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콕

by 송준

남자와 여자의 손을 이어주는 상자 윗면에는 P라는 파란 글자가 적혀있었다.

“좀 다녀와. 어차피 너희 집 근처잖아. 그냥 가는 길에 들러서 전해주면 돼.”

“택배로 보내면 되잖아요.”

“그걸 못했으니 이러는 거잖아. 홍보용으로 주기로 한 건데, 늦으면 곤란하잖냐. 퀵으로 보내기에는 또 아까워.”

“찬호는요?”

“이 녀석도 배달은커녕 집에도 못 갈 지경이야. 이번 주에 꼭 받고 싶다고 몇 번이고 당부하던지 원. 얼른 줘버리고 털어버리자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쭈뼛거리자, 옆에 있던 찬호가 거들었다.

“누나. 좀 부탁하자. 가서 반응도 보고 그러면 좋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누나가 전부 만든 거니까. 나 진짜 한 달째 수영이 얼굴도 못 보고 있어. 전화도 하루에 수십 통씩 받느라 저녁이 되면 그제야 내 일이 시작한다니까?”

찬호는 엎어진 우유처럼 널브러진 종이 뭉텅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고, 녀석의 말마따나 거래처와의 통화로 들들 볶이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던 터라 이번 배달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휴 진짜. 알겠어요.”

사장은 손뼉을 크게 한번 치고는 계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냐. 자, 내일 주말인데 이걸로 뭐라도 사서 들어가. 너 요즘 독립해서 냉장고 텅텅 비었다고 네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던지. 이 삼촌 귀에 딱지 앉겠다.”

더벅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가 지폐 몇 장을 건넸지만, 계주는 그대로 뒤돌아버렸다.

“저 갈게요.”

막다른 골목길의 가장 안쪽의 위치한 다세대 주택은 새 건물은 아니었으나 상앗빛 바탕에 짙은 회색 테두리를 칠해놓아 허름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회색 계단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했고, 붉은 난간 손잡이는 그 위로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비칠 만큼 매끈했다. 난간을 따라 4층에 오른 계주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말끔해 보이는 남자 하나가 반쯤 열린 문에 기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마주 선 남자가 멋쩍게 인사했다.

“여기요.”

계주가 무성의하게 물건을 건넸고 남자는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손을 뻗었다. 계주는 상대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의 얼굴을 무성의하게 쳐다보며,

“고맙습니다.”

고마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말을 짧고도 재빠르게 내던지고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잰걸음으로 나아가던 계주는 1층으로 내려와 P의 집에 올 때 지나온 놀이터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노을의 끝자락이 아직 남아있던 터라, 솜이불 같은 구름이 하늘 한 구석을 덮고 있는 것을 보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막 깔렸는지 검은 냄새를 모락모락 피워대는 아스팔트 냄새를 피하다 보니 원래 가려던 길보다 훨씬 더 돌아가게 되었다. 해가 완전히 지면서 기온이 빠르게 떨어져 가는 게 느껴졌지만, 차가운 공기에 파묻히는 걸 뿌리칠 생각은 없었다. 아직 한참을 더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멀찌감치 산동네 한구석에 자리 잡은, 수년째 닫혀있는 외딴집 문 앞까지 와버렸다. 이미 한참 전에 칠이 벗겨져 갈색으로 변해버린 어느 초록 대문을 곁눈질하며 지나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대문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우유 주머니를 열어서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계주는 차마 우유 주머니로 다가가지는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절름발이 미리를 떠올렸다.

*


20년도 더 지난 시절이었다. 소녀는 초록 대문에 매달린 우유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손가락 끝에 닿을락 말락 놓인 유산균음료를 집으려 허우적대다가 주머니 입구에 쓸린 손목만 만지작거리며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집에 들어갈 때면 늘 조심해야만 했다. 일 년을 채 못 키운 강아지 미리가 문만 열리면 뛰쳐나가곤 했고, 그렇게 되면 온 집안의 남자들이 개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문을 나섰으니까.

