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08.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by 박태근

3. 황금 계단(La Scala d'Oro)


두칼레 궁전의 일반적인 관람 동선은 안뜰에서 2층으로 올라가 다시 황금 계단(Scala d’Oro)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간다. 2층 로지아는 복도의 동, 남, 서쪽을 따라 투어할 수 있었으나 아내와 나는 동쪽 복도만 걸어서 구경했다.


두칼레 궁전을 관람할 때 일반 투어 외에 비밀 코스 투어(Secret Itineraries Tour)라는 것이 있다. 일반 관람객이 접근할 수 없는 궁전의 숨겨진 장소들을 전문 가이드와 함께 둘러보는 특별 투어다. 숨겨진 장소란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비밀 기록 보관소, 과거 죄수들을 심문하던 고문실, 카사노바가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피옴비(Piombi) 감옥, 외부에서는 층수를 알 수 없도록 설계된 좁은 계단의 비밀 통로가 그것이다. 이것은 한 번에 최대 20명까지만 참여할 수 있는 소규모 투어로 일반 티켓 외에 사전 예약이 필수다. 투어 시간은 대략 1시간 15분 정도 걸린다.


베네치아를 관광하는 자유 여행자들은 흔히 두칼레 궁전 티켓이나 베네치아 뮤지엄 패스를 구입하여 베네치아의 주요 관광지를 구경한다. 그런데 이 티켓으로는 두칼레 궁전의 비밀 코스 투어를 할 수 없으므로 별도로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티켓은 두칼레 궁전 홈페이지의 비밀 코스 투어(Secret Itineraries Tour)로 들어가서 예약 날자와 시간을 선택하면 잔여석과 요금이 나온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클릭하고 해당 요금을 선택하면 되는데 성인은 € 40다.

두칼레 궁전을 구경하면서도 정작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장소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팁으로 알려준다.


궁전의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황금 계단이라 부른다.

라 스칼라 도로(La Scala d'Oro)를 황금 계단이라 부르는 이유는 계단 천장의 반원형 둥근 천장을 스투코(Stucco) 장식으로 꾸미고 그 위에 24캐럿 순금으로 된 금박(Gold leaf)을 입혔는데 이 장식이 햇빛을 받으면 계단 전체가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절정기를 보여주는 국가의 강력한 부와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스투코 장식은 석회, 대리석 가루, 물 등을 섞어 만든 반죽을 벽이나 천장에 발라 입체적인 문양이나 조각을 만드는 미장 기법이다. 금박은 숙련된 금세공 장인이 금 덩어리를 종이 사이에 끼우고 망치로 수천 번 두드려 약 0.0001mm 두께로 편 박판이다. 이것을 스투코 장식 위에 천연 접착제를 바르고 정전기를 이용한 전용 붓으로 박판을 옮겨 붙인다. 베네치아인들은 금이 산화로 변질되지 않고 습한 기후에도 변색되지 않는 성질을 이용해 16~18세기에 여러 건축물과 많은 예술품에 유행처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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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오르며


황금 계단은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심상찮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여행자는 일단 계단 입구에서 멈칫거리게 된다. 계단 앞에서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서 천장을 쳐다보며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천장의 황금색 조각품을 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진다. 오히려 찍고 있는 사진이 그 아름다운 색을 담지 못해 감흥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하나 하나가 입체적이면서 세밀하다. 작은 것조차도 정성이 닿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순금의 금박 장식에 벽토의 흰색 스투코 질감이 매우 돋보인다. 황금 계단의 계단은 민무늬의 일반 대리석이다. 전혀 황금적이지 않다. 이름을 잘못 붙인 것 같다. 황금 계단이 아니라 황금 천장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 도제가 거주하면서 집무하는 곳이기에 도제의 궁전이라 부른다.

