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
ㅣ세바스티아노 주카토(Sebastiano Zuccato)의 '성 세바스티아노와 봉헌자(화가 자신)'(San Sebastiano e un devote (il pittore stesso))ㅣ
세바스티아노 주카토는 15세기와 16세기에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화가지만 미술사적으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정된 공방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두 아들 프란체스코와 발레리오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모자이크 인물 작업에 참여할 정도로 실력 있는 예술가 집안이었다. 베네치아에서 작가이자 비평가로 활동했던 로도비코 돌체(Lodovico Dolce, 1508-1568)는 세바스티아노 주카토가 베네치아 회화의 거장 티치아노의 스승이었다고 했다. 로도비코 돌체는 티치아노가 '아홉 살 때 고향인 피에베 디 카도레를 떠나 베네치아 석호에 도착하여 트레비소 출신의 예술가 세바스티아노 주카토의 작업장에서 예술의 원리를 배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으며 그후에 티치아노는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으로 옮겨 미술 공부의 수련을 이어갔다.
'성 세바스티아노와 봉헌자'는 그림 속에 주카토의 서명이 있어서 화가가 확인되는 작품으로 가치가 크다. 성인이 묶여 있는 발 뒤의 나무 기둥에 '세바스티아노 주카토가 그렸다'(SEBASTIANVS ZVCATVS PINXIT)는 글이 있다.
그림 속의 화살을 맞고 있는 사람은 성 세바스티아노이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봉헌자가 그림을 그린 화가 세바스티아노 주카토이다. 그림은 1475~1485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주카토는 1478년 베네치아를 휩쓴 흑사병에서 살아남았는데 그 감사의 표현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성 세바스티아노는 전통적으로 역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수호성인이었기 때문이다.
ㅣ피에트로 두이아(Pietro Duia)의 '성모자와 순교자 성 베드로'(Madonna col Bambino e san Pietro Martire)ㅣ
그림의 중앙에 성모자가 있고 성모 마리아의 왼쪽에 순교자 성 베드로가 서 있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피에트로 두이아다. 피에트로 디 니콜로 두이아(Pietro di Niccolò Duia)도 있으나 같은 가문의 후손으로 동명이인이다. 피에트로 두이아는 조반니 벨리니와 비토레 카르파초의 화풍을 충실히 따랐던 화가로 '성모자와 순교자 성 베드로'를 그린 사람으 로 추정한다.
성모의 왼쪽에 있는 사람을 순교자 성 베드로라고 하는 이유는 왼쪽 가슴의 칼과 왼손의 책 그리고 오른손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칼은 암살 당할 때 가슴에 칼이 꽂혔던 순교를 상징하고 책은 도미니코회 수도사라는 쳉체성을 나타내며 종려나무 가지는 고난을 이겨낸 순교자의 승리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그림의 순교자 성 베드로의 모습은 비토레 카르파초가 그린 순교자 성 베드로(San Pietro Martire)의 혼자 서 있는 패널 그림과 너무나 닮았다. 다른 두 사람이 아니라 마치 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 비슷하다. 그래서 헷갈린다.
ㅣ체사레 베첼리오(Cesare Vecellio)의 '17명의 베네치아 귀족 가족 초상'(Ritratto di nobile famiglia veneta di 17 membri)ㅣ
체사레 베첼리오는 베첼리오 가문의 일원으로 베네치아 회화의 거장 티치아노의 먼 친척이며 티치아노의 작업실에서 일하며 미술을 공부한 제자였다.
그림은 베네치아 귀족의 대가족 모습으로 노인에서부터 어린 아이까지 모두 17명을 하나의 화폭에 담았다. 최연장자인 노인을 제외하면 어른 12명은 부부지간으로 연결된다. 그림에서 보이는 연령대를 짐작한 구성원을 보면 3대 혹은 4대를 잇는 대가족이다.
