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08.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by 박태근

# 로지아(Logge)


두칼레 궁전의 로지아는 1층과 2층에 층층이 겹쳐진 이중 회랑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로지아(Loggia)의 복수형인 로제(Logge)로 표기한다. 그러나 어느 한 구역의 회랑을 가리킬 때는 단수형의 로지아를 사용하므로 이후로 로지아라 표기한다. 로지아의 의미는 회랑이지만 보다 엄밀히 말하면 회랑형 복도다.

두칼레 궁전의 로지아는 외부와 내부에 많은 기둥들이 아치형으로 나란히 서 있을 뿐 아니라 1층과 2층의 복합 구조를 하고 있어서 건축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기둥 머리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그것만 보려고 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정도다.


먼저 두칼레 궁전의 1층 로지아부터 보자.

로지아는 건물 안팎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외부 로지아의 1층 기둥은 바닷가 쪽(Molo)으로 17개, 소광장 쪽(Piazzetta)에 18개, 그리고 두 지점이 만나는 모서리에 1개로 총 36개가 줄을 선 듯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1340~1355년 사이에 베네치아의 석공 길드인 타자피에리(Tajapieri)의 숙련된 장인 예술가들이이다. 기둥의 재질은 이스트리아 석재(Istrian stone)로 만들었으며 기둥머리 조각은 필리포 칼렌다리오(Filippo Calendario) 같은 석공 마스터들이 참여했다.


내부 로지아의 안뜰 1층 기둥은 대략 20여 개로 외부보다 작다. 그 이유는 외부 로지아가 궁전의 두 면 전체를 감싸며 떠받치는 형국이지만 내부 로지아는 대성당 쪽은 거대한 벽면으로 막혀 있어서 3면에만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2층 로지아를 보자.

2층 로지아도 1층처럼 건물 안팎으로 되어 있는데 외부 회랑의 경우 기둥은 1층보다 가느다란 기둥들이 더 촘촘하게 세워져 있다. 바닷가 쪽(Molo)에 34개, 소광장 쪽(Piazzetta)으로 36개, 모서리 기둥 1개를 합쳐서 모두 71개다. 기둥 위의 아치는 끝이 뾰족한 첨두 아치 모양이며 그 사이에 장식된 둥근 원 창틀에는 네잎클로버 문양을 넣어서 아름다움을 더했다. 안뜰에 있는 2층 로지아의 기둥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기둥의 굵기가 가늘기는 하지만 기둥 수는 1:1로 대응되어 숫자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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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칼레 궁전의 로지아를 장식하고 있는 기둥과 기둥머리 조각은 시각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완성도가 높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된다. 또 로지아의 내부와 외부 건축 양식은 서로 다른 모양이어서 시대상에 따른 두 개의 양식을 감상할 수 있다.


건축 양식을 보면 외부 로지아는 14세기에 건설한 독특한 베네치안 고딕(Venetian Gothic) 양식을 보여준다. 1층의 크고 두터운 첨두 아치 모형과 2층의 가늘고 촘촘한 첨두 아치 모형이 같은 듯 다른 대비를 이루며 시선을 꽉 붙든다. 2층 첨두 아치 사이에 있는 사엽무늬(Quatrefoil) 창틀 장식은 언뜻 보면 네잎클로버 같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문양의 모양은 교회의 십자가를 시각화한 것이고 숫자 4는 기독교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를 상징한다.


건물 구조가 베네치안 고딕 양식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로지아 열주의 공간이 개방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상층부의 무거운 건물이 지상이나 바다가 아닌 공중에서 떠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한다.


