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의, 영화치고 많은 챕터 구조와 더불어 초반부터 두드러지는 도구는 영화의 나레이션이다. 나레이션의 화자는 영화 속 캐릭터 중 한명이 아니라 이야기 밖의 존재이고 이 나레이션은 그녀를 정의내리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 밖의 화자는 한 사람의 인물을 단숨에 요약해내고 인물들의 말과 마음을 대신 말해주기도 한다. 인물들을 스스로의 말에 대한 복화술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 새침하고 권위적인 화자는 그 사용 자체 뿐만 아니라 퇴장하는 시점에 있어서도 영화에 의미심장한 터치를 더한다. 내레이션은 율리에와 악셀의 이별 장면 이후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시점에 악셀을 떠나 의 집으로 향한 율리에는 더이상 앞으로 나가는 직선을 그리지 못하고 최고점을 지난 포물선처럼 다시 땅을 향한다. 이전까지 자신이 통과해온, 남자들로 대변되는 인생의 단계를 되돌아보는 성장통을 겪게 되는다. 버섯을 먹은 뒤 보는 환각은 이를 뚜렷하고 소름돋게 요약한다. 늙은 몸을 붙잡고 있는 수많은 지나온 남자들 그 끝에서 만나는 아빠. '자유롭고 싶다'면서 연인을 만드는 율리에의 모순이 떠오르는 그녀의 발을 붙잡는 것이다.
초반부 율리에가 하는 선택들의 동력은 '지금의 상태는 싫지만 앞으로 뭘 원하는지 모르는' 그 불안정한 상태,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다. 영화에서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율리에의 이 말에 다른 영화가 딱 떠올랐는데, 바로 우디 앨런의 'Vicky Cristina Barcelona'다.
나는 우디앨런의 영화를 세련된 캐리커쳐라고 정의내리길 좋아하는데, 우디 앨런의 영화는 몇 습관으로 요약 가능한 캐릭터들을 데리고 이러저리 조립해보는 지적 유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VCB의 경우에는 중심 네 인물 모두가 한줄 요약이 가능하고 이중 미국인 여자 크리스티나의 캐릭터가 사누최의 율리에와 겹쳐보인다. 흥미로운 건 VCB도 내레이션이 중요 도구인 영화라는 것이다. 이야기 밖의 화자는 여기서도 권위적인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는 크리스티나를 '뭘 원하지 않는지는 알지만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으로 요약해버린다. VCB는 그 시작부터 뭘 원하는지 모르는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를 만나 지지고 볶다 다시 미국으로 가는 여정으로 규정지어 진다. 내래이션은 이야기 밖의 존재가 이야기의 운명을 한손에 쥐고 있다는 신호이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이야기꾼의 초대장이다.
이 지점에서 사누최와 VCB의 성격이 달라진다. 한줄로 요약된, 화자가 점지한 운명을 또박또박 따라가 결국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아마 삶도 그렇게 마무리할 것으로 예측 가능한 크리스티나와 달리 율리에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화자에게서 가져온다. 이야기의 창작자는 인물을 놓아주고 관객은 스크린 속으로 멀어져 깊이가 생긴 인물의 미스터리 속에 떠다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차곡차곡 쌓아가 완성되는 비극의 쾌감은 잃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간의 미스터리를 얻는다. 남자 집을 전전하다 마침내 자기 방을 얻은 율리에의 뒷모습을 놓아주듯 멀어지는 화면에선 완결된 이야기로는 얻을 수 없는 희미한 안도감이 느껴진다. 멀리서 듣는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도 아직 언어로 표현 못한 내 얘기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