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08.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by 박태근

1. 궁전으로 들어가다.


두칼레 궁전은 산 마르코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다. 원래 계획은 산 마르코 대성당을 구경하고 두칼레 궁전을 갈 생각이었으나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궁전으로 먼저 갔다. 선택은 언제나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고 그것은 결국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과 도제의 궁전(Doge's Palace)은 같은 말이다.

같은 말이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두칼레 궁전이라 부르고 영어권에서는 도제의 궁전이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두칼레 궁전과 도제의 궁전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도제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선출된 최고 통치자를 부를 때 사용하던 칭호다. 그런 두칼레와 도제의 차이가 한 가지 의문을 들게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왜 도제가 거주하는 곳을 두칼레 궁전이라 하면서 최고 통치자를 두칼레라 하지 않고 도제라 부르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답을 알고 나면 참 바보 같은 질문인데 처음에는 이것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칼레(Ducale)는 '도제의', '공작의'라는 뜻의 이탈리어 형용사이고, 도제(Doge)는 최고 통치자를 부르는 칭호로 명사다. 도제는 이탈리아어지만 베네치아 사람들이 사용했던 방언으로 라틴어의 '지도자', '군 지휘관'을 뜻하는 둑스(Dux)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둑스가 프랑스어 디크(Duc)로 파생되었고 그것이 중세 영어의 덕(Duk)을 거쳐 현재의 듀크(Duke)가 되었다.

두칼레 궁전의 이탈리아어를 문법적으로 표현할 때 명사(Palazzo)+형용사(Ducale)가 바른 형태이므로 명사(Palazzo)+명사(Doge)는 틀린 것이 된다. 굳이 도제(Doge)를 넣어 표기하려면 명사(Palazzo)+전치사(del)+명사(Doge)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두칼레 궁전이란 말은 베네치아에서 수백 년 동안 사용한 고유 명사로서 이미 굳어졌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두칼레 궁전과 도제의 궁전은 둘 다 맞는 말이고 같은 의미지만 혼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두칼레 궁전으로 통일한다.


두칼레 궁전은 810년 외적을 방어하는 요새로 건설되었다. 리알토 지역에 사각형 모양의 건물을 짓고 각 모서리에는 높은 망루가 있는 형태였다. 당시 리알토 지역은 '높은 둑'이라는 리보알투스(Rivoaltus)로 석호 안쪽의 섬 전체를 의미했다. 그후 도시가 점차 확장하면서 리보알투스는 정치 중심의 산 마르코 지역과 상업 중심의 리알토 지역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1172년경에 도제 세바스티아노 지아니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력이 신장됨에 따라 기존의 요새를 허물고 비잔틴 양식의 화려한 궁전으로 개조를 했다. 현재 궁전의 안뜰을 이루는 기초는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12세기 들어 베네치아 공화국은 대규모 국영 조선소를 건설하고 강력한 군함의 선단을 제조하였으며 해군력을 키워 지중해 제해권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14세기가 되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상 무역을 통한 상업의 발달과 해외 영토의 식민지 확대로 부가 축적되어 국력 성장은 절정기로 치달았다. 당연히 정부의 규모도 커졌다. 1340년에 시작된 궁전의 재건축은 15세기까지 이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처럼 거대한 고딕 양식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1483년과 1577년의 대화재로 궁전의 건물과 많은 미술품들이 소실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때 궁전을 복원하면서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하려 했으나 정부 당국은 기존의 고딕 양식을 유지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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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매년 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지다. 2024년에 약 1,220만 명이 방문했으며 그로 인한 베네치아의 관광 수입은 약 38억 유로(한화 약 5조 7천억 원)로 집계되었다. 이것은 베네치아 시 전체 GDP의 약 13%를 차지하는 수치다. 2024년부터 시행된 베네치아 입장료만 해도 2025년에 약 542만 유로(약 81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렇듯 베네치아는 본섬으로 들어오는 관광객에게도 입장료를 받는다. 베네치아에 숙박하지 않고 당일치기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1인당 5유로씩 받는다. 그것도 4일 전에 예약했을 때 그렇고 3일 이내부터는 10유로로 껑충 뛴다. 우리는 숙박을 했기 때문에 웹사이트를 통해 사전 등록을 하여 QR 코드만 받았다.


