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두칼레 궁전에 있는 정부 기관의 방은 황금 계단을 올라가면 3층과 4층에 있다. 3층은 사각의 방(Sala delle Quattro Porte)으로 들어가고, 4층은 무기고(Armoury)로 들어간다. 그런데 3층 사각의 방은 2023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약 2년 동안 복원 작업을 하느라고 폐쇄했다가 최근에 다시 개방했다. 그로 인해 2025년에 정부 기관의 방을 구경하는 관광객의 관람 동선은 복잡해졌다. 3층으로 들어가서 구경한 후에 4층으로 올라갔고 다시 3층으로 내려가서 구경하는 우회로 구조였다.
사각의 방 복원 공사를 마친 현재는 원래 동선대로 관람이 바뀌었고 사각의 방에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스투코 장식과 틴토레토의 프레스코 천장화를 비롯하여 4개의 문 위에 있는 조각상을 구경하면서 시작한다. 따라서 여기서 설명하는 관람 동선은 2025년의 상황이므로 다소 다를 수 있지만 내가 본 순서에 따라 설명했으며 사각의 방은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제외되었다.
1) 프리모 피아노(Primo Piano, 한국식 3층)
두칼레 궁전의 3층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도제와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외국 대사를 만나고 귀족들이 모여서 국가 정책을 논의하던 외교와 행정의 중심부였다. 사각의 방, 안티콜레조의 방, 콜레조의 방, 원로원의 방과 대평의회의 방, 투표의 방 등이 있었다.
# 안티콜레조의 방(Sala dell'Anticollegio)
안티콜레조의 방으로 들어간다. 크고 화려한 궁전 건물에 비해 방의 크기는 작다. 콜레조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도 바로 앞에 보일 정도다. 베네치아인들의 실용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효율성을 높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모든 회의는 효율적이지 못하면 지루해지고 능률성이 떨어진다. '회의(會議)가 회의(懷疑)를 낳는다.'고 했다. 회의가 비효율적으로 진행되거나 지루하게 공전되면 결국 본질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다.
ㅣ틴토레토의 4가지 우화(Le quattro allegorie di Tintoretto)ㅣ
안티콜레조의 방은 콜레조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대기실로 외국의 대사와 사절단 등 주요 국빈들이 베네치아의 도제나 고위 관리들을 접견하기 전에 대기하던 공간이었다. 이 방은 1574년 화재로 훼손된 것을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설계로 재건하였으며 방안에는 틴토레토와 베로네세의 그림이 걸려 있다. 1578년에 틴토레토가 그린 4가지 우화는 신화 속의 인물인 미네르바와 마르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불칸과 키클롭스, 머큐리를 주제로 했다. 우화는 상징성을 담고 있는데 이 그림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빌려서 베네치아 정부의 권위와 미덕을 찬양하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ㅣ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에우로페의 납치(Ratto di Europa)ㅣ
창문에서 마주보는 방 모서리의 벽에 커다란 대작이 걸려 있다. 베로네세가 그린 에우로페의 납치(Ratto di Europa)로 1576년에서 1580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의 내용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제2권 끝부분에 나오는 에우로페의 이야기다. 신화 속의 이야기는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화가들은 그 주제로 다양한 그림들을 그렸다. 에우로페의 납치는 서양 미술사에서 많은 화가들이 주제로 삼고 그림을 그렸던 내용이다.
티레(Tyre)의 왕 아게노르(Agenor)와 왕비 텔레파사(Telephassa) 사이에서 태어난 에우로페 공주는 매혹적일 만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에우로페에게 반한 제우스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하얀 황소로 변신을 해서 접근한다. 해변을 거닐며 꽃을 따고 있었던 에우로페 앞에 눈처럼 하얀 빛을 내는 황소가 아주 온순하게 다가와 조용히 눕거나 꽃향기를 맡고 있었다. 에우로페는 하얀 황소의 아름다움과 온순함에 반해 황소의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급기야 황소의 등 위에 올라탔다. 에우로페가 등에 올라타자마자 황소로 변신했던 제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해변을 달려 바다로 뛰어들었고 파도를 가르며 쏜살같이 크레타 섬으로 데려갔다.
섬에 도착한 제우스는 황소의 모습에서 본래의 신성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에우로페와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에우로페는 크레타 섬에서 제우스의 세 아들을 낳았는데 미노스, 라다만티스, 사르페돈이다. 그후 에우로페는 크레타의 왕 아스테리우스와 결혼하고 자신의 세 아들을 입양시킨다. 크레타의 왕이 슬하에 자식이 없이 죽자 입양되었던 에우로페의 세 아들은 치열한 왕위 다툼을 벌인 끝에 미노스가 왕권을 차지한다.