미리의 어미는 원래 옆집에 살고 있었다. 주인이 갑자기 동네를 떠나고 며칠 후, 새끼를 밴 채로 소녀의 집 뒷마당 구석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측은하게 여긴 그녀의 할머니가 거둬들여 태어난 게 미리였다. 개를 실내에서 키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집안에 들일 수 없었다고는 해도, 개집도 없는 마당에서 겨울을 보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나마 온기가 있는 연탄불 옆에 녀석의 자리를 놔주었다. 그러나 연탄가스를 마셔서인지 네 마리의 새끼 중 세 마리는 태막에 쌓인 채로 숨을 거두었고, 그나마 아직 태막에 쌓인 미리를 할머니가 너무 늦지 않게 발견한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오른쪽 뒷다리가 뒤틀린 채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계주는 미리의 어미가 우리 집에 머물렀던 일부터 태어난 강아지가 생명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게 연탄불 때문이라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소녀에게 할머니의 설명이 따라붙었다. 무릇 개는 집을 떠날 수 없는 존재이며, 태막까지 벗어나야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연탄은 원래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 동시에 할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손녀의 궁둥이를 토닥였고 그런 할머니의 의도와는 다르게, 적어도 계주에게는, 개를 유기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으며 미리 어미에게는 새끼의 태막을 벗겨줄 의무가 없고 위험한 연탄으로 살아가는 인간보다도 못한 개는 위험한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 들려 가슴이 울컥거렸다. 겨울의 연탄이 가족들에게 죽음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덤이었다.

유례없는 긴 봄과 짧은 무더위가 지나가고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던 장마가 한참 지나, 벼가 익어 추수를 바라볼 시기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돌아온 소녀는 미리를 겨드랑이에 낀 채 곧장 다락으로 올라갔고, 올라가는 내내 흔들어 대던 미리의 꼬리가 소녀의 등을 간질여 들뜨게 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소녀는 미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아담한 크기의 다락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내내 미리가 흔들어 대는 꼬리가 등을 간질여 소녀를 들뜨게 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다락은 쥐가 사는 곳이었고,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바퀴벌레가 나오는 곳이었다. 또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가면 먼지를 뒤집어쓰고 거지가 되는 곳이기도 했지만, 화사한 봄날에 살던 다섯 살 꼬마애가 한겨울에 사는 여섯 살 꼬마가 될 때까지 다락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아이가 들어가면 귀신이 잡아간단다.’

결국 일곱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소녀의 집에 놀러 온 동네 골목대장이었던 남자아이 하나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앞장섰고 네댓의 아이들이 다락으로 몰려가 함께 놀고 난 이후에야 소녀는 홀로 다락을 오갈 수 있었다. 다락에서는 들판을 볼 수 있었는데, 마을 초입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이어져 드넓게 펼쳐진 황금 들판은 가을 아침 햇살을 받았을 때와 석양빛에 물들었을 때 모두 황홀한 모습을 뽐냈다. 비탈진 언덕길 중턱을 가로지르듯 평평하게 펼쳐져 촉촉하게 젖은 들판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을 뿐이었음에도 가슴이 설렜다.