체사레는 그림도 그렸지만 복식사에도 관심을 가져서 전 세계의 복식을 정리한 『고대와 현대의 의상(Degli habiti antichi e moderni)』이라는 책을 출판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책을 저술할 정도로 당대의 의복과 풍습에 정통했던 체사레는 '17명의 베네치아 귀족 가족 초상'에서 각 인물들이 입은 옷과 몸에 착용한 장신구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남성 귀족은 모두 검은색 토가(Toga)와 로브(Robe)를 입고 있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사치법(Sumptuary Laws)을 만들어 귀족들이 공식 석상에서 입는 관복을 규정했다. 그 법은 사회적 위계를 유지하고 사치를 방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은 사회적 계층 간을 구분하는 도덕적 기준의 강제규범이었다. 즉, 상류층의 귀족 계급과 하층민의 평민들이 입는 복식과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규정하여 서로를 구분했던 것이다.
그림 속의 여성들이 입고 있는 최고급 실크, 벨벳, 다마스크 원단을 사용한 옷과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 귀걸이, 머리 장식에는 값비싼 보석과 진주들이다. 사치법이 무색할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하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도 귀족의 부유함이 아니면 불가능한 정장 차림이다.
어느 시대, 어떤 체제를 막론하고 인간의 사회구성체 속에는 계층 간의 차이가 항상 존재해 왔다. 그것은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차이와 차별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는가!'(王侯將相寧有種乎) 라는 말은 사마천의『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전 209년 진(秦)나라 때 진승(陳勝)이 봉기를 일으키며 한 말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왕후장상은 존재해 왔다. 세월이 흐르고 봉기를 일으키는 사람마다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걸었지만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그런 차이와 차별은 언제나 존재했다는 의미다.
5)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 회화(Pittura fiamminga e olandese)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 회화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행했던 북유럽의 미술 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피암밍가(fiamminga)는 플랑드르(Flandre)의 이탈리아어로 당시의 지역 명칭을 말한다. 플랑드르는 현재 벨기에 북부와 프랑스 북부 그리고 네덜란드 남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영어로 플랜더스(Flanders)라 부른다. 올란데제(olandese)는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이탈리아어이며 영어로는 더치(Dutch)라 불렀다. 네덜란드라는 명칭은 16세기 이후에 생겨난 이름으로 그 이전에는 없었다. 올란데제는 홀란트(Holland)에서 어원이 파생되었다. 홀란트는 현대의 네덜란드 서부에 위치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컸던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등의 지역으로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홀란트에 사는 사람들을 올란데제라 불렀다.
따라서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 회화라고 하면 현재의 벨기에 북부와 프랑스 북부 그리고 네덜란드 전체에서 유행했던 미술 형식을 말한다.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 회화는 유채 물감을 사용한 유화 기법이 발달하여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묘사하는 정교함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회화가 성서나 신화와 같은 거대 담론을 다루고 있다면 네덜란드 회화는 일상 생활의 가치에 중점을 두고 그리는 풍속화나 풍경화가 발달했다.
ㅣ피터 브뤼헬 주니어(Pieter Bruegel il giovane)의 '동방박사의 경배'(L'adorazione dei magi)ㅣ
피터 브뤼헬 주니어(Pieter Bruegel il giovane)의 '동방박사의 경배'(L'adorazione dei magi)는 1564년에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17세기 초반에 제작한 목판 유채화다. 피터 브뤼헬 주니어는 피터 브뤼헬 1세의 아들로 피터 브뤼헬 2세다. 두 사람은 프랑드르 회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피터 브뤼헬 2세의 초기 작품은 주로 아버지 피터 브뤼헬 1세의 작품을 대량으로 복제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브뤼헬 1세의 그림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브뤼헬 2세는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며 아버지의 작품을 복제하여 판매을 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했는데 인물의 배치가 자유로워지고 색채는 더 밝아졌다.
브뤼헬 2세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아버지가 그린 '눈 속의 동방박사 경배'를 복제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린 그림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아들의 그림에는 눈이 가득 쌓인 모습만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2절에 나오는 이야기다. 로마 제국 시대에 헤롯 왕이 다스리던 유대 지역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하여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아기 예수가 탄생한 마굿간을 찾아가서 경배를 드리는 것이 그 내용이다.