어디 그 뿐인가? 성당, 궁전, 박물관, 종탑을 들어가기 위해서도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여행을 가서 껍데기만 보고 알맹이는 보지 않은 채 다닐 수 없기에 티켓 구입은 필수 사항이다. 그러니 돈은 내 지갑 속에 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돈들이 줄줄 새고 있다. 여행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아끼려 해도 기본 경비까지 줄일 수는 없다. 다만 돈 없는 서민에게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이다.


여행객이 많은 도시를 여행할 때는 티켓을 현장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온라인으로 예매하는 것이 편리하다. 물론 현장에서도 살 수 있지만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특히 온라인으로 패스트트랙인 우선 입장권을 구입하면 대기 줄이 아무리 긴 곳이라도 바로 입구로 가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두칼레 궁전도 사람들이 붐비기는 마찬가지여서 입구를 몇 개로 분산시켜 놓았다. 그나마 사람들이 적은 곳을 찾아 온라인으로 예매해서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입장권의 QR 코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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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코르틸레와 로지아(Il Cortile e le Logge)


두칼레 궁전의 코르틸레는 1층에 있고 롯제는 1층과 2층에 있다.

이탈리아의 건물 층수 표기는 우리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우리식으로 표현했다. 코르틸레와 로지아는 안뜰과 회랑으로 번역하며 로지아(Loggia)는 단수형이고 롯제는 복수형이다. 두칼레 궁전의 회랑을 복수형 롯제(Logge)라 쓰고 단수형 로지아(Loggia)로 읽는 것은 로지아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미술사와 건축학에서 굳어진 용어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르틸레와 로지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두칼레 궁전의 건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안뜰에서 보면 두칼레 궁전은 세 개의 건물이 북쪽의 산 마르코 대성당을 보면서 직사각형의 ㄷ자 형태로 놓여 있는 구조다. 바다로 향한 남쪽 건물은 1340년부터 재건된 것으로 대평의회의 방(Sala del Maggior Consiglio)이 있고, 산 마르코 광장을 향하고 있는 서쪽의 건물은 1424년부터 지어진 건물로 화려한 베네치아 고딕 양식의 파사드가 특징이다. 그리고 운하가 있는 동쪽의 건물은 시기적으로 늦은 르네상스 시대(1483~1565년)에 건설되었으며 도제의 사적 거처와 정부 집무실들이 있는 곳이다.

During the 14th century.jpg Nel corso del Trecento - MUVE-Palazzo Ducale



두칼레 궁전을 입장할 때도 그랬지만 궁전 안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유가 뭘까? 이른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미 오전 11시가 넘었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아직 관광 성수기가 아니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은 탓일까? 느긋한 여유가 겹치면서 쓸데없는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내는 궁전의 로지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벌써 지친 탓일까? 에너자이즈 같은 그 활력은 어디로 갔기에 저렇게 축 늘어져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오해였다. 내가 로지아로 들어서자 아내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활기차게 걷고 있었다. 아내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순간 나도 그 옆에 앉아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무엇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뜰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고 싶었다. 마음은 쫓지 말자고 하면서도 행동은 늘 쫓기고 있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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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틸레(Cortile)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로지아로 들어서면 길게 늘어선 아치형 대리석 기둥 사이로 궁전의 안뜰이 보인다. 안뜰은 긴 직사각형 구조다.


여기서 안뜰이란 번역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마당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통적인 건축에서 안뜰은 작은 화단과 마당이 복합된 모습이다. 작은 화단은 서양에서 보면 정원일 수 있다. 두칼레 궁전의 안뜰은 베네치아에서 흔히 사용하는 하얀 이스트리아석(Pietra d'Istria)과 붉은 벽돌(Terracotta)이 깔려 있다. 작은 화단은 커녕 풀 한 포기조차 없이 포장된 바닥은 어찌 보면 삭막하다. 코르틸레를 정원이라 하지 않는 이유도 그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르틸레를 일반적으로 마당이 아닌 안뜰로 번역하고 있어서 여기서도 그렇게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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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우물(Pozzi di bronzo)