다락에서 내려와 마당으로 나오자, 까치발을 들어도 그 너머를 보지 못할 만큼 높은 시멘트 담벼락 위를 샛노란 햇살이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러자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흠뻑 젖은 빛나며 보드랍고도 꾸준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황금 들판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계주는 그 풍경을 미리의 코앞으로 가져다주고 싶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 대문을 보고 멈춰 섰다. 제법 튼튼했던 대문이 어린 계주에게는 금방이라도 길을 터줄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흔들리던 대문 틈 사이로 바깥세상을 보일 듯 말 듯 비추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제 대문은 반짝이는 햇살을 따라 초록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던 미리의 어미는 때마침 집 안에서 풍겨오는 참기름 냄새에 화들짝 놀란 듯 일어나 현관문 사이로 코끝을 들이밀었고, 반대로 미리는 열심히 대문 밖을 향해 코끝을 들이밀었다. 대문 틈에 슬어있는 녹가루가 바람을 따라 미리의 콧속으로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하던 소녀는 결국 그들을 막아선 대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미리는 배를 까고 누워있다가도 가볍게 일어나 쉬이 걸었고, 뛰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몸이 멈춰버리면 다시는 뒷다리를 못 쓸 것처럼 전력으로 질주하던,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불편하던 다리가 갑자기 쭉 뻗쳐서 땅을 박찰 것도 같았다. 반듯하게 잘 다져진 논길을 타고 달려가는 미리의 몸은 집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 보였다. 그건 미리와 나란히 달려 나가던 계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계주와 달리 미리는 지칠 줄 몰랐다. 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질까 두려웠던 소녀는 미리를 잡으려 했지만, 미리가 손을 좌우로 피해 달려나가는 바람에 결국 영영 멀어지는 미리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가 저만치 가버렸을 때, 그보다 먼 언덕에서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미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던 소녀는 전처럼 빠르게 뛸 수 없었다. 단말마의 신음 후에 미리는 비탈진 내리막길로 데굴데굴 떨어졌으니까. 몇 배는 더 커다란 개에게 물리던 바로 그 순간 미리는 즉사했지만, 목덜미를 물어뜯어 내동댕이쳐진 작은 몸은 마치 커다란 덩치를 피해 전력으로 비탈길을 굴러 내려오는 것처럼 보여서, 미리가 위기를 잘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심 하게 만들었다. 이내 축 처진 고깃덩이처럼 소녀의 발 앞에 멈춰버리기 전까지. 이상하게도 피는 흐르지 않았다.


*


“월월월월! 월월!”

멍하니 바라보던 대문 아래로 개의 주둥이가 보였다. 이빨을 드러내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쫓아 보내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계주는 서둘러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저기요.”

달아나듯 걸어가던 그녀의 뒷덜미를 웬 남자의 목소리가 톡 하고 건드렸다.

“저기요. 잠시만요.”

마음과 다르게 계주의 몸이 그 자리에 멈추어버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구대가 바로 근처에 있어서 여차하면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선 뒤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 자리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을 쫓아온 남자가 서 있었다. P였다. 계주는 빤히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사내는 왼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여기, 말씀드린 것과 다르네요. 이 부분이요.”

사내가 오른쪽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면서 피규어를 꺼낼 때 열었을 때까지도 계주는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그의 지팡이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옮겨온 발자취는 꼭 새벽 한 시 같았다. 왼발은 정면, 오른발은 한 시 방향으로 뉘어있었으니까. 실제로 그의 발자국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그를 얼핏 보았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다소 나이 들고 멋없어 보이는 이름과 다르게 호리호리한 체격에 계주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계주에게 남자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대신 계주가 곧장 대답했다.

“죄... 제, 제가 다시 가져다드릴게요. 바로요.”

“아니에요. 저도 생각보다는 여유가 좀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다음 주까지만 가져다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재촉했나 보네요.”

계주는 순간 죄송하다고 말할 뻔했다가 멈추었으면서도 금세 표정을 바꾸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다시 가져다주겠다는 소리를 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인기가 별로 없는 캐릭터라 그랬나 봐요.”

그가 말했다.

“네?”

“피콕이요. 원래는 주인공이었거든요. 정의감과 열정이 넘치는 캐릭터였는데 나중에는 악당 중의 악당으로 변해버렸어요. 뻔한 이야기예요. 사실 피콕의 뒷이야기는 정식 단행본에서는 나오지 않아요. 그렇지만 유독 마니아층이 두텁던 캐릭터라 작가가 특별히 자기 홈페이지에 공개했죠.”

진중함과 침착함밖에 없을 것 같던 그의 얼굴이 신나게 들떠서 하마터면 계주도 재미있는 만화에 푹 빠진 사람처럼 헤헤거리는 얼굴을 내보일 뻔했다.

“아, 네.”

일부러 얼굴이 풀리지 않게 힘을 주자 이목구비가 정중앙으로 모이는 듯했다.