내부 안뜰의 로지아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1층의 기둥은 고전적인 비례미를 강조하는 코린트식이고 기둥 사이에는 끝이 완만한 반원형 아치로 모양을 냈다. 반면에 2층의 로지아는 끝이 뾰족한 첨두 아치 모양이어서 작은 차이를 통해 다름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두칼레 궁전의 외부 로지아와 내부 로지아가 서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1483년에 발생한 궁전의 화재로 건축물 일부가 훼손되고 그후에 복구 과정을 거치면서 내부는 안토니오 리초(Antonio Rizzo) 등에 의해 당시 르네상스 양식이 반영된 건축물로 재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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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칼레 궁전 1층 로지아는 외부든 내부든 바깥으로 개방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로지아의 복도에서 쉬다가도 어디로든 나갈 수 있어 편리하다. 기둥 머리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건물 밖에 있는 1층 로지아의 36개 기둥 머리 조각이 유명하다. 기둥 머리의 조각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생각이다.


혹시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1층 로지아 안의 복도에 앉아서 천장을 한번 쳐다 보아라. 햇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천장의 강한 입체감이 주는 감흥이 당신을 매료시키고 말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아치형 천장이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면서 만드는 볼트(Vault) 구조의 반복성 때문이다. 구조의 굴곡과 빛의 변화가 서로 어우러져 빚어내는 명암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운 콜라보다. 그것을 보는 느낌이 참으로 묘하다.


1층 지붕의 재질이 입체적인 석재라면 2층 지붕의 재질은 평면적인 목재다. 그렇게 한 이유는 건물의 하중을 최소화하여 구조적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베네치아는 모든 건물들이 석호의 갯벌에 나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무게 하중을 줄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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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아 기둥머리(Capitelli) 조각


기둥머리 조각은 14세기 베네치아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과 당시의 지식 내용을 자세하게 담고 있어서 돌로 담아낸 백과사전이라 부른다. 특히 1층 외부 로지아의 36개 기둥에 새겨진 조각이 유명한데 입장료 없이도 감상이 가능하다. 베네치아에서는 그것만 가이드 투어하는 것을 보았다.


기둥머리 조각에는 숨겨진 상징성이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가 문맹률이 높은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법률적인 메시지를 그림으로 담은 것이다.

기둥머리의 성경적인 내용은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솔로몬의 재판 등이다. 아담과 이브는 인간의 원죄를 각인시키며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구원을 보여준다. 솔로몬의 재판은 공정하고 지혜로 판결을 강조하는 공화국의 법 집행을 상징한다. 도덕적인 규범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7대 죄악인 오만, 탐욕, 질투, 분노, 음란, 탐식, 나태를 경계하는 모습의 조각들을 의인화로 그렸다. 다른 조각에는 당시 베네치아인의 생활 모습이나 가족의 일대기, 다양한 직업군을 묘사함으로써 중세시대 베네치아 사람들이 살아가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다.


모든 역사는 문자나 그림으로 기록된 사물의 존재를 통해서 시간을 초월한 교감이 이루어진다.

만약에 개인이나 국가에 남겨진 아무런 기록이 없다면 그 개인사와 역사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다. 과거의 시간대를 이어줄 교감대가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인류의 역사는 과거의 흔적을 스스로 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책을 불태우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그것이고 전쟁을 통한 무자비한 파괴가 그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과거의 흔적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그렇게 영영 사라져 기억 저편의 떠올릴 수 없는 역사 속으로 묻혀 버린다.


기둥머리 조각들을 신기해 하면서도 많이는 보지 못했다. 아니 아주 작은 몇 개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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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Teodore) 수호성인의 진품 조각상


두칼레 궁전의 로지아가 있는 안뜰 1층 북쪽 복도에 테오도르 수호성인의 원본인 진품 조각상이 놓여져 있다. 이것은 원래 산 마르코 광장 피아제타의 산 토다로 기둥(Colonne di San Todaro) 위에 있던 조각상이다. 베네치아 시는 조각상을 환경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둥 위에는 복제품을 두고 진품은 1948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 조각상은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 있던 것들을 모아서 결합한 혼합 예술품이다. 조각상의 머리는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의 초상으로 추정되는 대리석 조각이고, 몸체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군인 조각상이며, 성인의 발치에 있는 악어로 보이는 동물은 15세기경 베네치아에서 별도로 조각하여 추가한 것이다.