외국의 유명 귀빈들이 총독의 궁전을 방문하면 산마르코 대성당 옆에 있는 포르타 델라 카르타(Porta della Carta)로 들어와서 안뜰의 웅장한 거인의 계단(Scala dei Giganti)을 오른다. 포르타 델라 카르타는 당시에 궁전의 입구였지만 현재는 궁전을 관람한 관광객들이 나가는 출구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2층 복도를 따라 가서 황금 계단을 오르게 되는데, 이 계단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고위 관료와 외국의 귀빈인 왕, 왕자, 외교관, 대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것은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외국 귀빈들에게 황금 계단의 화려함을 보여줌으로써 베네치아의 부유함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과거에 외국의 귀빈이나 베네치아 고위 관료가 아닌 사람은 다닐 수가 없었던 계단길을 세월이 바뀌어서 지금은 두칼레 궁전의 입장권만 사면 누구라도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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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치아노 아스페티(Tiziano Aspetti)의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 조각상


황금 계단으로 올라가는 아치형 입구의 양쪽에 코린트 양식으로 된 석조 기둥이 있다. 기둥 위에는 두 명의 인물 조각상이 있다. 왼쪽은 '히드라를 죽이는 헤라클레스'(Ercole che uccide l’Idra)이고, 오른쪽은 '하늘(천구)을 떠받치는 아틀라스'(Atlante che regge il cielo)다. 둘 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다. 조각상은 16세기 중반에 티치아노 아스페티가 만들었으며 황금 계단은 베네치아의 유명한 건축가 산소비노가 설계했다. 어째 들어가는 입구가 심상치 않다. 이것은 베네치아 수호의 상징인가, 아니면 황금 계단 문지기의 역할일까?


두 조각품이 의미하는 바는 통치자가 좋은 행정을 펼치기 위해 가져야 할 필요한 덕목을 상징한다. 헤라클레스처럼 힘든 역경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힘과 용기을 말하며, 아틀라스처럼 거대한 짐을 짊어진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와 책임의 자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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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드라를 죽이는 헤라클레스'(Ercole che uccide l’Idra)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으로 신 제우스와 미케네 왕의 딸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는 전쟁터로 나간 알크메네의 남편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해 알크메네와 동침하였다. 그리고 3일 후에 전쟁터에서 귀향한 진짜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한 알크메네는 쌍둥이를 임신했다. 그 아이가 헤라클레스와 이피클레스다.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불륜으로 헤라클레스가 태어난 사실을 알게된 헤라는 질투와 분노로 헤라클레스를 미워하며 끊임없이 고통을 주었다. 아기였을 때는 뱀을 보내 죽이려다 실패했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광기를 내려 아내와 자식을 죽이도록 만들었다.


헤라클레스의 광기는 헤라가 광기의 여신 리사(Lyssa)로 하여금 헤라클레스의 몸에 들어가는 빙의를 통해 미치게 만든다. 광기에 사로잡힌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메가라와 자식들을 보고 그들이 자기를 헤치려 온 숙적 에우리스테우스 왕이나 그 괴물로 여겨 사정없이 죽인다. 이때 헤라클레스의 헌신적인 수호신 역할을 하던 아테나가 더 이상의 불행과 파멸을 막고자 돌을 던져 헤라클레스를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헤라클레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후였다.


