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몰입하기 어려운 영화다. 정확히는 감정이입하기 어려운 류인데, 관객이 스크린 전면의 말하고 움직이는 인물에 동화되는 것을 영화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타이틀이 사라지면 몇 분간 불편한 소리와 함께 암흑이 이어진다. 공포영화의 배경음악 같던 소리가 이내 새소리로 바뀌고 암흑의 화면이 평화로운 소풍의 풍경으로 바뀌지만 우리는 앞의 몇 분 동안 경험한 불길함을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그리고 곧 지나지 않아 이 오프닝의 시청각은 이어질 영화에 대한 예고였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우리가 회스 소령 가족의 이야기에 몰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의 평범할 따름인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그 뒤를 막고 있는 벽이 쇼트의 중심이 되고 그들의 대화를 들려주면서도 벽 너머의 개 짖는 소리, 비명 소리, 기계 소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다. 관객은 스크린 저편으로 계속 밀려난다. 이렇게 두드러지는 형식을 통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낀 충격에서 영화가 만든 시각과 청각의 실체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학살은 선악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건이다. 그리고 숱한 미디어에서 우리는 나치가 악당, 유대인이 비극의 피해자로 묘사되는 것을 접해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새로운 접근은 이야기라는 프레임을 해체한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비극적 역사를 영화가 다룰 때 그것을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내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유대인 수용소에 영화적 인물을 가미해 우리가 몰입하는 스토리로 만들어낸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비판한 적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스필버그보다 하네케의 견해에 손을 드는 영화다. 영화 속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대인은 한명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배경의 소리 또는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재가 되어서야 카메라 앞에 놓여진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유대인 수용소라는 고통 받는 인간들의 비극을 드라마화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의 주변부를 택한다. 우리가 모두 아는 역사의 두 가장자리, 평범한 악과 조용한 선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묻는다.
악마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대낮에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이 피로 물들 듯 그들의 정상성 아래의 비정상성은 삐쭉삐쭉 튀어나온다. 아이들은 무고한 사람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지 않고 엄마는 못견디고 떠난 할머니의 편지를 바로 태워버린다. 그들은 관객이 듣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내이자 엄마 헤드위그에게 굴뚝의 연기는 자신이 꿈꿔오던 낙원에 어쩔 수 없이 딸려오는 하나의 흠이다. 아이들에게 비명은 모형 놀이의 실사판 혹은 숲 속의 신기한 새소리같은 것이고 이빨은 신기한 골동품이다. 루돌프에겐 무엇보다 직업이다. 루돌프는 파티에 모인 사람들을 죽일 방법을 모색하느라 즐기지 못했다고 아내에게 무심하게 고백한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인간의 직업병인 것이다.
반대편 가장자리에는 최선의 선을 베풀던, 어둠 속 문 밖의 존재가 있다. 회스가 밤에 방마다 불을 끄고 문단속을 하며 잠들지 않은 딸을 발견했을 때 들려주는 동화와 맞붙는 화면은 밤 늦게 몰래 집에서 나간 폴란드 소녀다. 정원의 아름다움이 가리지 못하는 비명소리에 이어 이번엔 또다른 시각과 청각의 충돌이 제시된다. 문 밖의 소녀는 뒤집힌 네거티브 필름으로 찍혀있고 이 생경한 화면은 회스가 읽는 동화 소리로 덮힌다. 사과를 먹을 사람들의 동화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뒤집혀 찍힌 소녀는 희망적인 동화를 위선으로 들리게 한다.
악에 대한 반격을 그린 네거티브 필름은 마지막 반격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자신의 낙원으로 돌아가려는 악마에게 이번엔 미래가 반격한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이자 추모관을 청소하는 이들은 루돌프와 헤드위그의 집을 청소하던 폴란드 사람들과 연결된다. 당사자가 사라진 자리에 서서 과일을 놓는 사람들과 청소를 하며 그들을 기리는 사람들. 끔찍한 악을조용한 선으로 반성하고 기억하는가장자리의그들은 유대인들의 빈자리를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땅에서 일할 유대인은 수용소 벽 너머에 있고 유대인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유리벽 너머에는 희생자가 남긴 흔적밖에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는 벽 뒤에 있다.
수용소 벽으로 가려진 당사자와 소리로 넘어오는 고통. 엔딩을 보고 나서야 이것이 유리벽 너머 쌓인 신발임을, 영화의 형식 자체가 보이지 않는 그들을 위해 만든 추모관임을 알 수 있다. 이제야 관객은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기억하고 관리하는 사람들. 스크린을 바라보며 그들의 부재를 통해 어느 때보다 그들의 존재를 실감하는. 그곳이 관객이 있을 위치다.
회스 장교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혹은 못 본척한다. 그는 몸의 본능적인 거부를 무시한 채 그가 이때까지 문을 걸어잠그며 보지 않으려 했던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감독은 인물을 놓아준다. 포기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다시 영화의 시작처럼 화면은 까맣게 변하고 그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이제 까맣게 변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비명과 속삭임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암흑으로 변해 무언가를 가리는 스크린이라는 벽을 뚫고 소리가 넘어올 때 우리는 진정한 추모를 경험한다. 이제 스크린이 가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극장 밖에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