이상하게 베네치아는 이런 경우가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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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체가 있는 곤돌라(Gondola con felze)


두칼레 궁전을 들어가면 안뜰의 서쪽 로지아가 있는 곳에 19세기 말에 사용했던 검은색 곤돌라가 있다. 내가 보았을 때 볼품없고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아주 귀한 물건처럼 고이 전시해 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를 모르는 나의 사고 방식이었다. 지금도 베네치아 본섬을 이동하는 유일한 교통 수단은 곤돌라다. 그러니 곤돌라의 변화는 곧 베네치아의 역사이므로 고전적인 원형을 보존하는 것은 역사를 보듬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두칼레 궁전에 전시된 곤돌라는 현재 베네치아 운하를 다니는 관광용 곤돌라와는 조금 다른 몇 가지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로 펠제(Felze)가 있는 형태다. 펠제는 좌석 부분을 덮고 있는 탈착이 가능한 캐빈을 말한다. 과거 베네치아 귀족들은 운하를 이동할 때 곤돌라에서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고 외부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배 위에 마련된 방 같은 작은 공간인 펠제를 설치했다. 지금의 곤돌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양이 있는 것이다.


둘째로 곤돌라의 색깔이 검은색이다. 그 이유는 16~17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제정한 사치 금지법(Leggi suntuarie) 때문이었다. 당시 베네치아의 부유한 귀족들은 자신의 곤돌라를 금박과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하는 장식을 했다. 사치 금지법이 공포된 것은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정부는 모든 곤돌라를 검은색으로 통일하도록 강제했다.


셋째로 곤돌라의 선체 곳곳에 장인의 솜씨를 뽐낸 정교한 조각을 새겼다. 사치 금지법으로 화려한 색칠을 할 수 없게 되자 귀족들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곤돌라에 꽃, 파도, 돌고래 등 자연 문양이나 가문의 문장 혹은 기하학적인 무늬를 정교하게 음각이나 양각으로 새겨넣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곤돌라의 부품인 노를 거치하는 포르콜라(Forcola)와 뱃머리의 쇠장식인 페로(Ferro)의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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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레 카르파초(Vittore Carpaccio)의 성모자상(Madonna col Bambino)


'펠체가 있는 곤돌라'가 전시된 벽면 근처에 성모자상이 걸려 있다. 비토레 카르파초가 그린 '성모자상'이다. 그림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을 띠고 있으며, 카르파초 특유의 부드러운 색채와 성모 마리아의 자애로운 표정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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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의 문(Porta del Doge)


같은 복도의 끝 북쪽면에 7개의 반원형 계단이 있는 도제의 문(Porta del Doge)이 있다. 문은 참 소박하게 생겼다. 이 문은 도제가 궁전의 안뜰에서 자신의 아파트나 개인 기도실로 조용히 이동할 때 사용하는 내부적인 통로였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 하겠다. 도제는 안뜰에서 개인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에 카르파초의 '성모자상' 앞에서 성모의 가호를 빌고 일곱 계단을 올라 문으로 들어갔다. 계단이 일곱 개인 이유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7가지 주덕(Cardinal Virtues)의 의미를 상징한다. 7가지 주덕은 지혜, 정의, 절제, 용기, 믿음, 소망,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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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안뜰의 1층 로지아를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도 1층과 같은 로지아 구조다. 그런데 로지아의 복도에 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닫혀 있거나 혹은 직원이 출입을 막고 있었다. 알고 보니 2층은 궁전을 관리하는 직원 사무실이거나 비밀 투어를 예약한 사람만 가이드를 동행하여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특별 티켓을 구입하지 않은 채 일반 티켓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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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중간쯤에서 직원에게 복도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줄 알고 멈칫거리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복도의 북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실 그곳에는 거인의 계단 꼭대기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포스카리 아치(Arco Foscari)를 제외하면 볼 것이 없었다. 아니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앙리 3세의 방문 기념비도 있었다. 그러면서 안 것인데 두칼레 궁전의 구경을 모두 마치고 나가는 출구가 그곳에 있었다. 문으로 들어가니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바로 그 문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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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5세의 석판(Lapide di papa Urbano V)


두칼레 궁전 2층 로지아 복도의 벽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석판 중 하나는 교황 우르비노 5세가 1362년(또는 1365년)에 내린 교령이다.