그렇다면 헤라는 왜 헤라클레스에게 이런 고통을 주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불륜에 대한 질투를 넘어선 다른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올림포스 신들이 거인족 기가스들과 싸울 때 '인간 영웅의 도움 없이는 신들이 승리할 수 없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헤라는 그 예언의 주인공이 헤라클레스라고 믿었다. 만약에 헤라클레스가 신들을 도와 큰 공을 세워서 신들의 전쟁의 주역이 되는 것이 싫었고 그로 인해 헤라클레스가 신격화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헤라클레스가 태어날 때 제우스는 '오늘 처음 태어나는 페르세우스의 자손이 모든 이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그 운명을 비틀어버린 장본인이 헤라다. 헤라가 헤라클레스의 탄생을 늦추고 대신에 칠삭둥이였던 에우리스테우스를 먼저 태어나게 해서 그를 왕으로 만들었다. 헤라는 헤라클레스가 성인이 되면서 지상의 모든 괴물과 악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을 보면서 헤라클레스가 에우리스테우스를 죽이고 왕권을 가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것은 자신이 설계한 왕의 정통성과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광기에서 정신을 차린 헤라클레스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고 죄를 씻는 방법을 묻기 위해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피티아(Pythia)를 찾아간다. 피티아는 헤라클레스에게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 밑으로 가서 12년 동안 그가 시키는 일을 하라'는 신탁을 내리면서 헤라클레스라는 이름도 함께 준다. 헤라클레스의 본래 이름은 알카이오스였으나 피티아가 '헤라의 영광'이라는 헤라클레스 이름을 주었는데 피티아의 이런 조치는 매우 역설적이다. 그토록 미워하고 광기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든 헤라클레스에게 '헤라의 영광'이라니....

하지만 그것은 '헤라가 주는 혹독한 고난을 견뎌냄으로써 영광에 이른다'는 운명의 예언이면서 헤라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헤라클레스의 위대한 업적은 결국 헤라의 권위 아래 있다'는 언어적 수사였다.


이로써 헤라클레스는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에게로 가서 그가 정한 12개의 과업을 수행한다.

그 중에서 두 번째 과업이 레르네의 히드라(Lernaean Hydra) 퇴치였다. 히드라는 머리가 여러 개 달린 레르네 호수의 습지에 사는 괴물이다. 히드라의 머리에 대해서는 그리스 서사시인인 헤시오도스(Hesiod)와 신화 정리가인 아폴로도로스(Apollodorus)는 9개라고 했으나 그 이후의 기록에서는 숫자가 늘면서 여러 개, 다수의, 많은 등으로 표현되었다.

헤라클레스는 히드라를 죽이러 가서 뱀의 머리를 잘라도 다시 재생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그의 조카 이올라오스(Iolaus)를 불러 도움을 청한다. 이올라오스는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의 머리를 자르면 그곳에 횃불로 지져 다시 재생하지 못하도록 했다. 헤라클레스가 마지막에 칼로 자른 최후의 머리는 불로도 태울 수 없는 불멸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 머리를 레느네에서 엘라이우스로 가는 길목에 깊이 파묻고 그 위에 거대한 바위로 눌러놓았다. 이것은 히드라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격리된 것에 불과했다.


신화는 때로 전설이 되기도 하고 현실이 되기도 한다.

히드라의 머리가 묻힌 곳에 놓인 바위는 '히드라의 분노에 찬 숨과 독기로 검은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 그 바위를 치우면 히드라의 머리가 다시 튀어나와 재앙을 안길 것이라 믿었기에 금기의 구역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아르고스에서 레르네로 가는 근처에서 히드라의 머리가 묻힌 유적지를 직접 보았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그는 아르고스 시장 근처에 있는 흙무덤에 메두사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전했다. 이야기가 다르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의 괴리일까?

파우사니아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 이야기(Description of Greece)』 제2권 아르골리스(Argolis) 편에서 아미모네(Amymone) 강 근처에 양버즘 나무가 자라는데 그 아래에 히드라가 살았다는 말을 현지인들에게서 들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히드라의 머리는 하나 뿐이었지 여러 개가 아니라는 자신의 생각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로 이어지는 고대의 역사는 때로는 신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신화가 역사일 수 있고 역사가 신화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때로는 과장되고 때로는 오류가 있을지라도 원류를 따라가서 최초의 근본에 이른다면 그것이 바로 역사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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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천구)을 떠받치는 아틀라스'(Atlante che regge il cielo)


아틀라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으로 이아페토스의 아들이자 프로메테우스의 형제다. 그는 올림포스 신들과 티탄 신들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전쟁 티타노마키아(Titanomachy)에서 티탄족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티타노마키아는 제우스가 이끄는 올림포스 신족과 크로노스가 이끄는 티탄 신족간의 권력 쟁탈 전쟁으로 부자지간에 벌어진 10년 전쟁을 말한다.