안뜰에는 두 개의 청동 우물이 있다. 베네치아의 우물인 포찌(Pozzi)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전의 글 '04. 운하와 골목길의 풍경의 우물(Pozzo di Venezia)(https://brunch.co.kr/@7ae8c238bffa477/5/write)'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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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청동 우물 중에서 바다로 향한 남쪽에 있는 것은 1556년에 니콜로 콘티(Niccolò Conti)가 만든 청동 우물이다. 우물의 몸체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문양과 인물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부조의 꽃줄 장식이나 어린 천사의 모습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물 속에 부의 염원을 담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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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북쪽의 대성당쪽에 있는 청동 우물로 1559년 알폰소 알베르게티(Alfonso Alberghetti) 가문의 주조소에서 만들었다. 청동 우물을 만든 알베르게티 가문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병기창 아르세날레(Arsenale)에서 대포를 만들던 유명한 주조 전문가 집안이었다.

우물의 몸체는 니콜로 콘티가가 만든 우물과 비슷한 시기여서 르네상스 양식을 띠고 있다. 문양은 여인상과 방패 문장 그리고 꽃과 과일이 담긴 바구니 등이 조각되어 있다. 방패 문장은 당시 재임 중이던 도제 지롤라모 프리울리(Girolamo Priuli) 가문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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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계단(Scala dei Giganti)


궁전 안뜰에서 운하쪽으로 서 있는 도제 집무실의 건물에 2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이 있다. 계단 이름은 거인의 계단이다.

거인의 계단은 15세기 말 안토니오 리초(Antonio Rizzo)가 설계했으며 이스트리아석과 대리석으로 장식했다. 베네치아는 새로운 도제가 선출되면 이 계단의 꼭대기에서 베네치아의 통치자임을 선포하고 도제의 모자 코르노 두칼레를 도제에게 수여했다. 정치적인 행사가 거행된 공적인 무대였던 것이다. 또한 외국의 사신이나 왕족이 베네치아를 방문할 때도 도제는 계단의 꼭대기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함께 황금 계단(La Scala d'Oro)으로 올라갔다.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고 했다.

형식을 하나의 틀이라고 한다면 내용은 그 틀에 담긴 본질이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써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대외적인 신뢰성과 정통성을 만들어낸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보자. 국민들은 투표로 선출하고 선관위는 당선장을 수여하며 정부는 취임식이라는 형식을 거쳤을 때 대통령은 법적인 통치권과 대외적인 권위를 담보하게 된다. 그것은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두칼레 궁전의 거인의 계단이 가지고 있는 의미도 그런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간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 도제는 바로 이 거인의 계단이라는 장엄한 장소에서 취임식을 갖고 도제의 모자를 수여 받았을 때 비로소 도제의 정통성을 확인하게 된다.


형식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내용은 막연한 상태의 추상적인 구호에 머무는 것과 같다. 베네치아 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이념이 내용으로 실체화되기 위해서는 공화국의 선거 체계와 도제가 취임하고 집무하는 두칼레 궁전의 화려한 건축 형식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즉, 외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다"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아닐까? 그 말의 맥락은 형식이 내용을 규정할지라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결국 둘 다 껍데기라는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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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웅장하지도 않은 계단이 왜 거인의 계단일까? 그것은 바로 계단 위에 서 있는 두 조각상 때문이다.


1567년 조각가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가 제작한 거대한 두 조각상은 아래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전쟁의 신 마르스(Mars)이고 오른쪽이 바다의 신 넵투누스(Neptunus)다. 로마 신화의 마르스와 넵투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아레스와 포세이돈과 같다. 베네치아에서 마르스는 강력한 군사력의 육군을 상징했고 넵투누스는 해상을 지배하는 해군을 상징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육군과 해군의 강성함으로 공화국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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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의 사자(Leone di San Marco)