석판에는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음식이나 의복을 제공하거나 자선을 베푸는 자에게는 1년 혹은 일정 기간의 죄를 면죄한다"는 내용이 있어서 '죄수들을 위한 우르바노 5세의 교령'(Decreto di Urbano V a favore dei carcerati)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통일된 명칭은 없다. 이 교령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열악한 감옥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한 면죄부였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자선을 독려하고자 했던 교황청의 종교적인 노력을 보여주는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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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입(Bocche di Leone)


두칼레 궁전 2층 로지아 벽에 보케 디 레오네(Bocche di Leone)가 있다. 번역하면 '사자의 입'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비밀 고발함이다.


비밀 고발함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독특한 사법 시스템으로 시민들이 국가에 대한 반역, 세금 포탈, 위생 규정 위반 등 각종 비리나 범죄를 익명으로 고발할 때 사용했다. 익명이 보장되는 이런 시스템은 자칫 무고나 사적 보복의 수단으로 악용될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고발장으로 인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고발장에 반드시 2명 이상의 증인과 구체적인 물증을 명시하도록 했고 조사 결과 고발 내용이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 고발인에게 매우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벽에 있는 비밀 고발함의 얼굴은 보케 디 레오네란 이름처럼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험악한 인상의 사람 얼굴이다. 이것도 사자의 입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렇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곳곳에 설치했던 사자의 입이란 명칭은 그곳에 새겨진 조각 형상에 관계없이 모두 사자의 입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징하는 동물이 바로 산 마르코의 사자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서 사자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사자 형상 얼굴의 입에 길쭉하게 뚫린 비밀 고발함 구멍으로 투서를 하면 고발장은 사자의 입 뒤편에 있는 나무 상자에 담긴다. 그러면 그 상자를 열 수 있는 담당 행정관이 수거하여 내용을 확인하고 단순한 비방용 투서일 경우는 바로 폐기하였으며, 고발 내용이 국가 안보, 정치적 음모, 혹은 중대한 부패와 관련되면 10인 위원회로 전달한다. 10인 위원회는 즉시 비밀 정보원을 보내 사전 조사를 하고 피고발자의 혐의가 확인되면 비밀리에 체포하여 위원회 고문실에서 심문을 했다. 피고발인은 심문 후 재판에 넘겨져 유죄가 확정되면 죄의 정도에 따라 사형 혹은 감옥에 구금되었다.


사자의 입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은혜나 관직(이권)을 은폐하거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실제 수입을 숨기기 위해 결탁하는 자들에 대한 비밀 고발함"(DENONTIE SECRETE CONTRO CHI OCCULTERÀ GRATIE ET OFFICI O COLLUDERÀ PER NASCONDER LA VERA RENDITA D'ESSI)

라틴어 비문은 부정부패, 세금 포탈, 불법 이익 취득 등을 감시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시민들이 자신이 고발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맞는 사자의 입을 찾아가서 고발을 하도록 한 것이다. 효율적인 수사와 관리를 위해 범죄의 성격에 따라 담당 기관을 나누어 고발하도록 고발함을 운영했는데 국가 안보와 관련된 반역죄의 경우는 10인 위원회가 직접 관리하는 궁전 내 고발함에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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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3세 방문 기념비(Lapide commemorativa della visita di Enrico III)


두칼레 궁전 거인의 계단 위의 2층 로지아 벽에 거대한 대리석 석판이 있다. 프랑스 왕 앙리 3세의 베네치아 방문을 기념하는 앙리 3세 방문 기념비다.


앙리 3세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넷째 아들로 퐁텐블로 성에서 태어나 앙굴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그의 형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오를레앙 공작과 앙주 공작을 거쳐 1573년에 폴란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앙리 3세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던 때였다.


