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산 마르코 종탑에 오르다.
산 마르코 광장을 둘러보고 나서 제일 먼저 간 곳은 산 마르코 종탑(Campanile di San Marco)이었다.
입장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입장권은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미리 예매를 했으며 예매를 할 때 시간도 지정했었다.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대기줄이 길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바로 입장할 수 있도록 예매를 하고 갔으나 막상 와 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잘된 일인지 아니면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사 불여튼튼이 아니던가? 아무튼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하면 사람들이 많더라도 입구에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관광지에서 하는 일 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지 않은가?
광장에서 보는 종탑은 상당히 높다.
대성당 앞이기는 하지만 광장 한 켠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무척 기형적으로 보인다. 기하학으로 보아도 매우 불균형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인들은 이 종탑을 '그 집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엘 파론 데 카사(El Paron de Casa)라 불렀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종탑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입구로 갔다. 산 마르코 광장의 종탑 높이는 98.6m이다. 100m에 조금 못 미친다.
이 높은 종탑을 오르기 위해 계단으로 걸어서 간다고 생객해 보자. 생각만 해도 까무러칠 일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곳은 몰라도 산 마르코 종탑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는 종탑이 재건된 1912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종루까지 올라가는 영구적인 엘리베이터가 추가된 것은 1962년이다. 엘리베이터로 인해 종탑의 정상인 종루까지 올라가는데는 불과 30초밖에 안 걸린다. 걸어서 올라간다면 얼마나 걸릴까 생각해 보지만 현재 종탑은 걸어서 갈 수 없으며 오직 엘레베이터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으니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 종루에 올라
문명의 이기는 이렇듯 좋다. 눈 깜짝할 새에 종탑의 종루에 올랐다.
공간이 좁은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참 많다. 종루에는 360도로 돌아가면서 베네치아의 전망을 구경할 수 있지만 정해진 관람로가 없어 사람들은 서로 뒤엉킨다. 바깥 기둥 사이의 외벽은 허리 아래로 낮지만 기둥 사이에 듬성한 철망이 쳐져 있어서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
인간의 본능은 원초적으로 행동과 연결된다. 위험하다는 생각이나 판단이 들면 스스로 조심하고 때로는 거부한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상하지만 인간은 그런 본능을 거부할 때도 있다.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고 자초하는 경우다. 그럴 때는 반드시 사고가 일어난다. 그래서 위험의 요소를 사전에 인지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고는 언제나 무지와 무관심의 결과로 발생한다.
# 베네치아 시가지 모습
종루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의 모습은 온통 붉은색이다. 아니 주황색 지붕의 기와들이다. 그 색이 오래된 역사를 반영하듯 고풍스럽고 무겁다. 크지도 않은 작은 섬의 눈에 잡힐 듯이 보이는 황색 기와 건물들은 그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조그마한 석호의 황무지에서 시작해서 주변 지역과 지중해를 호령했던 베네치아는 팔라티노 언덕의 작은 도시 국가에서 대제국을 일궜던 로마인의 정신을 닮은 것일까? 인간의 위대함은 극한적인 환경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환경에 순응한다면 변화는 어렵고 환경 탓만 한다면 발전은 없다. 베네치아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 아래로 보이는 베네치아의 건물들은 높은 것이 없다. 기껏해야 3~4층 정도이다. 다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건물 사이로 도로라 할 수 있는 소운하는 아예 보이지 않고 대운하의 모습도 찾기 힘들다. 이 정도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밀도 주택 단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이따금씩 삐죽삐죽 솟은 성당의 돔이나 첨탐이 보인다. 베네치아는 석호에 말뚝을 박고 판을 깐 후에 건물을 지었으니 건물을 높이 올릴 수 없었다. 이 공법의 가장 큰 약점은 지반의 취약성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유럽의 구시가지들도 대부분 낮은 건물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넓은 평지를 가진 축복 받은 땅에서 구태여 높은 건물을 세울 이유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이었을까? 아니었다. 중세의 봉건제도라는 시대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국가의 왕은 자식과 가신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스리게 했다. 특히 이 제도의 핵심은 주군과 봉신의 주종관계여서 주군의 국가적인 전쟁에 영주도 함께 참여하여 전쟁을 치뤘다. 당시의 전쟁은 평지에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공성전으로 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곧 성을 빼앗기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구시가지는 이런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요 도시였다. 성벽으로 둘러쌓인 성은 너른 평지가 아니다. 한정된 땅에 지어지는 건축물들은 다분히 밀집된 형태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베네치아를 중세 유럽의 다른 영주국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궁금한 것은 베네치아는 왜 석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수호했던 것일까 하는 점이다. 그들의 뿌리요, 정신이었기 때문일까?