유럽(Europe)이라는 대륙의 명칭은 신화 속의 에우로페(Europe)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북서쪽 대륙에 유럽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사람은 아낙시만드로스였다. 기원전 6세기경에 밀레투스 학파의 철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아낙시만드로스가 제작한 지도에 강과 바다를 경계로 하여 유럽(Europe), 아시아(Asia), 리비아(Libya)라는 3대륙으로 나눈 것이 그 시초였다. 리비아는 지금의 아프리카다.
# 콜레조의 방(Sala del Collegio)
콜레조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책을 결정하고 행정을 집행하던 기구로 도제와 내각의 고위 관리인 사비(Savi)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사비를 번역하면 '현자들'이지만 단순히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여러 방면에서 국정 경험을 쌓은 경력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제도는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도 매우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공화국이지만 오늘날의 공화국 개념과는 달리 엄밀히 말하면 귀족 중심의 과두제다. 베네치아 공화국을 대표하는 종신 도제는 아주 복잡한 과정을 통해 선출하지만 권력을 도제에게 집중시키지 않았다. 국가 조직은 행정, 사법, 군사 등 여러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위원회는 일정 기간 동안 순환하는 대표를 뽑아서 위원회의 운영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큰틀에서 살펴본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 제도는 다음과 같다.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는 국가 최고의 주권 기구로 입법부에 해당한다. 베네치아 귀족 가문의 25세 이상 남성 약 1,000~2,000명으로 구성되어 모든 공직자를 선출하며 법률 제정의 최종적인 승인을 담당했으며 범죄자에 대한 사면권도 가졌다.
콜레조의 방에는 시뇨리아(Signoria)라는 헌법 제도의 최고 의사결정 위원회가 있었다. 위원회는 베네치아 최고 지도자 도제를 비롯하여 베네치아를 구성하는 6개 구역에서 선출된 소평의회 위원 6명과 40인 위원회 대표 3명으로 구성된 10인 회의체로 다수결에 의해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다. 해당 의제는 그대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으로 넘어가 다시 한번 더 투표를 거쳐 최종 결정되었는데 때로는 시뇨리아의 결정이 원로원에서 뒤집히는 경우도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통치 회의체인 시뇨리아 위원들은 매일 콜레조의 방에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는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 시뇨리아를 보좌하는 실무 행정 기구가 콜레조를 구성하는 사비 16명이었다. 사비들은 세 부문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교와 정무 전반을 관장하는 사비 그란디(Savi Grandi) 6명, 본토 방어와 군사를 담당하는 사비 디 테라마레(Savi di Terraferma) 5명, 해상 및 해군을 관장하는 사비 알리 오르디니(Savi agli Ordini) 5명이 그것이다.
베네치아의 최고 통치자는 도제였지만 실질적인 국가의 통치는 도제를 비롯한 여러 위원회의 대표들이 모여 결정하는 집단지도 체제였다. 시뇨리아라는 제도적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도제는 죽어도, 시뇨리아는 영원하다"(Se l'è morto il Doge, no l'è morta la Signoria)"는 말을 했다고 한다.
1604년에 그린 피에트로 말롬브라(Pietro Malombra)의 베네치아에서의 스페인 대사 알현(La Sala del Colegio de Venecia)은 그 당시 콜레조의 방에서 진행되었던 의전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중앙에 도제를 비롯한 시뇨리아 위원들이 앉아 있고 양 측면에 놓인 의자에는 시뇨리아를 보좌하는 사비 16명이 앉아 있다. 시뇨리아 10명은 금색과 붉은색, 자주색의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으며 16명의 사비들은 검은색 의상을 입고 있다. 스페인 대사는 중앙에 서 있는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다. 이 그림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ㅣ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레판토 승리에 감사하는 도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봉헌화(Votivo del doge Sebastiano Venier per la vittoria di Lepanto)ㅣ
콜레조의 방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단상에는 시뇨리아들이 앉았던 의자가 그대로 놓여 있고 단상의 벽에 있는 베로네세의 그림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 1604년 피에트로 말롬브라가 그린 그림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다.
베로네세 그림의 하단은 무릎을 꿇고 투구를 벗은 채 기도하는 도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모습이고 그림의 상단에는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습이다. 그림의 중앙에 보이는 불타는 함선들은 레판토 해전을 그리고 있다.
레판토 해전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코린트만 입구에 있는 레판토 근해에서 일어난 전투로 베네치아 공화국과 스페인 왕국을 포함한 신성 동맹 함대와 오스만 제국의 함대 간에 벌어진 해전이다. 레판토 해전의 승패를 가른 것은 베네치아가 투입한 거대한 함포선 갈레아스 6척이었다. 양쪽 진영의 수백 척 갤리선에도 불구하고 갤리선보다 큰 배에 강력한 대포를 사방에 배치한 갈레아스 6척은 오스만 함대를 초토화시켰다. 당시 베네치아 도제였던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Sebastiano Venier)는 7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함대를 직접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이런 모습은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떠오게 한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영웅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다.