1574년 폴란드 왕이었던 앙리 3세는 샤를 9세의 서거 소식을 듣고 프랑스로 향했다. 하지만 폴란드 귀족들의 반대를 우려해 밤에 몰래 바셀 성을 빠져나와 국경을 넘었으며 그는 프랑스로 바로 가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가톨릭을 믿었던 앙리 3세는 개신교 제후들의 통치 지역을 피해 막시밀리안 2세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빈으로 갔던 것이다. 막시밀리안 2세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경유해 프랑스로 들어가라는 우회 경로를 조언해 주었고 그에 따라 앙리 3세는 자신이 평소에 관심을 가졌고 가고 싶어했던 베네치아를 갔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은 새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앙리 3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전략적 동맹과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열렬히 환영하면서 10일 동안 초호화 행사와 축제의 기간을 가졌다. 베네치아가 앙리 3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던 이유는 생존을 위한 치밀한 외교 전략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을 견제해야 했고 당시 지중해 패권을 쥐고 있었던 오스만 제국과 동방 무역로의 안전 보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프랑스 앙리 3세의 방문을 기회로 유럽의 다른 국가에게 '우리는 여전히 부유하고 강력하다'는 메시지를 전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앙리 3세는 샤를 9세가 죽자 곧바로 프랑스로 가기 위해 폴란드를 떠났다. 말이 좋아 떠난 것이지 몰래 도망쳤다. 도망자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급히 떠난 이유는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는 비록 앙리 3세가 계승자지만 누가 먼저 왕위를 차지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프랑스로 가던 앙리 3세가 베네치아에서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받으며 머무는 동안 도망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프랑스 왕이 될 위엄과 정치적인 정통성을 공고히 하고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로 갈 때 베네치아로부터 10만 두카트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지원받음으로써 왕권을 유지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계 각국의 외교는 철저하게 실리적인 바탕 위에 이루어진다.

국가의 이익을 위하고 국가의 안전을 위하는 외교가 아니라 국가의 주권을 상실케 하고 경제적인 파탄을 야기하는 외교라면 나라의 파멸을 초래한다. 대한제국의 대신 이완용 등 을사오적들이 자행한 외교로 국권이 상실된 것이 그런 사례다. 그 이외에 다른 경우도 많다. 문제는 망국적인 외교 행위의 잘못은 당장 나타나기보다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알려진다는 점이다.


앙리 3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후 프랑스는 국왕 앙리 3세와 가톨릭 연맹의 수장 기즈 공작 앙리 그리고 개신교 세력의 수장 나바르의 앙리로 분열되고 심지어 전쟁으로 이어지는 '세 앙리의 전쟁'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 과정에서 앙리 3세는 왕권을 넘보는 기즈 공작 앙리를 암살하였으며 가톨릭 교도의 광신도였던 수도사 자크 클레망은 앙리 3세를 암살했다. 앙리 3세에게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직계 자식이 없었으므로 암살되기 전에 나바르의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다.


나바르의 앙리는 앙리 3세 사후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개신교 왕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1593년 가톨릭 개종을 선언하면서 "파리는 미사 한 번을 드릴 가치가 있다(Paris vaut bien une messe)"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실 그는 이전에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바 있었다. 아무튼 프랑스는 앙리 3세의 죽음으로 발루아 왕조의 종말을 맞았고 나바르의 앙리가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조의 새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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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로지아에서 보는 궁전의 안뜰 모습은 또 다른 느낌이다.


창밖으로 산 마르코 종탑이 보이고 옆으로 돌아가면 산 마르코 대성당의 지붕이 보인다. 아래로 내려다 보면 안뜰에 있는 청동 우물과 내가 했던 것처럼 그곳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로지아의 대리석에는 사람들의 낙서도 보였다. 유럽은 낙서에 대해 관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문화재에 낙서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서 같은 그라피티(Graffiti)가 예술로 인정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앞세우며 낙서를 사회적 목소리로 인식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생각과는 달리 사방은 의외로 고요하다. 일상이 멈춘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것일까? 외부와 단절된 적막감은 정적인 고요함으로 다가오고 내 마음의 들뜸은 오히려 피곤함에 밀려 고개를 떨군다. 사람이 이중적인가, 내가 이중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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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붉은 대리석 기둥(Le due colonne rosse)


두칼레 궁전 2층 로지아 복도에서 서쪽 방향으로 걸어가면 이 기둥을 볼 수 있으나 아내와 나는 그곳을 가지 못했다. 거인의 계단 위에서 사진 찍느라고 깜빡했던 것일까? 아니면 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가지 못했던 것일까? 핑계 같지만 그런 이유들로 가지 못했다.