티탄족의 크로노스는 태초에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라노스는 많은 자식들을 낳았는데 12명의 거인족 티탄(Titans)과 이마에 눈이 하나뿐인 외눈박이 키클롭스(Cyclopes) 삼형제 그리고 손이 100개, 머리가 50개 달린 괴인 헤카톤케이레스(Hecatoncheires) 삼형제 등이다. 우라노스는 키클롭스와 헤가톤케이레스의 두 아들이 흉측하다는 이유로 대지의 깊은 감옥인 타르타로스(Tartarus)에 가두고, 티탄의 열두 아들은 가이아의 자궁 속에 억지로 밀어넣었다.


그 고통을 참지 못한 가이아는 아버지를 벌하자고 자식들을 설득하였으나 이에 응한 아들은 크로노스 뿐이었다. 가이아는 하르페(Harpe)라는 날카로운 낫을 만들어 크로노스에게 주고 자신의 침실 옆 은밀한 곳에 숨겼다. 밤이 되어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덮으며 내려앉아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에 숨어 있던 크로노스가 튀어나와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칼로 잘라 바다로 던져버렸다. 자신의 성기를 잘린 우라노스는 비명을 지르며 가이아에게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이때 대지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피로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Erinyes) 세자매와 거인족 기간테스(Gigantes)가 태어났고, 바다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성기 거품에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다.


성기를 거세 당한 우라노스는 생식 능력과 권좌를 잃고 더 높은 하늘로 쫓겨났으며, 형제들을 해방시킨 크로노스는 우라노스에 이어 두 번째로 신들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우라노스는 쫓겨나면서 "네가 아버지를 몰아낸 것처럼, 너 역시 네 자식 중 한 명의 손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라는 저주의 예언을 남긴다.

우라노스의 무서운 저주는 크로노스에게 거대한 공포였다. 크로노스는 그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내 레아(Rhea)가 낳은 자식들을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렸다. 이런 모습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그림으로 남겨지기도 했다.


크로노스가 태어나는 자식들을 계속 삼켜버리자 아내 레아는 깊은 슬픔에 빠져 우라노스와 가이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레아는 가이아의 조언으로 태어난 아이 대신 커다란 돌덩이를 포대기에 사서 크로노스에게 가져갔고, 크로노스는 그것을 아들인 줄 알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꿀꺽 삼켜버렸다. 레아는 갓 태어난 제우스를 크로노스의 눈이 닿지 않는 크레타 섬 어느 동굴에 숨겼고, 제우스는 동굴에서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와 싸우기 위해 오케아노스의 딸이자 티탄족의 일원인 메티스(Metis)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메티스는 마법의 구토제를 만들어 주었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크로노스의 술 시종으로 잠입하라고 조언했다. 어느 날 크로노스가 티탄족들과 성대한 잔치를 벌이며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제우스는 메티스가 제조해 준 구토제를 술잔에 몰래 섞어 바쳤고 그 술을 마신 크로노스는 극심한 복통과 구역질을 느끼며 뱃속에 든 자식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먼저 나온 것은 가장 나중에 삼켰던 돌덩이였고 이어서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 테메테르, 헤스티아의 형제들이 차례로 튀어나왔다.


크로노스의 뱃속에서 구출된 제우스의 형제들은 제우스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올림포스 산에 전략적 요충지를 마련했으며 반면에 크로노스와 티탄족은 맞은편 오트리스 산에 전투를 위한 기지를 두었다. 전쟁 기간 동안에 제우스는 할머니 가이아의 조언을 받아 지하 감옥인 타르타로스로 내려가 그곳에 갇혀 있던 키클롭스 삼형제와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를 구해냈다. 신들의 대장장이였던 키클롭스는 자신을 풀어준 보답으로 제우스에게는 하늘의 권능인 벼락(Keraunos)을, 포세이돈에게는 바다를 가르는 삼지창(Triaina)을, 하데스에게는 모습을 숨겨주는 투구(Kynee)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키클롭스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Theogony)』에 따른 것이다. 한편 손이 100개인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300개의 거대한 바위를 크로노스 진영으로 비처럼 퍼부었다. 10년 전쟁은 제우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패배한 크로노스와 티타족을 타르타로스에 가두고 헤카톤케이레스로 하여금 이들을 감시하도록 했다.