거인의 계단 위에 있는 마르스와 넵투누스 대리석 조각상의 뒤로 아치형 대리석 기둥 위에 커다란 날개 달린 사자상이 있다.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산 마르코(San Marco)를 상징하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 문장이다.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은 원래 테오도로 성인이었으나 828년 베네치아 상인 두 명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교회에 안치된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훔쳐서 베네치아로 가져오면서 수호성인을 마르코 성인으로 변경했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왜냐하면 기존의 성인 테오도로가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수호성인이었다면 성인 마르코는 베네치아가 독자적인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는 수호성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자의 앞발로 짚고 있는 책에는 라틴어 문구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VS'가 적혀 있다. 번역하면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야, 너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는 글이다. 이것은 마르코 성인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폭풍을 만나 베네치아 석호에 머물렀을 때 꿈 속에 천사가 나타나 예언한 메시지라고 한다. 베네치아인들은 이 예언이 마르코 성인의 유해가 베네치아에 안치됨으로써 실현되었다고 믿었으며, 이는 베네치아가 신의 신성한 축복을 받은 땅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두칼레 궁전의 날개 달린 산 마르코 사자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도상학적으로 설명하는 전형적인 사자상은 앞발을 육지에 딛고 뒷발은 바다 위에 딛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상권과 육상권을 지배하는 강대국이면서 패권국을 선언하는 상징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강자는 없지만 강자의 흔적은 오래도록 남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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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카리 아치(Arco Foscari)


거인의 계단 맞은편에 15세기에 지어진 개선문 포스카리 아치가 있다. 건축 형태는 하단의 고딕 양식과 상단의 르네상스 양식이 결합된 모습이다. 개선문은 거인의 계단과 거의 맞닿아 있어서 계단 아래에서 보면 잘 모르지만 계단 위에서 보면 정말 웅장하고 화려하다. 이곳은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에 외국의 사신들과 왕족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방문객들이 석호의 항구에서 내려 산 마르코 광장의 피아제타를 거쳐 포스카리 아치가 있는 문으로 들어와 거인의 계단을 올라갔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베네치아 도제는 계단 위에서 사신단이나 왕족의 방문객이 개선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내려다 보며 맞이했다.


포스카리 아치는 제 65대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Francesco Foscari, 1373~1457)가 재임할 때 건축이 시작되어 그의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1450년대에 바르톨로메오 부온(Bartolomeo Buon)이 고딕 양식으로 건물의 기초를 세우고 작업을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몇 년 뒤에 죽었다. 부온 가문은 베네치아의 고딕 양식 건축을 주로 맡아서 설계하고 작업했으며 베네치아 방언으로 보노(Bono) 또는 본(Bon)이라 부르기도 한다.


포스카리 아치는 1483년에 일어난 궁전의 화재 이후에 재건 책임자로 안토니오 리초(Antonio Rizzo)가 임명되어 건축과 조각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다. 거인의 계단을 완성한 리초의 르네상스 양식이 포스카리 아치에도 적용되어 상단부로 갈수록 정교함과 고전미가 보인다. 포스카리 아치는 고딕 양식의 바르톨로메오 부온과 르네상스 양식의 안토니오 리초의 작품이 결합된 보기 드문 건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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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리초는 포스카리 아치를 건축하면서 1485년에 아치 중앙의 양쪽에 아담과 이브 조각상을 만들었다.


조각상의 재질은 값비싼 이탈리아 토스카나산의 흰색 카라라 대리석을 사용했으며 조각을 인체의 실물 크기로 제작해서 사실성을 높였다. 중요한 부분은 살짝 가린 누드 모습으로 아담은 입을 벌리고 가슴을 움켜쥔 고통스러운 표정이지만 이브는 오히려 무심한 듯 어떤 감정이나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태초의 원죄에 대한 두 사람의 느낌이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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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카리 아치의 남쪽 측면에도 조각상이 있다.

밑에서 올려다 보면 오른쪽에 있는 조각상이 전쟁의 신 마르스이고, 중앙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 상으로 그를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로 인식해 베네치아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상징하기 위해 여기에 설치했다. 그리고 벽의 왼쪽에 있는 어린 소년상은 시종이다. 소년상은 원래 가문의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팔과 함께 파손되고 없다.


