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07.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

by 박태근

1. 박물관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도시를 방문할 때 가능하면 그곳에 있는 박물관을 구경하려고 한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마찬가지로 그 나라 혹은 도시의 중요한 문화재와 유물들은 주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의 박물관 입장료는 무척 비싸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돈의 가치로 계산하는 마음이 소인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두 개도 아닌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는데 주어야 하는 입장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보려고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서 코레르 박물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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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르 박물관이 있는 위치는 원래 산 제미니아노 교회(Chiesa di San Geminiano)가 있던 곳이다. 교회는 6세기경 산마르코 광장 중앙에 처음 세워졌으나 광장을 넓히고 정비하기 위해 12세기에 광장의 서쪽 끝으로 옮겨졌다.

18세기 베네치아 출신 화가로 베네치아의 풍경화를 그렸던 지오반니 카날(Giovanni Antonio Canal, 1697~1768)과 프란체스코 과르디(Francesco Lazzaro Guardi, 1712~1793)가 산 제미니아노 교회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두 그림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다르지만 프로쿠라티 누오베와 베키에의 끝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풍경은 교회는 물론이고 양쪽의 프로쿠라티 모습도 현재와는 영 딴판으로 다르다. 바로 시간의 역사를 현재의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록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 아닐까?


카날레토(Canaletto)로 더 잘 알려진 베네치아 화가 카날이 그린 그림(왼쪽)은 현재 산마르코 광장을 감싸고 있는 획일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이 아니라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지금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우아하다. 하지만 산 제미니아노 교회는 베네치아의 운명처럼 공화국이 몰락하는 그 순간에 교회의 존재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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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 Guardi, Piazza San Marco verso la chiesa di San Geminiano,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jpg
왼쪽은 카날레토가 그린 교회 모습이고, 오른쪽은 프란체스코 과르디가 그린 교회 모습 - 출처 : Wikipedia



산마르코 광장 서쪽에 있었던 산 제미니아노 교회는 왜 철거되었을까?

교회 건물이 오래되어 보기 싫을 정도로 노후화된 것도 아니었고 새로 지은 건물이 예전에 비해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새로운 건물을 건축했던 것은 건물 이름에 그 답이 있다. 현재 건물의 이름은 '나폴레옹 윙(Ala Napoleonica)'이다. 즉, 나폴레옹 동은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함락하고 필요에 의해 산 제미니아노 교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건물로, 그 필요함은 바로 자신과 귀족들이 어울려 놀 수 있는 무도회장이 필요해서였다.

이런 것을 보면 역사란 언제나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강력한 힘을 가진 강자의 의지와 말 한 마디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즉흥적인 개연성만 존재하는 것 같다.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함락시킨 것도 그런 맥락이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시작으로 1792년 9월 21일 국민 공회(National Convention)에서 군주제를 폐지함으로써 절대왕정의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혁명 기간 동안에 국내외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국내적으로는 높은 물가고에 시달렸다. 특히 빵 가격의 폭등으로 시민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종교적으로 성직자의 권리와 재산이 박탈되어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었다. 국외적으로는 주변국과 전쟁이다. 대외 전쟁은 혁명 세력의 내부적인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으나 입법부에서 투표를 거쳐 전쟁이 시작되었다.


1792년 군주제 폐지로 프랑스 절대 왕정의 구체제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 무너졌다.

이듬해 초인 1793년 1월 17일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의 처벌의 투표한 결과 과반수를 넘는 찬성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판결에 이어 1월 21일 곧바로 형이 집행되었으며 당시 혁명 광장으로 불리던 콩고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엄청난 상황이었다. 유럽의 주변국들은 경악했다. 당시 유럽 대부분 나라들은 절대 왕정의 전제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절대 왕정의 상징인 왕이 시민들에 의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것을 본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국왕이 처형되는 상황을 지켜본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사르데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위기감은 주변국들이 서로 연합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으로 이어졌으며, 프랑스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국과 1797년까지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주변국과의 전쟁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지만 이 전쟁의 승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시민도 아니고 프랑스 혁명 정부도 아닌 젊은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개인이었다. 그는 프랑스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졸지에 프랑스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급기야 1804년 프랑스 왕당파와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황제로 임명되었다.


프랑스와 베네치아는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었다.