티타노마키아 전쟁이 끝난 뒤 제우스는 자신을 도와준 메티스를 아내로 맞이했다. 결혼 후에 메티스가 임신을 했을 때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제우스에게 미래의 비극을 두 가지 신탁으로 경고했다. 하나는 "메티스가 낳을 첫째 아이는 딸일 것이며, 그 아이는 지혜와 용기에 있어 그녀의 아버지와 대등한 존재가 될 것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다음에 메티스가 낳을 둘째 아이는 아들일 것이며, 그는 신들과 인간들의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나 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낼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마치 크로노스가 받았던 저주의 신탁과 비슷한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제우스는 극단적인 선택을 택했다. 메티스가 아들을 낳는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 제우스는 메티스를 통째로 삼켜버리기로 했다. 메티스는 티탄족의 바다 신 오케아노스(Oceanus)와 물의 신 테티스(Tethys)의 딸로 물의 특성을 닮아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변신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점을 이용하여 제우스가 메티스에게 '당신은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데 아주 작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느냐' 하고 꾀였다. 그러자 메티스는 아주 작은 물방울(혹은 파리)로 변했는데 제우스는 그 자리에서 변신한 메티스를 바로 집어삼켰다. 이로써 제우스는 첫째 딸 아테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고, 둘째 아들은 임신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봉쇄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의 자식들이 그렇듯이 메티스도 죽은 것이 아니라 제우스의 뱃속에 머물게 되었다. 임신 상태의 메티스는 제우스의 벳속에서 딸 아테나를 낳았고 딸을 보호하기 위해 황금 투구와 갑옷을 만들어 무장시켰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 안에서 자라며 투구와 갑옷을 입고 창을 휘두르며 밖으로 나오려 하자 제우스는 머리가 깨질 듯한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제우스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머리를 쪼개서라도 고통을 멈추게 해 달라고 했다. 헤파이스토스가 커다란 청동 도끼로 제우스의 이마를 힘껏 내리치자 갈라진 제우스의 머리 사이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창으로 완전 무장한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제우스는 패배한 티탄족을 모두 지하 감옥에 가두었으나 전쟁에서 티탄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아틀라스에게는 더 가혹하고 본보기가 되는 벌을 내렸다. 그렇게 한 배경에는 10년 전쟁 후 안정된 우주 질서를 원했던 제우스가 아틀라스로 하여금 하늘(천구)을 떠받들게 하여 우라노스가 다시 땅으로 내려앉는 혼돈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티탄족 중에서 가장 힘이 세고 맷집이 좋은 아틀라스로 하여금 하늘을 어깨로 짊어지게 하는 형벌을 내려 우주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아틀라스는 제우스에 의해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살아 있는 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황금 계단에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 조각상을 세웠던 베네치아 지도자의 생각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이런 의지와 교훈을 담고 싶었던건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스가 신의 분노를 견뎌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의 존재인 히드라를 물리치며 질서를 수호하는 것처럼 베네치아 공화국을 그런 국가로 반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또 아틀라스가 하늘을 받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듯이 베네치아의 귀족들과 지도자들이 공화국을 지탱하지 않으면 국가가 무너진다는 경각심과 자부심을 심어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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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귀족 가문의 문장


황금 계단에는 두 개의 문장이 있다. 하나는 아치형의 계단 입구 앞면 중앙에 있는 문장이고 또 하나는 입구 뒷면의 천장 바로 아래에 있다.