두 개의 붉은 대리석 기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학자나 연구자들은 저마다 설득력을 가지고 말하지만 오래된 일이라 자료적 근거는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붉은 대리석 기둥은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고 있어서 관심을 가진다.


두칼레 궁전의 시초는 9세기 초반에 이루어졌다. 베네치아 제10대 도제였던 안젤로 파르테치파치오(Angelo Partecipazio)가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처럼 만든 사각형의 건물이었다. 그때의 건물은 이후의 건물과 비교할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으며 2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나무나 돌로 된 계단이 있었을 뿐이다.


그후 베네치아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14세기 중반에 건축가 필리포 칼렌다리오(Filippo Calendario)가 기존의 요새 건물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궁전의 외관을 고딕 양식의 회랑이 있는 로지아 모습으로 변경시켰으며 기존의 계단 입구를 로지아의 일부로 포함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붉은 기둥은 없었다.


두칼레 궁전은 15세기 중반에 다시 크게 변모를 한다.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Francesco Foscari)가 재임하던 때였다. 궁전을 대대적으로 공사하게 된 이유는 궁전에 화재가 발생해서 소실된 곳을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포스카리의 야심도 한몫했다. 그는 베네치아가 육지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앞장섰다. 소위 영토 확장론을 펼치면서 밀라노 공국과 수십 년간의 전쟁을 벌여 승리했으며 이 시기 베네치아 공화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기도 했다. 특히 1454년에 맺어진 로디 조약(Pace di Lodi)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교황청과 더불어 5대 강국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Italy_1454_after_the_Peace_of_Lodi.jpg Italy 1454 after the Peace of Lodi - Wikipedia



포스카리는 베네치아를 최전성기로 이끌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전쟁 비용을 발생시켜 반대파인 로레단(Loredan) 가문에 공격의 빌미를 주기도 했다. 결국 그것이 아들의 뇌물 수수와 자신의 도제직 퇴위라는 비운을 맞이했다. 포스카리는 반대파의 퇴위 요구를 받았을 때 '나의 권위는 내가 직접 얻은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10인 위원회의 결정으로 결국 퇴위하면서 "나는 계단을 통해 들어왔으니, 그 계단들을 통해 나가고 싶다."(Io n'entrai per le scale, e per quelle me ne voglio andare.)는 말을 남겼다. 그 계단은 포스카리가 도제 때 만든 화려한 '거인의 계단'이 아니라 자신이 도제로 선출되었을 때 걸어 들어왔던 계단으로 필리포 칼렌다리오가 만든 고딕 양식의 계단을 말한다.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다.

도제 포스카리는 화재로 소실된 궁전을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세웠다. 당시 복원 공사를 책임 맡은 사람은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부온(Bartolomeo Buon)으로 그는 대대적인 복원과 장식을 통해 미적 통일성을 추구했다. 1층의 기둥 복도인 포르티코(Portico)와 2층의 개방형 회랑인 로지아토(Loggiato)가 그것이다. 포르티코는 튼튼하고 굵은 기둥으로 안정성을 유지했고 로지아토는 섬세하고 화려한 기둥으로 예술성을 살렸다. 이것을 지금은 통틀어서 로지아라 부른다.


