치우는 일 하면서 일 더럽게 못한다고 인도인 슈퍼바이저한테 욕도 먹었지만 그래도 즐거 웠다. 5개의 학기동안 공부만 했던 나였기에 복잡한 생각 없이, 몸 쓰는 일하면서 머리를 리프레쉬 할 수 있었던 호주 생활이 정말 좋았다. 


1년여의 호주생활을 마치고 4학년 2학기에 복학을 하고, 난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취업준비가 전혀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해당학기는 버린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서울/수도권이 근무지인 대기업 3곳에 입사지원을 했고 너무나도 운 좋게도 그중 한 회사에 바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0년차가 된 현재까지도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10년의 직장생활 중에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아서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유리병 안의 벼룩처럼 살다가, 알콜램프로 유리병이 달궈지고 있는 탓에 유리병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안간힘을 써서 유리병에서 탈출한 이후에야 비로소, 성취를 이루고 자아 실현을 이뤄낼 수 있었다.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에 비해, 군 입대 이후의 삶이 글로 표현되었을 때는 비교적 순탄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 자체의 난이도는 학창시절에 비할 바 없이 군 입대 이후의 삶이 높았다.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기간에도 어머니와 수 없이 많은 갈등이 있었고, 결혼 반대로 원했던 결혼시기가 1년 이상 딜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 그걸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주는 힘을 알고 있었기에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학창시절과는 달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도 방향이 잘못되었을 뿐 최선을 다해서 나를 키워주셨다. 교육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비록 내가 원하진 않았지만...), 조금은 아니 어쩌면 많이 잘못된 방식으로 자식을 훈육하셨다.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이기 전에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내가 첫 아들이기에 어떤 방향이 옳은지 알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잘못된 방향 때문에 어머니는 의도치 않게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투입 된  자원(돈, 에너지)에 비해 결과도 만족스럽지 못했으며, 자식과의 사이도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타지 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금전적인 지원은 받으면서도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어머니의 지원과 나의 노력의 콜라보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되었고, 괜찮은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대기업에 입사하게 됨으로써, 어머니는 본인의 양육방식에 정당성을 부여하시게 되었다. "야! 너 공부에 취미없는애 엄마가 어떻게든 붙잡아 둬서 이렇게 된거야. 니 혼자 잘나서 이렇게 된 줄 아냐?" 한동안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큰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 어머니의 생각을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과 본인의 성공을 동일시 하여 인생을 살아 오신 분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자식을 키울 일도 없는 어머니의 인생을 부정한다고 내가 얻게 되는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유리병 안에 갇혀서 아무 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우울한 학생에서, 자립심을 가진 한 가정의 가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금전적인 지원을 다 받고, 단순히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게 그렇게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 어떤 분들은 이 글을 보고, "지 혼자 잘났구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확실히 하고 넘어갈 점은 나 역시 어머니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절대 지금과 같이 살지 못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정말 나에게 헌신적으로 노력하셨고, 진심이셨다. 확실히 그 부분은 나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나에게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셨다면 어땟을까? 성적이 좀 떨어졌더라도 체벌과 폭언대신 격려을 해줬으면 어땟을까? 스스로 성취를 느낄 수 있도록 기회를 줬으면 어땟을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더 나아가 나는 어머니의 잘못된 방향의 양육 방식으로 인해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 때문에 사회생활을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알콜램프로 달궈진 유리병에서 간신히 탈출한 벼룩은 과연 아무런 데미지 없이 다른 벼룩과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일부 벼룩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높은 온도로 가열된 유리병은 어떤식으로든 벼룩에게 데미지를 입혔을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니와 함께한 기간 동안의 일들이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향을 받은 것 중 가장 싫은 것은 바로 내가 어머니와 똑같은 방식으로 가족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혼 후, 나는 와이프를 항상 바꾸고 싶어했다. 내가 생각하는게 옳고 와이프가 생각하는 건 틀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초반 2년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30년 이상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게 너무나도 당연한건데 그것을 옳고/그름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답이 없다. 하지만 난 결혼하고 2년동안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어머니랑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와이프는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해 줬다는 것을....

이것을 깨닫고 난 후 난 와이프에게 미안하다고 사과 했다. 그리고 내 기준에 '틀린'것이라고 해도 가급적 '다른'것임을 인정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에 와이프와 나 사이의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와이프를 향해 턱끝까지 차오르는 '잔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삼키곤 한다. 나아가, 안그래도 예민한 나의 아들에게 어머니가 나에게 했던것과 똑같은 행동을 할까봐 너무나도 걱정이 된다. 나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같아서 마음이 심난하다. 만약 내가 와이프에게 했던 것처럼 아들을 대하게 된다면, 사랑스런 나의 아들과의 사이가 멀어질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고 싶은 말을 무조건 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어머니께 싫은걸 싫다고 말 못하고, 하고 싶은걸 하고싶다고 말하지 않았던 게 너무나도 후회가 됬엇다. 곪아 터져버리기 전에 내가 좀 더 어머니에게 의사 표현을 했더라면, 어땟을까 하는 후회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 집을 떠나 지내게 되면서, 하고싶은 말은 무조건 하고 살자고 다짐 했었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다가도, 하고 싶은 말은 가급적 참지않고 뱉다보니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게 되었다. 더 나아가 사람을 대할 때도, 본의 아니게 옳고/그름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서, 직장동료들이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이 되어버린 것도 없지 않아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몇명의 선/후배에게 실수를 한 이후에야 내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무례하고, 편협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 부분은 빠른 속도로 개선이 되고 있는 중이다.


글을 쓰다보니 원래 생각했던 것 보다 분량이 너무 길어졌다. 본의 아니게 짧게 요약된 자서전을 쓰게 되면서다양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연민 그리고 어린시절 나에 대한 서글픔,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이뤘을때의 성취감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등 여러 감정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중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지나온 삶으로 부터 깨달음을 얻고, 미래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의 성실함과 꾸준함을 존경한다. 그 부분은 앞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좋은 양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했던 훈육방식은 단 1만큼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할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다면 난 어머니와 비슷한 방향으로 아들을 훈육할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결국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풀어낸 자서전임과 동시에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나의 다짐이다. 난 반드시 좋은 부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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