브뤼헬 부자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중세 화가들이 전통적으로 그린 그림과 큰 차이점을 보인다. 그림의 양식과 도상의 파격적인 변화가 그것인데 전통적인 그림이 성경 속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브뤼헬의 그림은 평범한 일상 생활 속의 한 부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플랑드르 마을의 겨울 풍경을 보여주는 집과 거리는 눈으로 덮여 있고 거리의 커다란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모습은 동방 박사가 온지도 모르는 듯 저마다의 일상적인 일에 바쁘다. 브뤼헬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동방박사의 모습을 그림의 왼쪽 귀퉁이로 몰아넣어 아주 작게 묘사하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동방박사가 들어가는 마굿간의 길 입구에는 붉은 바지를 입고 창을 든 스페인 병사가 서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은 결혼에 의해 영토의 지배권이 다른 왕가나 공국으로 귀속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유럽은 중세 시대의 봉건지배제와 르네상스 시대의 절대 왕정에 의한 전제군주제로 통치했으며 그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결혼을 통해 점진적으로 영토를 넓혀가는 확장 정책을 취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당시 시행된 살리카 법(Salic Law)이다. 이 법전은 500년경에 편찬된 프랑크 민법이지만 그후 여러 시대를 거치며 유럽의 많은 왕국들이 살리카 법을 기본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수정했다. 살리카 법은 왕권의 부계 계승과 토지의 남성 상속이 원칙이었지만 만약에 남성 계통이 단절되면 여성이 상속받도록 했고 그 여성이 죽으면 결혼한 남성이 상속권을 가지도록 했다. 이 때문에 왕족과 가문 그리고 개인 간에는 권력과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고 심지어 전쟁으로 확대되는 경우도 많았다.
브뤼헬 부자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린 시기는 16세기 중반과 17세기 초반이다. 당시의 정치 정세를 보면 플랑드르를 다스리던 부르고뉴 공국의 후계자 마리(Marie de Bourgogne)가 훗날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함으로써 플랑드르 지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은 합스부르크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후 막시밀리안 1세의 장남 필리프가 플랑드르를 섭정하였고 손자인 카를 5세가 상속 받았으며 다시 카를 5세의 아들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이때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자로 플랑드르에 확산되고 있던 개신교(칼뱅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탄압했을 뿐 아니라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업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역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경제적인 수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로 억압을 겪던 플랑드르는 독립을 쟁취하고자 저항했다. 오늘날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불리는 80년 전쟁은 1568년에 시작되어 1648년에 끝났다. 그러나 이 전쟁 과정에서 플랑드르 북부인 네덜란드는 전쟁을 통해 독립을 획득했지만 플랑드르 남부의 벨기에는 종교적(가톨릭 중심) 이유와 귀족들의 이해 관계로 스페인과 타협함으로써 스페인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결국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분리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이런 시기에 그려져서 스페인 병사들이 있으며 그것은 플랑드르의 독립을 향한 투쟁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ㅣ저지대 국가(네덜란드, 벨기에 등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Pittore dei Paesi Bassi) 그림들ㅣ
세점의 그림들은 화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자 미상이다. 그림의 안내표에는 단순히 저지대 국가(네덜란드, 벨기에 등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Pittore dei Paesi Bassi) 그림들이라고만 되어 있다.
하나의 그림은 '림보의 그리스도'(Cristo al Limbo)다.
림보는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에 나오는 지옥의 이름 중 하나로 『신곡』은 단테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 지옥은 깔때기 모양의 9개 동심원으로 구성된 림보(Limbo), 애욕(Lust), 식탐(Gluttony), 탐욕(Greed), 분노(Anger), 이단(Heresy), 폭력(Violence), 기만(Fraud), 배신(Treachery)의 지형도를 가지고 있다.
그림의 제목인 '림보의 그리스도'(Cristo al Limbo)에서 림보는 단테의 『신곡』 지옥도에 나오는 첫 번째 지옥이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지옥은 아니다.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 아이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하느님을 뵙고자 간절히 원하지만 그럴 가망이 없기에 기쁨이 없는 곳이라고 했다. 사실 이곳에는 예수 탄생 이전에 선하게 살았던 고대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와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단테는 고대 최고의 시인 5명도 이곳에 살고 있다며 추가했는데 호메로스(Homeros), 호라티우스(Horatius), 오비디우스(Ovidius), 루카누스 (Lucanus)를 들고 있다. 그러면 빠진 1명은 누구일까? 바로 단테의 스승이자 단테를 지옥으로 안내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Virgilius)다.