종루의 한쪽에 서면 산 마르코 광장이 한눈에 펼쳐진다.
도시의 심장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광장에 천막이 보이는 곳은 오래된 카페가 있는 장소로 왼쪽은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이고 오른쪽은 카페 콰드리(Caffè Quadri)다. 둘 다 가보지 못해서 그 미련이 오래도록 남았다. 미련은 단순한 추억에 머물지 않고 그리움으로 남아 내 마음을 후벼파고 있다.
미련은 과거의 집착이요, 그리움은 현재의 기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미래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인정과 체념이 필요할 것 같다. 주황색 건물 지붕으로 둘러싸인 산마르코 광장의 잿빛 바닥이 무척 공허해 보인다.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허전한 마음이 이런 것일까?
# 베네치아 석호(Venetian Lagoon)
대운하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베네치아 석호가 보인다. 석호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아련하게 보이는 바다는 아드리아해다.
석호 위로 수상 버스들이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고 있다. 이곳이 석호라는 사실은 바다에 꽂혀 있는 말뚝들이 증거일 뿐 그 이외에는 여느 바다의 해변과 다를 바 없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저 바다 위에 자신들이 살아갈 집을 지었다. 석호에 꽂혀 있는 저런 말뚝들을 보다 더 촘촘히 박아 넣고 그 위에 판석을 깔아 건축물을 올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종루에서 본 모든 건물들이 그런 형식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그래서 인간의 한계란 끝이 없는지도 모른다.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이 자연의 기본 원리라면 불가능함의 본질도 여전히 인간 앞에 놓여져 있는 한계일지 모른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그런 자연적 조건의 어려움에 맞닿아서 절망하기 보다 오히려 딛고 일어서는 도전적인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위대성을 달성했다. 애초부터 바다로 나아가려고 했고 제해권을 장악하여 다른 나와와 교역하려고 했다. 어쩌면 '물의 도시'를 넘어 '바다를 지배한 도시'로서 베네치아는 바다의 왕자로 우뚝 섰던 것은 아닐까?
ㅣ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Basilica di San Giorgio Maggiore)ㅣ
석호 저멀리 가느다랗고 길게 늘어선 것은 리도(Lido) 섬이다.
아드리아해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자연이 준 천연 방파제다. 신의 배려란 이런 것일까?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베네치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려 11km에 달하는 가늘고 긴 섬이 베네치아를 지켜주는 천혜의 방어막인 셈이다.
석호 중간에 있는 또 하나의 긴 섬은 주데카(Giudecca) 섬이다.
주데카 섬 옆에 운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은 산 조르지오 마조레(San Giorgio Maggiore) 섬으로 면적이 대략 3만 평 정도 되는 작은 섬이다.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이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과 수도원이다. 종탑이 흡사 산 마르코 종탑 같다. 너무나 닮았다.
섬이라 하지만 섬이 아닌 듯이 보이는 손바닥만한 면적에 나무를 심고 성당 건물을 지었다. 땅바닥은 또 어떤가? 금방이라도 물이 차올라 넘칠까 걱정된다. 상식적이고 평범하게 사고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모습이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부질없는 질문을 던져 보아도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 나를 조롱하는 것일까?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섬 주위를 들락거리는 배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다. 순간 한가하고 여유로웠던 마음이 허허롭기만 하다.
ㅣ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ㅣ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삼각형 예각 모서리처럼 생긴 지면에 건설한 멋진 성당이 보인다. 석호로 날카롭게 뻗은 모서리가 마치 배의 선미처럼 보인다. 배를 올라탄 성당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베네치아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섬이 아니라 석호의 판석 위에 세운 교회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다. 1631년에 처음 짓기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1687년에 완공하였다. 대표적인 바로크 건축 양식이다.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과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은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바로 지척의 거리에 있다. 그렇다고 바로 갈 수는 없다. 광장에서 가려면 둘 다 수상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종탑에 오르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모른 채 그냥 지나쳤을 성당이다. 비록 여행 계획에는 없었지만 눈으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것은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면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은 멋으로 빗은 예술과 같았기 때문이다.
# 종탑의 역사
엘리베이터는 또 한 무리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
구경을 마친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구경을 하려는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다. 적정 규모의 인원은 아래에서 통제를 하고 있어서 더 이상의 포화상태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산 마르코 광장 종탑을 구경하려고 올라가는 관광객이 많을 때는 종탑 입구에서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야 한다.
베네치아는 석호 위에 건설한 도시였지만 역설적으로 초기에는 해상 방어가 매우 취약했다.