바르톨로메오는 포스카리 도제의 전폭적인 신임 속에 궁전 공사를 주도했다. 칼렌다리오가 세운 고딕 양식의 틀을 유지하면서 세부적인 면에 르네상스 양식을 첨가했다. 가령 베로나산 분홍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우아함을 돋보이게 한다든지 로지아의 기둥머리에 고전적이며 사실적인 조각을 장식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포스카리 아치 공사 기록이나 19세기 건축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산소비노(Francesco Sansovino)의 저술에도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르톨로메오가 두 기둥을 세우기 이전에 이곳에서 제55대 도제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 1274~1355)를 반역죄로 사형시켰다거나 혹은 다른 반역자의 사형 선고를 공표했다고 말하는 것은 오해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15세기 도제 포스카리가 10인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퇴위한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실질적인 권력은 10인 위원회로 집중되었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국가 안보와 중대 범죄를 매우 엄격하게 다뤘으며 그로 인해 사형을 판결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또한 판결 내용을 시민들에게 공표하는 의식도 정례화되었다. 그 장소가 바로 이 장소였다. 더군다나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부온이 세웠던 분홍색 기둥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짙은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알리는 공표가 반복되면서 시민들의 머릿속에도 사형을 알리는 '피의 기둥'이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되었다. 실제로 사형은 산 마르코 광장 피아제타에 있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 사이에서 집행했는데 말이다.


두칼레 궁전 구경을 모두 마치고 궁전의 출구인 포르타 델라 카르타(Porta della Carta)로 나왔다.

피곤함이 밀려왔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만사가 귀찮다. 벽에 기대어 앉아 쉬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앉았다. 의자도 아닌 맨바닥인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앞 안내판의 좁은 틈에는 아이들이 앉아 있다. 연민의 눈길을 보내보지만 내 마음 뿐이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광장 쪽으로 보니 산 마르코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대기줄이 길기만 하다. 여행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생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지. 여행을 하고 나면 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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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붉은 대리석 기둥은 두칼레 궁전 밖의 소광장에서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 중 왼쪽은 피아제타에서 본 모습이고 오른쪽은 산 마르코 대성당 지붕 발코니에서 본 모습이다. 궁전의 2층 로지아 기둥을 보면 모두가 하얀색인데 그중에서 유독 두 개만 짙은 분홍빛을 띠는 붉은색 대리석이다. 순서로 따지면 궁전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서 9번째와 10번째 기둥이다. 기둥의 재질이 달라서 그렇다. 다른 기둥들은 모두 하얀색 이스트리아 석재인 반면에 두 기둥만 베로나산 분홍색 대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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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타 델라 카르타의 나무문에 있는 로제타(Rosetta) 문양


출구의 나무 문에 꽃 모양의 장식을 보았다. 중앙에 크고 화려한 꽃송이가 있고 네 모서리에는 같은 디자인의 작은 꽃들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로제타(Rosetta) 문양이다. 로제타는 부활, 순결, 영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장식은 장인들이 나무에 쇠못을 박은 후에 투박한 못 머리를 감추기 위헤 꽃 모양의 청동판을 덧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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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출구 포르타 델라 카르타(Porta della Carta)


두칼레 궁전의 안뜰과 연결되는 이 문은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부온(Bartolomeo Buon)이 1438년에서 1442년 사이에 설계하고 건축했다. 뾰족한 첨탑 모양과 수직적인 장식에서 보듯이 베네치아 고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출구로 사용되지만 원래는 궁전의 행정 관리들이 공문서를 들고 다녀서 '종이의 문' 혹은 '문서의 문'으로 번역한다.


문 위에 있는 커다란 조형물에는 세 개의 인물상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조각되어 있다.

제일 꼭대기에는 칼과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이 앉아 있으며 이는 베네치아 사법 시스템의 엄격함을 상징한다. 중간에는 원형 장식인 톤도(Tondo) 안에 베네치아의 수호성인 산 마르코가 양쪽에 두 천사를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조각은 도제 포스카리와 산 마르코의 사자로 도제가 산 마르코 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다. 이 조각의 도제 포스카리는 179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성을 없애기 위해 도제의 조각상을 모두 부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현재 있는 포스카리 조각은 원본의 잔해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복원한 복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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