레판토 해전에는 소설 『돈 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도 스페인 왕국의 마르케사(Marquesa) 호에 탑승해서 싸웠는데 이때 가슴에 두 발, 왼손에 한 발씩의 화승총을 맞았다. 다행히 가슴의 상처는 빠르게 치유가 되었으나 왼손은 영영 불구가 되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레판토의 외팔이(El Manco de Lepanto)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세르반테스는 시칠리아의 메시나 시립 병원에서 6개월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 다시 군으로 복귀하여 나바리노, 코르푸, 튀니스 해상 원정과 비제르트와 라 콜레타 지역 방어에 참여했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돈 키호테처럼 말이다.
5년의 군생활을 마친 세르반테스는 1575년 9월 나폴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는 솔(Sol) 호를 탔다. 얄궂은 운명인가? 귀국하는 길에 당시 지중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마미 아르나우트(Mami Arnaute) 해적에게 납치되었고 세르반테스는 해적선 선장의 부하인 달리 마미(Dalí Mamí)에게 넘겨져 알제리로 끌려갔다.
그는 알제리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네 차례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네 번째는 무장한 프리깃함을 한 척 구입해서 기독교인 포로 60여 명을 데리고 탈출하려는 담대한 계획이었으나 밀고자 후안 블랑코의 배신으로 무산되었다. 그것을 지켜본 알제리 통치자 하산 파샤(Hasán Bajá)는 세르반테스의 탈출 계획이 매우 대담하고 또 그 용기에 놀랐다. 단순히 혼자만의 탈출이 아니라 집단적인 탈출 계획에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하산 파샤는 달리 마미에게 500에스쿠도를 주고 세르반테스를 사서 지하 감옥에 쇠사슬을 묶어 가두었다.
그 후 세르반테스는 다행히도 1580년 9월에 가족과 삼위일체 수도회의 수도사가 모금하여 모은 돈 500에스쿠도(Escudos d'oro)를 하산 파샤에게 지불하고 풀려났다. 세르반테스의 몸값으로 에스쿠도를 요구한 것은 당시 스페인의 기축 통화가 에스쿠도인 금화였기 때문이다. 1에스쿠도는 순도 91.7%의 22캐럿 순금으로 만든 금화로 무게가 약 3.38g이었다. 그것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2026년 2월 현재 한국의 금 시세로 g당 24 캐럿은 230,213원이고 22 캐럿은 211,029원이다. 따라서 3.38g x 500 = 1.69kg이므로 1690g x 211,029원 = 356,639,010원이다. 대략 3억6천만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던 것이다.
ㅣ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가 그린 천장화ㅣ
콜레조의 방으로 들어가는 바닥은 울긋불긋한 점박이 무늬의 붉은 대리석이 그대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는 눈높이에는 단순하지만 정교하게 장식된 목재 판넬과 금박 조각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목재로 장식된 벽면의 윗 부분과 천장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하여금 최고의 예술성을 뽐내도록 꾸며놓았다. 그림의 내용도 신화와 해전의 장면을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성으로 연결시켰다.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외국 사절단에게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내국의 고위 관리들에게는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천장화는 베로네세가 1575년에서 1578년 사이에 완성했다. 그림의 핵심 주제는 중앙의 직사각형 패널에 들어 있는 세 개의 그림이다. 문 입구의 천장에 있는 그림은 산 마르코 종탑을 배경으로 전쟁의 신 마르스와 바다의 신 넵툰을 그렸다. 이것은 베네치아의 군사적 강성함과 해상 지배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의 타원형 패널에 그려진 그림은 기독교적 신앙을 의미한다. 정치와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의 수단이 되기도 했고 목적이 되기도 한다. 산 마르코의 유해를 모시면서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베네치아는 종교적 신성함과 정당성을 국가적 이미지로 내세웠다.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는 내부적으로는 국민들을 단합시키고 외부적으로는 신의 선택을 받은 정의로운 공화국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제가 앉는 단상 위의 천장에는 베네치아가 정의와 평화를 바탕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정치적인 이상을 담고 있다.