현재 아담과 이브 그리고 마르스의 세 조각상 진품은 궁전의 대평의회의 방에 전시되고 있다. 리초가 조각상을 만들 때 사용한 카라라 대리석은 입자가 고와서 인물의 근육이나 피부 질감을 표현하기는 좋지만 반면에 오랜 시간 동안 바다의 염분과 산성비에 노출되면 조각상의 부식과 훼손이 심해진다. 베네치아 시는 20세기 들어 훼손된 조각상의 진품을 복원하여 궁전 안으로 옮기고 대신 복제품을 만들어 포스카리 아치에 설치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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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포스카리 아치와 관련하여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와 건축가 안토니오 리초의 두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카리는 개선문을 건설하도록 한 사람이고 리초는 개선문을 건설한 사람이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중요한 공직을 두루 역임하고 1423년에 도제로 선출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1457년 사망할 때까지 34년 6개월간 베네치아를 다스렸다. 도제로 재임하는 동안 포스카리는 베네치아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노력했고 밀라노와 오랫동안 전쟁을 하기도 했다.


그의 불행은 1445년 외동 아들 야코포가 뇌물 수수 혐의로 10인 평의회의 재판을 받고 나폴리로 추방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베네치아 법은 도제 가족의 이권 개입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10인 평의회의 재판을 아버지인 도제 포스카리는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야코포가 추방되고 5년 후에 야코포의 유죄 판결에 앞장섰던 10인 평의회의 위원 에르몰라오 도나토가 살해되었다. 10인 평의회는 야코포를 배후로 지목하고 그를 베네치아로 압송하여 고문을 가한 끝에 죄를 자백 받고 크레타 섬으로 유배했다. 그러나 이 혐의는 증거가 불충분했으나 10인 평의회가 포스카리 가문을 압박하기 위해 고문을 통해 유죄를 만들었다고 한다.


유배 생활을 하던 야코포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밀라노 공작과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두 나라는 베네치아와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에 이 행위는 반역죄에 해당했다. 1456년 야코포는 다시 베네치아로 와서 재판을 받았고 죄를 인정함으로써 크레타 섬 감옥에 투옥되어 1457년 1월 그곳에서 사망했다.


아들의 비보를 접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더 이상 정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를 기회로 정적들은 그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했고 그는 도제직에서 물러나 일주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이것은 도제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10인 평의회와 포스카리 가문의 갈등 속에서 전개된 베네치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불행했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외동 아들 야코포가 처음에는 단순한 뇌물 수수로 죄를 짓고 벌을 받았으나 그것이 살인 혐의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반역죄의 범죄가 되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손조차 쓸 수 없었던 아버지 포스카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식의 죽음과 고통을 겪으면서 결과적으로 자신마저도 죽음의 길로 내몰렸던 권력의 비정함이 서글프다.


이 이야기는 1821년 영국의 시인 바이런(Lord Byron)에 의해 『두 명의 포스카리(The Two Foscari)』라는 희곡으로 탄생했으며, 1844년에 베르디의 오페라 『두 명의 포스카리(I due Foscari)』로 창작되어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The Two Foscari.jpg 『The Two Foscari』 by Lord Byron - From Wikipedia


포스카리 아치와 관련한 또 하나의 이야기는 건축가 안토니오 리초에 관한 것이다.


1483년 두칼레 궁전 화재로 건축물의 일부가 훼손되자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1484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예술가였던 안토니오 리초를 궁전 재건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약 15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며 재건 프로젝트를 이끌었는데 문제는 1498년 정부의 회계 감사 과정에서 공금 횡령 사실이 드러났다.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대략 1만 2천 두카트(Duchat)가 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공금 횡령으로 체포와 처벌이 임박해지자 안토니오 리초는 그가 소유한 집을 팔고 베네치아를 탈출했다. 먼저 안코나(Ancona)로 도망갔고, 이후 폴리뇨(Foligno)를 거쳐 체세나(Cesena)로 도피하여 결국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도망자 건축가'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포스카리 아치는 바르톨로메오 부온에 의해서 건축이 시작되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고, 안토니오 리초에 의해서 재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외국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피에트로 롬바르도(Pietro Lombardo)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아치 상단의 꼭대기 부분과 나머지 장식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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