“워낙 나온 지 오래된 만화이기도 하고, 구하기도 쉽지 않은 캐릭터라 제가 괜히 마음만 앞섰는데, 결과물을 보니 믿고 기다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 오래 뺏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남자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으나 계주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만 숙여 보였다.

피콕은 P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이었다. 웬만한 만화 캐릭터는 전부 알고 있는 계주에게도 생소한 캐릭터라 찬호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주인공이 특별히 없어.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가 여럿이기도 하지만, 걔네가 다른 행성에 도착하면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거든. 밴드가 보컬을 새로 구하듯이. 아니면, 이사해서 텔레비전 바꾸듯이?”

“주인공도 없이 주변 인물들만 여행을 다니면서 주인공 될 인물을 구한다고?”

“맞아.”

“그럼 여러 행성을 떠도는 인물들이 주인공 아니야?”

“그렇기엔 비중이 작아. 새로운 행성에 도착할 때마다 에피소드가 꽤 여러 편 나오는데, 그때마다 새로 투입된 주인공 위주로 이야기가 흘러가.”

“피콕도 어느 행성에 사는 주인공이겠네?”

“주인공 중 하나였지. 필살기가 일품이었던.”

“필살기?”

“왜 있잖아. 악당과 열심히 싸우던 주인공이 전투의 마지막 장면에서 쓰면 무조건 악당을 쓰러뜨리는 기술. 그러고는 음악이 바뀌면서 평화가 찾아오게 만드는 그런 거.”

“아, 그 필살기.”

“그렇지. 어떤 만화 주인공이든 필살기 하나씩은 있잖아. 피콕은 망토를 활짝 펼쳤어. 망토가 위로 솟구쳐 올라가 역삼각형 모양이 되면, 그 안에서 수십 개의 미사일이 상대를 쏘아보듯 번뜩이지.”

그 뒤로도 찬호의 설명이 계속됐지만, 원래 주인공이었던 피콕이 악당의 꾐에 빠져 그들보다 더 나쁜 악당이 됐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지 않았다. 악당으로 변해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계주는 피콕을 꼭 쥔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꼭 누가 뒤에서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최대한 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렸다.

“피콕, 피콕...”

어느덧 그녀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피콕의 뒷이야기가 필요했다. 순식간에 우유 주머니를 지나쳐 다시금 마주한 주황색 가로등 아래 아스팔트 냄새가 계주의 옆구리를 타고 들어왔고, 또다시 냄새를 피해 빠르게 빠르게 걸어갔다. 앞서가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어쩌면 P보다 더 빠르게 그의 집에 도착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면서도 이미 한참 전에 떠난 그를 놓쳐버릴까 두려워서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어느새 허름한 놀이터를 지나면서 P의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그 길 위에서 P를 붙잡을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여전히 계주는 발걸음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


“나 왔어.”

일을 마치고 들어오니 참기름을 듬뿍 머금은 익숙한 나물 냄새가 계주를 반겼다. 마무리 작업으로 집을 비운 이틀 사이 집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 보였고, 물구나무를 하고 선 P는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를 처음 만난 날로부터 3개월 후, P는 아예 계주의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찰리도 함께 따라왔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마한 녀석이었다. 찰리는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가 봐도 미리와 찰리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걸 깨닫기에 계주의 죄책감은 너무나 커다랬다. 미리가 죽던 그날에 머리를 고정한 채 끊임없이 꼬리를 늘여 따라오던 그 괴물은 이제 계주를 훨씬 앞서 저만치 멀리 가버렸다. 앞으로도 난간의 손잡이처럼 항상 옆에 박혀있을 거라고, 굳이 뿌리칠 필요도 없을 거라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반기는 찰리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옆에 있던 P는 찰리의 이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름은 찰리야. 살필 찰, 이치 리.’

거실 한가운데 선 그가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며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처음 이름을 지은 사람이 P였으므로, 곧 새 이름을 주기로 했으므로, 새로 지어줄 이름은 계주가 오롯이 고민할 수 있도록 그가 양보해 주었으므로, 계주는 찰리를 찰리로 부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었으면 좋겠어.’