앞면의 문장은 1523년부터 1538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 제77대 총독을 지낸 안드레아 그리티(Andrea Gritti, 1455~1538) 가문의 문장으로 오래돼서 그런지 흐릿하고 희미하다. 그리티는 7개국 언어를 구사했던 외교관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베네치아의 신귀족 가문 중의 한 명이었으며, 68세에 도제로 선출되어 15년간 재임했다.


그리티 가문의 문장이 여기에 새겨져 있는 이유는 황금 계단을 건축가에게 처음으로 의뢰해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도제 안드레아 그리티는 1538년 자코포 산소비노에게 황금 계단 건축 프로젝트를 위탁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그리티가 죽는 바람에 흐지부지하게 묻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기초가 되었던 계단 입구의 아치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리티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아치 기둥의 임시 목재 역시 함께 존재했다. 비록 중단되었던 작업을 더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더라도 이전 도제가 시행했던 흔적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추가하는 베네치아인들의 행동이 부럽기만 하다.


정치란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의 대립과 투쟁이자 공동체의 갈등을 대화를 통해 타협하고 수용하는 공공의 활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립보다는 타협을 투쟁보다는 수용에 방점이 찍힐 때 국가와 국민이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어쩌면 그 해답은 아주 쉽게 우리들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고 배제해 버린다. 무엇 때문일까?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생각하면서 원인은 겨우 알겠으나 해법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로는 단순한 생각으로 아주 작은 것부터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여 신뢰로 승화될 수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언제 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인간사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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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되었던 황금 계단 공사를 재개한 것은 1556년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82대 도제였던 로렌초 프리울리(Lorenzo Priuli, 1489~1559)가 다시 시작했으며 그 뒤를 이어 도제 지롤라모 프리울리(Girolamo Priuli, 1486~1567)가 마무리 했다. 설계와 프로젝트는 산소비노가 다시 맡았으나 그는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죽었으며, 건축가 안토니오 압본디(Antonio Abbondi)가 이어받아 완성했다.


로렌초와 지롤라모는 형제간으로 모두 프리울리 가문이다. 그래서 프리울리 가문의 문장은 아치형 문의 뒤쪽 금빛 장식이 빛나는 천장 아래에 색감을 넣은 프레스코화로 아름답게 치장해 놓았다.

로렌초 프리울리는 산소비노에게 황금 계단 설계를 다시 의뢰했으며 산소비노는 이때 설계 변경을 하면서도 기존의 아치형 기둥은 그대로 살렸다. 그 때문에 그리티 문장도 그대로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황금 계단을 올라가는 입구에 붙은 두 가문의 문장은 조금 차이가 있다. 아치형 기둥 전면의 그리티 가문 문장은 낡고 희미한 반면에 아치형 기둥 뒷면 벽에 있는 프리울리 가문의 문장은 천연색의 현란함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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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의 화려한 스투코 장식과 프레스코화(Stucchi e affreschi)


황금 계단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면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장을 쳐다보아야 한다. 스투코 장식의 화려함과 프레스코화의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인다. 24k 순금의 금박 때문일까? 아니다. 황금색의 번쩍거림이 비록 눈을 황홀하게 만들지 몰라도 그곳에 있는 다양한 조각과 그림이 주는 예술적 감흥만은 못하다.


황금 계단을 설계한 사람은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다. 그가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면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분담시켜 완성한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이다.

입구의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 조각은 티치아노 아스페티가 만들었고, 스투코 장식은 알레산드로 비토리아(Alessandro Vittoria)가 했으며, 프레스코화는 바티스타 프랑코(Battista Franco)가 그렸다. 그리고 황금 계단은 산소비노가 살아 생전에 끝내지 못하고 안토니오 압본디(Antonio Abbondi)가 이어받아서 1559년경에 완공했다.


자코포 산소비노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조각가 안드레아 산소비노(Andrea Sansovino)의 작업장으로 들어가 조각을 공부했다. 그 영향으로 원래 이름이었던 자코포 타티(Jacopo Tatti)에서 스승의 이름을 물려받아 자코포 산소비노로 바꾸었다. 산소비노는 피렌체와 로마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코냑동맹전쟁(1526~1530) 중이던 1527년에 신성로마제국군의 일부가 로마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피해서 베네치아로 들어왔다.