그림을 보면 예수는 삼지창을 들고 있다. 삼지창은 지옥의 문을 부수기 위한 무기다. 창의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은 각각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상징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개인적인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으로 지옥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그림은 플랑드르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도상이다.
'림보의 그리스도' 바로 옆에 있는 두 점의 그림은 최후의 심판(Giudizio Universale)과 지옥의 환영(Visione dell'Aldilà)이다.
하지만 프랑드르 회화의 방에 있는 그림들에 붙이는 이름들은 딱히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하다. 특히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화풍을 이은 지옥도의 그림과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기괴한 괴물과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통해 지옥의 비참함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최후의 심판'이나 '림보의 그리스도' 같이 예수가 지옥의 가장자리까지 내려가 사람들을 구해내는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의 희망을 담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양에서 보면 권선징악이지만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신성한 정의(Justitia Divina)일 것이다. '착한 행실을 권장하고 악한 행동을 벌한다'는 개념이나 '하느님의 완전하고 공정하며 의로운 정의를 집행한다'는 신학적 개념은 큰 틀에서 서로 맞닿는지도 모르겠다.
ㅣ'성녀 세실리아와 카타리나 사이의 보좌에 앉은 성모'(Madonna in trono tra le sante Cecilia e Caterina)ㅣ
플랑드르 회화의 성모자상으로 작가는 미상이다. 중앙에 성모자를 두고 오른쪽에는 책을 펼치고 있는 성녀 카타리나(Caterina)와 왼쪽에는 음악의 수호성인인 성녀 세실리아(Cecilia)가 앉아 있다.
이런 그림의 종류는 참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예술가들이 플랑드르 회화에 열광했던 것은 자신들이 미처 가지지 못했던 인물과 사물에 대한 세밀한 질감을 묘사와 화면이 풍기는 신성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베네치아에 플랑드르 회화가 수입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베네치아의 국가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베네치아는 북유럽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ㅣ'세례 요한, 성 카타리나와 봉헌자'(San Giovanni Battista, Santa Caterina e un donatore)ㅣ
얀 프로보스트(Jan Provost, 1465~1529)의 작품이다.
그는 얀 프로부스트(Jan Provoost), 장 프로보스트(Jean Provost)로 불리기도 하며 벨기에 몽스에서 태어난 화가, 지도 제작자, 건축가로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그의 그림은 벨기에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많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코레르 박물관에 있는 이 그림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림의 왼쪽에 세례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고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책을 펼치고 있는 성녀 카타리나가 서 있다. 그리고 중앙 하단에 있는 작게 그려진 사람이 이 그림을 주문한 의뢰인이다.
ㅣ쿠엔틴 메치스(Quentin Metsys, 1466~1530)의 '구세주 그리스도'(Cristo Salvator Mundi)ㅣ
쿠엔틴 메치스가 그린 '구세주 그리스도'는 여러 색감과 다른 모양으로 그린 여러 버전이 전하고 있지만 얼굴 형태는 하나 같이 똑 같은 모습이다. 그림을 보면 한눈에 쿠엔틴 메치스의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알 수가 있을 정도다.
쿠엔틴 메치스는 '플랑드르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린다. 인물의 윤곽선을 부드럽게 번지듯 처리하여 신비롭고 온화한 표정으로 만드는 스푸마토 기법과 그리스도가 입은 옷의 화려한 보석 장식과 머리카락의 세밀한 묘사을 보여주는 정교한 디테일 때문일 것이다.
메치스는 현재의 벨기에 루뱅(Leuven)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대장장이여서 화가가 되기 전에는 대장장이 일도 했었다. 하지만 건강으로 대장장이 일을 그만 두고 판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25살 되던 해인 1491년에 안트베르펜으로 가서 화가 길드 '성 루카 길드'에 마스터로 등록하면서 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메치스는 안트베르펜에 40여년을 거주하면서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였고 안트베르펜 회화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힘썼다.
여담으로 메치스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기괴한 노파'(A Grotesque Old Woman)가 있다.