그의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다.

P는 물구나무를 서서 다리를 한껏 벌려 V를 그리고 있었다. 두 발로 땅을 짚고 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우아해 보이면서도, 발끝에서 시작해 그의 사타구니를 지나 군살 하나 없는 복부와 갈비뼈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전신을 꽉 틀어쥔 근육이 계주를 압도해 왔다.

그는 춤을 추는 사람이었다. 계주의 입을 빌리자면 예술가였고 P의 입을 빌리자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소극장뿐 아니라 꽤 규모 있는 공연장에서도 공연을 많이 했는데, 정해진 순서 없이 흘러나오는 음악에 무작정 몸을 맡기곤 했다. 대부분은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었고 불편한 다리로 뛸 필요도, 상대방을 번쩍 들어 올릴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정해진 순서나 틀 없이 걷고 구르다가 상대를 넘고 맞대어 서거나 음악을 틀어놓은 채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장르가 무어라고 P가 말해주었지만, 애초부터 흥미가 없었던 계주는 귀담아 두지 않았다.

“밥 먹자.”

P가 똑바로 서자 물구나무를 설 때는 보이지 않던 오른쪽 허벅지 바깥쪽이 눈에 들어와 멈칫했다. 칼로 버터 한쪽을 썰어낸 듯한 모양이었다. 근육괴사였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그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분명 알았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물구나무서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언젠가 다리를 멀쩡하게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부엌에서 퍼져온 참기름 냄새가 콧잔등을 감쌌다. 기름을 짜내는 착유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저 착유기는 골동품처럼 생겨서는 아직도 잘 돌아간단 말이야. 굉장하지.”

P가 감탄해 마지않는 착유기는 미리의 목숨값이었다. 미리가 물려 죽은 날 할머니와 엄마는 누렁이의 주인집으로 쳐들어갔다. 두 사람은 누렁이의 집안을 뒤집어 놓았고, 누렁이도 주인이 곤란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서였는지 가랑이 사이로 꼬리를 내린 채 두 사람을 지켜봐야만 했다. 미리가 죽은 것은 누렁이가 아니라 작은 미리를 밖으로 내보낸 한 계주의 탓이 분명했지만, 누렁이보다도 모자라고 겁이 많던 누렁이의 보호자는 금세 죄인이 되어버렸다. 끝내 가족들은 죽은 미리에 대한 보상을 받아냈고 그날 이후 누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누렁이 아빠에게 타낸 돈은 할머니와 엄마가 사랑해 마지않는 착유기로 변해 집안을 온통 기름 냄새로 가득 채웠다.

“그 착유기는 포기해.”

계주는 이제 막 숟가락을 든 P에게 말했다.

“욕심이 난들 가질 수도 없고 가질 생각도 없어.”

P는 표정이 좋지 못한 계주를 노려보면서도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기분이 상한 계주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둘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P는 홀로 밥을 먹기 시작했고 계주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계주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P는 기다렸다는 듯이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지팡이를 짚지 않은 걸로 보아 화가 많이 난 듯했다. P는 화가 나면 아무것도 집으려 하지 않았고 이미 쥐고 있던 것까지 놓아버리고는 했다. 그럴 땐 가만히 있는 것만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가만히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어서 무책임하게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노란빛으로 채워진 방 한구석을 훑어보고 있었다. 바닥의 모서리에 먼지가 쌓여있었고, 그게 언제나 쉼 없이 쓸고 닦던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계주는 자리를 박차듯 일어났다. 그리고 손걸레를 집어 들고 모서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문질렀음에도 손가락이 아픈 줄 몰랐던 건 계주가 떠올린 아빠의 마지막 모습 때문이었다.

‘나가라.’

성인이 되고 1년 뒤, 할아버지에 이어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해에 아빠는 돈 봉투를 던졌다. 계주는 집 밖으로 쫓겨나야만 하는 이유를 듣지 못한 채 곧장 집을 나섰다. 홀로 일하며 가계를 책임지는 엄마조차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기로 했다. 알고 싶지 않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 비참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쉬운 일이기도 했다.