10세기 초에 아드리아 해로부터 침략하는 해적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해안 요새를 만들면서 망루를 세웠다. 망루는 적을 감시하면서 동시에 베네치아의 선박을 항구로 인도하는 등대 역할도 하였다. 점차 베네치아의 해상권이 강화되면서 12세기경에는 망루에 목재로 만든 종탑이 만들어졌고, 그후 종탑은 지속적으로 복원되고 재건되어서 16세기에는 석재로 만든 종탑이 건설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광장을 지켜오던 산 마르코 종탑은 1902년 봄 균열로 인한 붕괴의 조짐을 보였다.
붕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중요한 것은 탑의 오래된 구조적인 노후화였다. 종탑은 여러 번의 낙뢰와 크고 작은 지진으로 기본 골조에 균열이 발생하는 구조적인 손상을 입었다. 특히 1489년의 낙뢰로 첨탑이 파괴되어 쓰러졌으며 1511년의 대지진은 탑의 심한 균열로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피해가 발생한 이후에 대대적인 개축과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외형의 보수에만 치우쳤을 뿐 골조를 보강하는 근본적인 공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탑의 붕괴 조짐을 확인한 베네치아 시에서는 보수를 위한 숱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그해 7월 12일 오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진 종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고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다행히 사전에 붕괴 위험을 감지한 시에서 시민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미리 대피시켰기 때문에 희생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높이 솟아 위용을 자랑하던 산 마르코 종탑은 붕괴되면서 한 줌의 재처럼 처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아래의 왼쪽 사진은 1902년 종탑 붕괴 후에 찍은 잔해만 남은 모습이고, 오른쪽 그림은 종탑 붕괴를 그린 핀크니 마르키우스-시몬스(Pinckney Marcius-Simons)의 『베네치아의 돌들』이다. 출처는 위키피디아에서 인용했다.
현재의 종탑은 1902년에 붕괴된 종탑을 재건축한 것이다.
산 마르코 종탑의 붕괴는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심장이 터지는 아픔이었으며 자존심이 무너지는 허탈함이 아니었을까? 베네치아 공화국은 1797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몰락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조금 지나 산 마르코 종탑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베네치아 시장이었던 필리포 그리마니(Filippo Grimani)는 종탑의 복원 의지를 밝히면서 "Com'era, dov'era"라고 했다. 그 의미는 '있던 자리에, 원래 모습으로' 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이것은 베네치아의 역사적 자부심과 베네치아인의 정체성을 갖는 상징성을 다시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베네치아는 1903년 봄까지 종탑의 무너진 잔해를 모두 치웠다. 그해 4월부터 종탑의 복원을 위한 주춧돌을 놓기 시작했으며 복원 공사는 더디지만 지속되었다. 1908년 가을에 겨우 탑의 골조가 완성되었다. 종탑을 완전히 복원한 것은 4년이 더 지난 1912년 3월이었다. 종탑 복원 공사를 마치고 준공식이 치뤄진 날은 1912년 4월 25일 베네치아 수호성인 산 마르코의 축일이었다. 그날 베네치아 시민들은 모두 광장으로 모여 한마음으로 종탑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문화재의 복원은 항상 이중성을 가진다.
똑 같이 복원하려고 하지만 원래의 것이 아니며 원래의 모습을 갖췄지만 본래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그 시대의 산물로 탄생하는 새로운 것이다. 다만 원형에 충실하게 재창조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종루의 5개 종
종탑의 종루에는 5개의 종이 있다. 종의 수는 시대에 따라 4개에서 7개까지 다양했지만 현재처럼 종루의 종이 5개로 된 것은 1722년 이후부터다. 종루의 종들은 각각 크기가 다르며 크기에 따라 종소리의 음폭도 달라진다. 와인잔 연주자가 여러 개의 와인잔에 서로 다른 양의 물을 붓고 음악을 연주할 때 나는 소리와 같은 현상이다. 그러다 보니 종을 만드는 것도 아무 곳에나 맡겨서 제작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 시는 1902년 종탑이 붕괴될 때 파손되지 않았던 마랑고나(Marangona)를 제외한 4개를 다시 제작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꾸렸다.