베네치아에 온 산소비노는 1529년 베네치아 시의 수석 건축가이자 재산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상당액의 유급과 숙소인 아파트를 받았다. 산소비노는 죽을 때까지 베네치아 시의 수석 건축가로 있으면서 산 마르코 도서관, 조폐국, 산 마르코 종탑의 로지아 등을 건축했으며 여러 성당에 조각품들을 제작해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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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흰색 스투코 장식은 알레산드로 비토리아가 했다.

입체감을 돋보이며 살아 있는 듯한 질감이 마치 실물처럼 꿈틀대고 있다. 스투코 장식 위에 금박을 입히는 작업은 전문 도금업자(Indoratore)들이 따로 수행했다. 굉장히 얇은 순도 높은 금박을 스투코가 완전히 마르기 전후의 적절한 시점에 접착시키는 작업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했기에 숙련된 기술자가 맡았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금을 입히고 어떤 부분을 흰색으로 남겨둘지에 대한 미적인 결정은 비토리아의 권한이었다.


비토리아는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에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살에 산소비노의 공방에 들어가 조각을 수련하는 제자가 되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산소비노와 비토리아의 성격은 딴판이어서 두 사람은 종종 부딪치며 갈등을 일으켰다. 1551년경에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렀고 비토리아는 산소비노 공방을 떠나 비첸차로 간다. 이 정도면 비토리아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승의 울타리를 벗어나 비첸차로 간 비토리오는 이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위대한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를 만난 것이다. 비토리오는 팔라디오가 설계한 건축물의 내부 장식인 스투코 장식과 조각을 맡아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건축과 조각의 공간적 배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각이 건축의 일부로서 공간의 전체적인 비례에 어울리는 조화로움을 체득한 것이다. 또한 고대 유적의 그로테스크한 문양을 재현하고 정교한 회반죽 기법을 연구하여 입체적인 스투코를 완성했다. 스투코 장식에 빛을 활용하는 방법도 이 시기에 배웠다.


비토리아는 나중에 다시 베네치아로 왔으며 비첸차에서의 경험 덕분에 더 이상 산소비노의 조수가 아니라 건축의 내부 장식을 총괄 기획하는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고 황금 계단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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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프레스코화는 바티스타 프랑코가 그렸다.

그는 16세기 중반 로마, 우르비노,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화가이자 에칭 판화가였다. 에칭 판화는 금속판에 산을 부어 그 부식 작용을 이용해서 이미지를 새기는 것으로 조각칼로 금속을 파내는 동판화와는 다른 기법이다.


바티스타 프랑코는 생전에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가장 유명한 애칭은 밀가루와 관련된 이름의 일 세몰레이(Il Semolei)다. 왜 그랬는지는 연구자 간에 논란이 있다. 베네치아 출신을 강조하는 바티스타 프랑코 베네치아노(Battista Franco Veneziano)도 있다. 자신의 작품에 'B. F. V. F.'라는 이니셜을 남겼는데 이것은 '베네치아인 바티스타 프랑코가 만들었다'(Battista Franco Venetus Fecit)는 의미다. 잠바티스타 프랑코(Giambattista Franco)는 그의 세례명인 조반니 바티스타 프랑코(Giovanni Battista Franco)의 조반니(Giovanni)와 바티스타(Battista)를 합쳐서 잠바티스타(Giambattista)라 부른 것이다. 여기서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바티스타 프랑코로 표기한다.


바티스타가 그린 프레스코화는 비토리아가 만든 정교한 스투코 틀 안에 마치 패널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그가 이곳에 그린 그림의 주제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넵튠(Neptune)과 미의 여신 비너스(Venus)를 비롯하여 정의를 상징하는 칼과 저울을 든 여인, 평화를 의미하는 올리브 가지를 든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스투코 장식의 좁은 공간이나 테두리에는 반인반수의 동물과 식물의 덩굴, 대칭을 이루는 꽃무늬를 세밀하게 그려넣었다.