아빠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빴다. 아빠는 해가 졌을 때를 빼고는 밖으로 돌아다니거나, 계주의 언니만 데리고 어디론가 갔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돌아오곤 했기 때문에 그녀가 집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은 기다림이었다. 노을이 들판 위에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배가 고파졌고, 배가 고파지는 시간이 아빠가 언니를 데리고 집에 오는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아래층에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해 네 가족이 눕고도 남을 만큼 큰 방에 누워있노라면, 환기를 시켰음에도 끈질기게 벽에 들러붙은 적막한 담배 냄새 속에서 결벽증에 가까운 엄마의 성향이 만들어 낸 깔끔한 모서리, 반듯하지 못하게 움푹 들어간 모서리와 마주하곤 했다.

“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주를 현실로 데리고 왔다. P가 허리를 굽히고 엎드려 모서리를 문지르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계주에게 사과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스스로 정리해 놓은 자기 잘못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것이다. 계주는 P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음도 자신을 내려놓는 그 모습이 고맙다기보다는 불편했고, 또 그보다는 답답했다.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운 그녀가 손을 뻗어 적당히 마른 그의 머리칼을 쥐고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계주에게 끌려가며 불안해하는 P의 몸뚱이를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고 P는 그녀의 손에 몸을 맡기는 동시에 오롯이 의지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두 사람이 포개지도록 몸을 기울였다. 계주는 천천히, 점점 더 천천히 그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주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그를 탐했고, P는 단 한 번도 계주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육체적인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지만, 그게 불편한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P가 둘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계주는 알 수 없었지만, 계주는 자신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해야만 했으므로 그 문제는 미뤄둔 지 오래였고 앞으로도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계주의 횡포가 끝난 이후 P는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담배를 피우려는 모양이었다. 계주 역시 일어나 뜨겁게 달궈진 방 창문을 열었고 이내 쌀쌀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계주가 이불을 걷어차며 침대에 눕자, 한쪽 구석의 노란 조명이 방 안의 먼지를 비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방안의 먼지가 모두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고 나서야 허리에 뻐근함을 느낀 계주는 벗어 던졌던 옷을 다시 걸쳤고, 그 사이 방으로 들어온 P는 몸을 떨며 이불을 덮고 계주를 등졌다. 그동안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계주는 등을 새우처럼 구부려 P가 덮은 이불에 등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누웠다. 이제 막 눈을 감은 P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당겨 굽어있던 몸을 펴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볼을 받치자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있던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계주는 P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가을의 밤은 두 사람을 타고 겨울의 새벽으로 흘러갔다.


*


결국 계주는 휴직하겠다는 이야기를 삼촌과 찬호에게 통보하듯 던져 버렸다. 거창하게 무기한 휴직이라도 했으면 좋았겠지만, 모아놓은 돈과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을 따져보니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일 년이었다. 매서운 찬바람이 다 지나가서 선선하고 따스한 바람이 두 사람을 찾아오는 계절이 되면 여행을 가겠노라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 봄날을 꾸역꾸역 가슴에 욱여넣어 놓겠노라고 다짐했다. 가야 할 곳과 머물 기간과 예산이 순식간에 정해졌고, 그 아름다운 계획을 계주가 짜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완벽히 갖추어진 상태로 우연히 계주와 마주쳤다고 생각될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다.

“좀 쉬려고 해.”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날 P가 먼저 휴직을 선언했다. 계주와 다르게 그의 휴직은 무기한이었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집으로 가고 싶어.”