특별위원회에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의 합창단 지휘자와 밀라노의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 원장 및 밀라노의 유명한 청동주조소인 바리고치 주조 공장(Fonderia Barigozzi) 소유주가 참여하였다. 종을 제작할 주조소는 베네치아 카스텔로 지구에 위치한 산텔레나 교회 근처에 설치되었다. 주물 공장의 소유주를 제외한다면 위원들의 면면은 모두 음악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유는 종소리가 내는 독특한 소리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종루의 5개 종은 크기에 따라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종은 마랑고나(Marangona)라 했고 작아질수록 노나(Nona), 메자 테르자(Meza-terza), 트로티에라(Trottiera)이며 가장 작은 종은 말레피시오(Maleficio)라고 불렀다. 종은 종소리가 가지는 의미에 따라 마랑고나는 카펜테라(Carpentera)로, 메자 테르자는 프레가디(Pregadi)로, 말레피시오는 렝기에라(Renghiera)라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산마르코 종탑의 서로 다른 종들이 내는 종소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랑고나는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종 이름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무기고였던 아스날레(L'Arsenale)에서 일했던 마랑고니에서 따온 것이다. 마랑고니(marangoni)는 목수 길드조직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산마르코 종탑을 건설할 때 그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마랑고나가 울리면 산마르코 대성당의 문이 열리고 노동자들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메자 테르자는 전통적인 오전 기도의 세 번째 시간에 울렸다. 따라서 하루 중 1/3에 해당하는 시간이라는 의미에 유래되었으며 종소리가 울리면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엄숙한 미사가 거행되었다. 또한 프레가디라고 불러 원로원의 회의를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노나는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로 노나가 울리면 베네치아 시민들은 점심 시간이 되었음을 안다.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일을 하다가 휴식을 취한다. 점심과 휴식 시간을 알려주는 노나의 종소리는 시민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알림이었다.
트로티에라는 노나의 종소리가 멈추고 30분 후에 울린다고 해서 디트로 노나(Dietro Nona))라고 했다. 즉, '노나 이후'라는 뜻이다. 이 말인즉슨 트로티에라가 울리면 노동자는 휴식 시간을 끝내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트로티에라는 대평의회 의원들을 소집하는 종소리이기도 했다. 종이 울리면 귀족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Trotto)' 총독의 궁전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트로티에라 종소리가 멈추면 궁전의 문이 닫혀서 그 이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말레피시오 혹은 렝기에라로 불리는가장 작은 종의 소리는 범죄자를 처형할 때 울린다. 10인 평의회의 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이 판결되면 렝기에라(Renghiera) 종을 치고 처형은 다음날 아침에 집행하였다.
지금도 종탑의 종소리가 울린다고 한다.
매시 정각에 울린다고 했지만 나는 그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 매시 정각이 아니라 달리 정해진 시간이 있었던 것일까?
# 갈릴레이 기념판
종루의 벽 한 쪽에는 갈릴레오(Galileo Galilei) 기념판이 걸려 있다.
GALILEO GALILEI
CON IL SUO CANNOCCHIALE DA OUI 21 AGOSTO 1609 ALLARGAVA GLI ORIZZONTI DELL'UOMO
NEL OUARTO CENTENNARIO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의 망원경으로 1609년 8월 21일 인류의 지평을 넓히다.
400주년을 기념하며
기념판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곳 종탑에 올라 망원경의 성능을 시연했다는 내용이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 올라 낙하실험을 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산 마르코 종탑에서 망원경 시연을 했다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내가 산 마르코 종탑에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몰랐을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망원경은 1608년 네덜란드의 안경 직공인 한스 리퍼세이 (Hans Lipperhey)가 최초로 발명했다. 리퍼세이는 망원경의 특허 출원을 신청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반려되었다. 네덜란드 정부가 리퍼세이의 망원경 특허 출원을 반려한 이유는 발명 원리가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망원경 구조가 관 안에 렌즈 두 개를 배치하는 것으로 이런 장치는 쉽게 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술의 독점성을 가지기 어렵다고 보아서 반려했다.
하지만 이 소식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이듬해인 1609년에 갈릴레오는 리퍼세이 망원경을 개선한 후에 자신의 천문학 관측에 적용하였다. 바로 그해 여름에 갈릴레오는 산 마르코 종탑에 올라 당시 베네치아 검찰관이었던 안토니오 프리울리(Antonio Priuli, 1548~1623)를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모시고 망원경 시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망원경을 통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먼 바다의 배들을 보았고, 인근의 파도바 성당 종탑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후원을 얻기 위해 망원경이 국방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망원경을 종탑에서 시연한 3일 후인 1609년 8월 24일에 갈릴레오는 총독 궁전의 로지아에서 베네치아 제90대 총독인 레오나르도 도나토(Leonardo Donato, 1536~1612)에게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을 선물로 바쳤다. 한편 갈릴레오의 망원경 시연에 참여했던 검찰관 안토니오 프리울리는 나중에 베네치아 제94대 총독이 되어 갈릴레오를 후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