이 그림은 당시 파제트병(Paget's disease)이라는 희귀한 뼈 질환을 앓았던 실존 인물을 그린 것으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은 매우 사실적이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려고 한 사람이나 둘 다 존경스럽다. 여성은 자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나 기괴하게 생겼지만 어쩌면 그조차 자신의 삶으로 보듬고 싶은 하나의 궤적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삶의 좋고 나쁨이나 추하고 아름다운 것 어느 것 하나라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나라는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한편 삽화가 존 테니얼(John Tenniel)은 1865년에 출간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공작부인을 묘사할 때 메치스의 '기괴한 노파'를 보고 그대로 본떠 삽화를 그렸다. 이 이야기는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가 저술한 『주석이 달린 앨리스』에서 존 테니얼의 삽화 공작부인은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던 메치스의 '기괴한 노파'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ㅣ디에릭 보츠(Dieric Bouts)의 '성모자'(Madonna col Bambino)ㅣ
디에릭 보츠는 루뱅(Leuven)에서 주로 활동한 초기 플랑드르 화가다. 루뱅은 쿠엔틴 메치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디에릭 보츠의 '성모자' 그림은 비슷한 내용으로 그린 것이 여러 종류가 있다. 모네의 수련 연작이나 고흐의 해바라기, 피터 브뤼헬 2세의 '새 덫이 있는 겨울 풍경'(Winter Landscape with a Bird Trap)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디에릭 보츠의 '성모자' 그림도 많았을 것 같다. 작은 신앙 패널화 제작과 '성모자' 주제는 그 시대의 인기 있는 판매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보츠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모유를 먹이고 있는 엄마가 아이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거나 아기 예수와 뺨을 맞대고 있는 성모의 구도를 사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적인 따뜻함과 자애로움을 느끼게 한다.
ㅣ휴고 반 더 구스(Hugo van der Goes)의 '성모와 성 요한 사이의 십자가 처형'(Cristo crocifisso tra la Vergine e san Giovanni)ㅣ
휴고 반 더 구스는 플랑드르 화가로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서 성장 과정을 알기는 어렵다. 1467년에 화가 유스투스 판 헨트(Joost van Wassenhoven)의 보증으로 헨트(Ghent)의 '성 루카 길드'에 마스터로 등록되었다.
휴고 반 더 구스는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1477년경에 브뤼셀 인근의 붉은 수녀원(Rooklooster)에 들어갔다. 표면적인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극심한 우울증과 정신적 불안 증세 때문이었다. 당시 기록에도 그가 멜랑콜리(Melancholy)에 빠졌다고 되어 있다. 멜랑콜리는 '이유 없이 깊은 슬픔에 잠기는 우울한 감정'이다. 당시 수도원 원장은 이런 휴고 반 더 구스에게 음악 치료를 권유했으나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1482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략 42세를 전후한 젊은 나이였다.
'성모와 성 요한 사이의 십자가 처형'은 그림의 중앙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예수의 얼굴을 조명하여 신성한 은총의 의미를 강조한다. 예수의 십자가 좌우에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와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요한이 슬픔에 잠긴 채 서 있다. 그림은 명암 대비가 강렬하고 인물과 옷감의 주름이 세밀하면서도 정교하다. 십자가 처형의 외부적 고통과 그것을 보는 사람의 내면적 고통을 슬픈 감정으로 정화시키고 있다.
ㅣ파스콸리노 베네토(Pasqualino Veneto)의 '성모자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donna col Bambino e santa Maria Maddalena)ㅣ
파스콸리노 베네토는 그가 남긴 그림 작품들은 있으나 그의 행적은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름만 해도 그렇다. 베네토는 파스콸리노 디 니콜로(Pasqualino di Niccolò) 혹은 파스콸리노 다 베네치아(Pasqualino da Venezia)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인 미술사학자 리오넬로 푸피(Lionello Puppi)는 1961년에 파스콸리노 디 니콜로와 파스콸리노 베네토는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푸피는 그 이유로 그림 서명의 차이와 문헌에 기록된 근거 그리고 회화 양식의 불일치를 들어서 동일 인물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림의 중앙에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으며 아기 예수 옆에 성녀 막달레나가 오른손에 그릇을 들고 서 있다. 색상은 화려하면서도 곱다.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서 활동하며 그림을 그린 탓일까? 오래되지 않았지만 파스콸리노 베네토는 베네치아 회화의 문을 연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였기에 베네토의 그림에는 벨리니의 화풍도 약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