P는 종종 그녀와 처음 만났던 곳으로 몸을 옮겼다. 잘 기름칠 된 계주의 집 현관문이 찰칵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잠기면 그는 곧장 다세대 주택이 잔뜩 늘어선 지름길을 가로질렀다. 계주는 그를 몰래 따라가곤 했다. 눈이 오던 어느 겨울밤, 마을을 둘러싼 산이 모두 설산으로 변해버린 날도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다급하게 따라나서는 바람에 겉옷을 챙기지 못해 온몸에 경련이 이는 듯 떨렸지만, 그 떨림의 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그녀는 한껏 몸을 움츠렸다. 칼바람이 거세게 불어왔고 싸라기눈이 휘몰아쳐 피부에 박혀버릴 만큼 매섭게 몰아쳤지만, 그 덕분에 누군가가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모든 소리가 묻혀버렸다. 눈보라가 멀리 앞서가는 그의 모습은 흐릿했하게 만들었지만 눈 위로 남은 그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새벽의 눈 쌓인 길 위로 찍힌 그의 삐딱한 발자국을 꼭 한 번씩 밟아보았던 일을 계주는 오랫동안 기억했다. 그 발자국의 끝이 다른 곳에 다다르기를 바란 적도 있었으나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뒤따라오는 누군가가 자기를 따라잡도록 기다려 주는 것처럼, P는 그의 집 1층에 도착해서 꼭대기에 있는 자기 집을 흔들림 없이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계주에게는 그때가 가장 힘든 날이었다. 차가운 슬러시를 입안 가득 머금고 깨물 때 어금니 위에 얼음이 뭉쳐지는 것처럼 극한의 바람이 극한의 추위를 한껏 씹어 계주에게 응축시키는 듯 아팠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도저히 발길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가 설령 발길을 돌린다고 해도 곧장 계주의 집으로 향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지만, 이 역시도 계주를 힘들게 만드는 이유는 아니었다.

계주는 그가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사실 거기에는 켜켜이 쌓여 굳어진 믿음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건 아직도 P가 두 발로 걷게 되리라는, P 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관심 없던 계주만의 바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유독 오랫동안 서 있던 그가 고민 끝에 결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걸음을 뗐을 때, 텅 빈 손아귀는 휘청이는 중심을 잡으려 순식간에 양쪽으로 멀어졌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윽고 P의 몸은 천천히, 그러나 몸을 앞으로 또 앞으로 밀어낼 충분한 힘을 가진 채 양쪽으로 닫힌 문을 열어젖힌 후 곧장 위로 향했다. 층층이 위치한 복도의 불빛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반짝이며 작게 빛났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계주는 P가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에 홀로 힘들어했다. 추운 공기가 가득하다 못해 넘실거리는 적막한 세상 안에서 계주는 누군가가 강제로 밀어 넣은 추위 속에 버려진 사람처럼 비참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P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어렴풋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1층 안에 있는 우편함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추위를 게걸스럽게 질겅거리는 새벽이 쉽게 물러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러가지 않는 새벽은 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새벽의 끝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매번 그랬다. 그의 외출은 주로 한밤중이었고 귀가는 대개 동이 트기 전 새벽이었으므로.

더러는 먼저 나간 그가 계주보다도 빨리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홀로 밖을 나서던 P를 계주는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녀가 새벽에 홀로 돌아오는 것을 P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휴직 선언이 있던 날부터는 계주 역시 돌아오지 않는 P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


P가 집으로 떠나기로, 계주는 그를 따라가지 않기로 의견이 나뉜 후에 두 사람은 나눌 수 없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야만 했다.

“찰리 이름은 정했어?”

P는 물었다.

“아직.”

“그러면...”

“내가 새 이름을 줄 거야. 그리고 내가 찰리를 도맡아 키울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래. 그게 맞는 거겠지.”

“발랄한 이름을 줄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결국 P는 계주가 찰리를 보살피는 데 동의했다. 동의하지 않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또 계주가 비행기에 오르는 것과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P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피곤한 몸을 이끌며 부랴부랴 움직여서인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관자놀이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아래쪽으로 점점 더 번져오기 시작하더니 허리에 멈추어 서서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그녀의 등과 아랫배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창문 밖으로 보이는 권적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아름다웠다기보다는 답답해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바랐다.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이불처럼 펼쳐진 구름 위로 쏟아지는 햇살의 전모를 곱씹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몰려오는 피로를 이겨내지 못해 잠에 들었기 때문에 그걸 볼 기회는 없었다.