당시 이탈리아 모습은 사르데냐 왕국,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로마 교황령, 시칠리아 왕국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통일된 하나의 국가 체제가 아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리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국의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마주했으나 프랑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베네치아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험한 꼴을 당한 이유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에서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 방면군을 이끌던 셰러(Barthélemy Louis Joseph Schérer) 장군의 뒤를 이어 1796년 3월에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전투에 참전했는데 27살의 젊은 나이였다.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베네치아는 15세기까지만 해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쇠퇴한다.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항복받은 18세기말의 베네치아는 강력한 해군 함대가 쇠퇴하고 국력이 거의 상실된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공화국의 정세를 잘 알고 있던 베네치아 총독은 비무장 영세 중립국을 선언했다. 하지만 영세 중립국은 주변국과의 국제적인 조약을 통해 법적 지위를 획득해야 가능하다. 스스로 선언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의미한 자해 행위에 불과하지 않을까?


사르데냐와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와 전투 한 번 하지 않은 채 항복 선언을 받았다. 베네치아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힘없이 몰락하고 만 것이다. 1797년 5월 12일이었다.

아드리아 해의 석호에 베네치아를 세운지 1,100년 만에 프랑스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역사에 영원한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나라의 국력이 쇠약한 약소국의 상황과 형편은 자국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강대국의 먹이가 되었다. 세상 만사의 이치가 이런 것이다.


역사의 시계추를 조금 더 앞으로 돌려 보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1797년 4월 18일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령관과 오스트리아 마르지오 마스트릴리 후작, 막시밀리안 메르벨트 백작이 서명한 레오벤 조약(Traité de Leoben)으로 이미 영토가 두 동강 나고 말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당사국이 배제된 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임의적으로 베네치아를 양분하여 각각 자신의 땅으로 귀속시켰던 것이다. 그 사실을 공식화한 것은 동년 10월 17일에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 조약(Traité de Campo Formio)이다. 레오벤 조약이 베네치아를 분할하는 비밀조항을 담았다면 캄포 포르미오 조약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비극을 선언하는 문서였다. 즉, 베네치아의 몰락은 5월 12일 나폴레옹에게 항복함으로서 형식화되었지만 국제적인 종말은 그 이전에 체결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레오벤 조약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움켜쥔 일본이 미국과 합의한 가쓰라-태프트 밀약(Katsura-Taft 密約)과 같다. 1905년 7월 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국 대통령 특사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도쿄에서 만나 일본은 대한제국을 지배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한다는 내용을 상호간에 승인했다. 그리고 이 밀약은 같은 해 9월 미국 메인주 포츠머스 해군 조선소에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더 이상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다. 외교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인정해 주는 강대국의 함의를 담은 것이었다.


세계사는 이처럼 냉혹하다.

강대국이 아닌 약소국은 때때로 자신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다. 결과에 대해 아무리 항변한들 그때는 이미 늦다. 피눈물나는 울부짖음은 허공 속의 메아리로 되돌아 올 뿐이다. 국제 사회에서 외면받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국력이 강해야 한다. 국력은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외국으로 나가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애국자가 되는 것은 내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나라로 우뚝 서 있으면 외국 땅에서 걷는 내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거리를 가다가 외국인이 "where are you from?" 하고 물으면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Korea. I am from Korea." 라고 화답해 준다. 내 대답에 망설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내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코레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1층은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하다. 계단을 올라가서 2층으로 들어서면 입장권 검사를 하고 박물관의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빗장을 지른 철문이 반쯤 열린 틈으로 해서 계단을 올라간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보다도 어떤 금지된 구역을 들어가는 기분으로 긴장감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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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면 천장에 매달린 상들리에가 은은한 불빛을 밝히고 있다.

복도는 큰 창문들로 굳이 상들리에가 없어도 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명은 벽에 걸린 그림들의 고전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 빛은 분위기를 만든다. 밝음은 경쾌함을 안겨주고 어둠은 무거움을 감싼다. 은은한 빛은 나를 조심스럽게 하고 주위의 고요함과 함께 작은 생각들을 피어나게 한다. 비록 내가 그림이 주는 내용을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안내판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갤러리인 나폴레옹 로지아(Napoleonic Loggia)임을 알려준다.

천장과 벽의 장식은 주세페 보르사토(Giuseppe Borsato, 1771~1849)가 주로 작업했다. 그는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로 산마르코 광장과 산마르코 대성당의 천장화 그림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그외 조반니 카를로 베빌라쿠아(Giovanni Carlo Bevilacqua), 피에트로 모로(Pietro Moro),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등이 참여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에 그려진 그림들은 수수하고 평범하다. 여느 궁전의 천장에 그려진 강렬한 원색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복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것 없이 그냥 지나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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