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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버프 Feb 23. 2023

타르 | 소셜미디어 시대에 마에스트로가 존재하는 방식


‘타르’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모든 정보들이 간접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바흐의 음악처럼 질문을 계속 낳는 화법을 사용하는데, 오프닝에 재생되는 엔딩 크레딧, 함께 흐르는 토속음악, 이어지는 주체 모를 핸드폰 시점쇼트까지, 영화는 초장부터 물음표를 뿌린다. 영화의 관심은 그 물음표들에 답을 달아주는 것이 아니며, 결말까지 보고 난 후 느껴지는 것은 이 수많은 질문들이 해결되며 생기는 퍼즐 맞추기의 쾌감이라기보다는 그 많은 질문들을 품으며 경험하는 리디아 타르라는 한 인간의 단면이다.



스스로 개명하는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신들린 연기를 한 또 다른 작품인 ‘블루 재스민’이 연상되지만(블루 재스민에서는 자넷이 상류사회에 걸맞는 이름인 재스민으로 개명한다) ‘타르’에서 인물을 다루는 방법은 ‘블루 재스민’보다 훨씬 모호하고 간접적이다. '블루 재스민'에서 재스민은 우디앨런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냉소의 대상이다. 관객와 함께 한발치 떨어져 있는 우디앨런은 허상을 버리지 못하고 내면이 무너져버리는 여자를 화려한 신경쇠약 에피소드들을 비웃게 만든다. 하지만 토드 필드의 관점은 우디 앨런의 것-인물을 이야기 속 캐릭터로 보기-과 다르다. '타르'는 리디아 타르의 전기영화로 느껴질 정도로 빼곡한 디테일로 차있는, 인물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는 영화다. 리디아 타르는 모호하다. 그녀의 과거도 모호하고 그녀가 경험하는 사건에 보이는 반응과 표정의 정확한 의미도 파악할 수 없다. 과거는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되고 각 장면에서 리디아가 보이는 제스쳐, 행동에 대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물음표들에도 불구하고 짜증 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리디아라는 인간을 보는 가장 객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이다. 리디아가 사실은 린다라는 영화 후반부의 반전과 그때 동생의 말, “너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리디아 타르라는 인간, 그리고 ‘타르’라는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제시다. 리디아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여자이다. 인물 스스로도 모르는 걸 어떻게 창작자가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미스터리를 쌓는 '타르'의 캐릭터 축조 방식이 리디아 타르라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의 초상을 그리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리디아는 완벽한 가해자도 아니고 완벽한 피해자도 아니다. 단지 인간관계를 일종의 거래로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녀는 샤론을 처음 만난 객원지휘자 때부터,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특정 규칙으로 작동하는 거래들을 만들며 오케스트라라는 호의 꼭짓점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우리가 리디아를 만나는 시점에는 크리스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혐의들로 리디아가 '가해자'가 되며  거래의 대가가 드러난 것이다. 거래의 참여자에서 상대를 해친 가해자가 되버리는 순간 거래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에 거래들엮여있 그녀의 권력 시스템에는 균열이 생기고 꼭짓점에 있던 리디아의 위상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거래로 작동하는 인간관계의 방식은 리디아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윗 세대의 ‘마에스트로’들에게서 내려온 것이고 클래식계라는 어떤 권력 위계 사회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리디아 타르는 강박적으로 본인의 이미지를 건설한다. 이것은 소셜미디어 시대에 '마에스트로'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작은 생태계의 꼭대기에 존재하는 권력가이자 우상이 되는 예술가로서의 이미지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스스로 고치고 트위터에 수시로 들어가 여론을 확인해야 한다. 과거의 마에스트로들은 신경 쓸 필요 없었던, 핸드폰 카메라로 찍힌 모습, 조각조각 이어 붙인 편집으로 퍼지는 말들이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것이다.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아나 드 아르마스는 '무비 스타'가 더 이상 없는 이유로 소셜 미디어로 유명인의 신비감이 사라진 것을 꼽았다. 불완전함까지 완벽의 신화에 기여하는 스타의 이미지 메이킹이 소셜 미디어로 인해 불가능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마에스트로'라는 이미지와 지위도 정보 과다의 시대에 흐려진다. 리디아 타르의 강박, 혼란은 이 2020년대의 시대적 디테일과의 마찰에서 기인한다. 영화는 이런 시대와 그걸 겪는 인물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한 가지 태도를 취하는 것을 지양하는, 간접 화법을 선택함으로써 '타르'는 독특한 유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리디아가 느끼는 미스터리를 차갑게 제시하고 주관적 시점이 많이 제시됨에도 인물과 거리를 두고 환경에 대한 리디아의 리액션에 집중한다.



 결말부의 리디아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악어, 오래전에 탈출해 없어지지 않는 끈질긴 존재, 임을 알게 된 리디아는 과연 과거와 다른 이야기를 쓰게 될까? 이름 모를 아시아 국가는 새로 쓰는 이야기에 새로운 아마존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회의적인 답변만 할 수 없는 이유는 리디아가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기꾼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몬스터 헌터 음악을 지휘할 때도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바흐나 말러의 음악을 대할 때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렇기에 코스프레를 한 관객 앞에서 게임 음악을 지휘하는 것은 감독이 낄낄거리며 리디아에게 내리는 굴욕적인 형벌로도, 클래식계의 '거래'들을 벗어난 리디아에게 쥐어 주는 안정으로도 느껴진다. 실제 인간과 마찬가지로 두부 자르듯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것이 '타르'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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