오랜만에 꾼 꿈이었다. 어딘지 모를 공간 안에는 온 가족이 모여있었다. 계주와 P의 가족들이었는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P의 가족들은 흐릿한 얼굴로만 등장해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넓은 집에서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노는 사람들 사이, 마치 미국 영화 속에 나올 법한 핼러윈의 아이보다도 더 조악하게 꾸며놓은 바람에 그 누구도 다가서고 싶지 않을 만큼 망가져 버린 P가 뒤돌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많은, 어쩌면 모두였을지 모를 사람들이 계주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지만 그대로 지나쳐 P의 앞으로 걸어갔다.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점점 작아지던 P가 계주의 코앞에서는 정수리가 턱에 겨우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그의 머리는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푸른색이었는데, 과하게 물들여 말라비틀어지고 성근 머리칼의 중간중간 노란빛의 둥그스름한 얼룩이 서너 군데 나돌았다. 그는 짙은 황토색 얼굴로 쭈뼛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P를 계주는 힘차게 끌어당겼고 P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녀의 품으로 들어와 흐느끼기 시작했다. 찰나의 흐느낌이 절규로, 마치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의 절규처럼 변했고 P를 품에 끌어안은 계주는 아이처럼 흐느꼈다.

실제로 눈물이 흘러나오기 직전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잠에 빠지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노인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어떻게 자신과 찰리를 깨우지 않고 그 좁은 틈을 지나 창가에 앉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노인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리며 원을 그려갔다. 원이 점점 더 일그러져 가는 것을 계주는 분명 알고 있었지만 그걸 증명할 길은 없었다. 잠시 후 가늘게 눈을 뜨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잠을 쫓아 보내던 노인은 옆자리에 앉은 계주가 자신을 곁눈질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고, 의자에 머리를 바짝 기대어 계주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잔뜩 찡그린 채 악몽으로 얼룩진 꿈을 꾸는 듯 입꼬리와 눈꼬리를 한껏 내려 얼굴이 심하게 주름졌다. 동시에 창으로 들어온 햇빛은 유독 잎이 넓고 긴 분홍색 작약꽃이 그려진 노인의 검은 치마 위를 지나쳐 계주의 뺨을 한참이나 어루만졌다. 여전히 노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있었다. 잠에 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걸 증명할 길은 없었다.

잠시 후 등허리 통증이 꿈과 함께 날아가 버렸고 대신 아랫배가 쑤셔왔다. 통증을 잊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마침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승무원을 발견했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버티고 있는 목에는 타이슬링이 매여있었고, 아래서부터 시작해 꽈배기처럼 도톰하고도 정갈하게 얽혀 올라간 줄의 끝에는 짙은 회색의 하회탈이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때 승무원이 계주보다 세 칸 앞에 앉은 승객과 대화하기 위해 상체를 숙였기 때문에 그 하회탈을 계속 바라볼 수는 없었다. 잠깐의 집중에서 벗어나면서 갈증이 목을 조여왔다. 아무래도 승무원에게 물을 달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승무원이 봐주기를 기다리면서 한 손은 찰리를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은 반쯤 들면서 복도 쪽으로 몸을 기울여 앉았다.

그러나 승무원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그녀의 손은 다시 찰리에게로 돌아왔다. 비행기 좌석과 계주의 허벅지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여쁜 찰리가 엄마의 자궁을 허물어 버린 모양이었다. 계주는 무심코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지만,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굳게 눈을 감고 있었던 터라, 계주가 마주한 것은 저물어 가는 창밖의 노을뿐이었다. 그리고 노을은 그녀의 좌석을 온통 붉게 만들어 버렸다. 계주가 허벅지에 온 힘을 쏟아부어 아무것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막으려 애썼음에도 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하회탈을 부르기 위해 왼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앞의 승객과 이야기를 마친 승무원은 계주를 미처 보지 못하고 뒤돌아 걸어갔다. 아랫니가 위협적으로 딱딱거리며 그녀의 목소리를 막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전부 들어 보였다. P를 쫓던 밤처럼 떨리던 그녀의 손이 붉게 변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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