천장의 장식과 그림은 밝고 깨끗하지만 그것을 보는 내 눈은 흐릿하다.

선명하고 자세하게 보고 싶지만 모든 것이 애매하다. 노안을 탓하랴, 근시를 탓하랴. 그도 저도 아닌 세월을 탓하랴. 내게 있는 카메라의 망원렌즈로 당겨서 볼 수 있으니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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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체스코 세갈라(Francesco Segala)의 풍요와 자비(L'Abbondanza e La Carità) 조각상


황금 계단은 두 개의 구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첫 번째 구간은 2층 로지아에서 프란체스코 세갈라의 조각상까지 20개의 계단이고, 두 번째 구간은 세갈레의 조각상에서 3층까지 16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나이 든 도제와 정부 관리들이 한꺼번에 오르기 힘들어서 중간에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일까?


뭐래도 좋다. 계단을 오르다 중간 지점의 평면에서 나도 잠시 쉰다. 그리고 양쪽 벽에 있는 니치(Niche) 속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본다. 니치는 건축에서 조각상을 두기 위해 벽면을 움푹 파낸 공간으로 벽감이라 한다. 계단을 올라갈 때 왼쪽 벽감에 있는 것이 풍요(L'Abbondanza)의 조각상이고 오른쪽 벽감에 있는 것은 자비(La Carità)의 조각상이다. 벽감 그 자체만으로도 멋을 내서 아름답게 꾸몄는데 벽감 속의 조각상은 팔등신의 미를 자랑하고 있다.


'풍요'의 조각상은 고대 로마의 풍요와 번영의 여신인 아분단티아(Abundantia)를 형상화하고 있다. 왼손에는 곡물과 과일, 꽃 등이 가득 담긴 길쭉한 풍요의 뿔(Cornucopia)을 들고 있다. 그런데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반쯤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무심하 지나면 보이지도 않을 작은 흠이겠지만 내 눈에는 옥의 티처럼 거슬린다.


'자비'의 조각상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향주삼덕의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사랑을 의미한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은 '사랑과 자비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 것일까?' 이다.

기독교의 향주삼덕은 라틴어로 믿음(Fides), 희망(Spes), 사랑(Caritas)이다. 이것을 한국 개신교 성경에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번역했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추상적이다. 우리들은 사랑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 인식하고 있지만 예술가들은 그것을 도상학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따라서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웃 사랑'의 의미를 눈에 보이는 시각적 개념으로 바꾼 것이 자비 혹은 박애이며 그것을 형상화했다. 그림이나 조각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여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DSC_4598.JPG '풍요'(L'Abbondanza)의 조각상
DSC_4596.JPG '자비'(La Carità)의 조각상



계단 위에 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100년이 지나고 500년이 지나고 아니 1,000년 이상이 지나도곡 보는 사람이 아름답게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아름다움의 순수함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원초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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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다. 내 눈을 의심케 만드는 역설이다.


황금 계단을 완전히 발가벗긴 나체를 보는 것 같다. 꾸밈새 하나 없는 단순함과 무미건조함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야릇한 쾌감으로 다가온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가 떠오른다. 여주인공 나스타샤가 백치인 미시킨 공작에게 이끌렸던 사랑이 이런 것이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싶었으나 결국 그것은 백치라는 역설에 직면한다. 타락한 현실에서 순수한 인간은 존재하기 어렵듯이 어쩌면 완전한 아름다움도 이상일지 모른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전해졌던 쾌감은 이내 풀이 죽고 만다. 원초적 본능 만큼이나 펄떡거리던 숨 가쁜 광기는 무색의 단조로운 흥미를 더 이상 넘지 못했다. 황금 계단 위의 4층으로 가는 보통 계단은 그래서 아치 위에 걸린 무채색의 문장만큼이나 서럽고 짠해서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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