모든 그림은 그것이 담고 있는 문화적인 배경을 알고 있으면 50% 이상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시각적 의도와 그림을 보는 사람의 감각적 인식과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콜레조의 방을 예술적으로 화려하게 장식함으로써 스스로 패권과 자부심을 과시하고 외국의 사절단에게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위압감을 통해서 베네치아의 부와 국력을 느끼길 원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과 문화가 가지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ㅣ24시간제 시계(Orologio a ventiquattro ore)ㅣ
콜레조의 방에 있는 24시간제 시계는 틴토레토가 그린 그림들 사이에 마치 또 다른 그림처럼 놓여져 있다. 두칼레 궁전은 1574년과 1577년에 각각 화재가 발생했다. 1574년 5월 11일 화재는 궁전 내에서 진행되던 개보수 작업 과정에서 화재가 일어나 사각의 방과 안티콜레조의 방 등이 피해를 입었다.
1577년 12월 20일에 발생한 대화재는 대평의회의 방과 투표의 방 등을 불태우고 납으로된 궁전의 지붕이 녹아내릴 정도로 파괴적인 화재였다. 이때 불의 시작은 투표의 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화재로 궁전에 있던 여러 건축물과 수많은 미술품, 조각품들이 소실되거나 훼손되고 말았다. 베네치아 정부는 화재 이후에 대규모 재건 사업을 벌였으며 당대의 최고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건물을 복구하고 소실된 옛 그림을 대체하는 작업을 했다. 그야말로 옛것을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새것으로 복구하는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24시간제 시계는 틴토레토의 성모 앞의 도제 안드레아 그리티(Il doge Andrea Gritti dinanzi alla Vergine col Bambino)와 부활한 그리스도 앞의 도제 알비세 모체니고(Il doge Alvise Mocenigo dinanzi al Cristo risorto)라는 두 개의 봉헌화 그림 사이에 있다. 도제들이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은 시간의 영속성과 통치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도제가 통치하는 베네치아는 아마도 신의 가호 아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시계는 원로원의 방에 있는 시계와 서로 맞닿은 공유의 벽에 걸려 있다. 콜레조의 방과 원로원의 방을 벽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은 두 기관의 업무 연관성이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내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의제를 결정하는 공간적인 분리가 시간이라는 연결성을 통해 시공간이 같아지는 느낌이다. 콜레조의 방에 있는 시계는 방의 전체적인 위치에서 보았을 대 가장 시선이 잘 머무는 중앙 지점에 있다.
시계를 만든 사람은 아르세날레의 서기였던 라파엘레 펜진(Raffaele Penzin)이다. 화재 이전에도 이 방에는 시계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화재 이전에는 벽면을 스투코 장식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을 가능성이 크고 화재 이후에는 목재 틀을 짜서 벽면을 만든 후에 그 위에 캔버스 유화를 거는 방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시계는 화재 이후에 설치했을 것으로 본다.
라파엘레 펜진의 시계는 실제로 정교하게 작동되도록 계계식으로 만든 시계였으며 현재도 복원 과정을 거쳐 전시용으로 관리되고 있다. 시계는 아래 사진에서 오른쪽의 원형 모양이 24시간제 시계이다. 보고서도 왜 사진으로 찍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ㅣ안토니오 다 폰테(Antonio da Ponte)가 설계한 대리석 벽난로ㅣ
시계가 있는 맞은편 벽에 벽난로가 있다. 벽난로의 설계는 건축가 안토니오 다 폰테가 했으며, 벽난로 위에는 지롤라모 캄파냐(Girolamo Campagna)가 조각한 헤라클레스와 머큐리 상이 있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불굴의 용기와 군사적인 힘을 상징하고, 머큐리는 전령의 신이자 상업의 신으로 베네치아의 핵심인 해상 무역을 통한 상업적인 부를 상징한다. 하나의 조각품에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이치가 어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으랴.
평범한 일상 속에 일어나는 하잘 것 없는 일들도 알고 보면 그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무의미해 보여도 무의미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미술가나 음악가가 창의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더라도 최소한의 의미를 부여한다. 거대하게 종교적이나 철학적인 관점이 아니어도 좋다.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생활의 경험이더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마음 속에서 느낀 감정의 의미를 담으면 족하지 않은가? 그래서 세상에 어떤 의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헤라클레스와 머큐리의 남자 조각상 위에 세 명의 여성 조각상이 있다. 그것은 신화 속의 인물도 아니고 어떤 사람을 형상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 의미는 작가가 스스로 부여할 수도 있고 훗날 그것을 보는 사람이 곁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매사에 무슨 의미를 던지서 자기화하려는 경향성이 있다는 점이다.
# 원로원의 방(Sala del Senato)
원로원의 방은 콜레조의 방 바로 옆에 있으며 규모는 원로원의 방이 훨씬 크다. 아무래도 많은 인원수를 수용하기 위해서 넓은 방 구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방의 특이한 점은 사방 벽에 2단 혹은 3단으로 된 긴 나무 벤치가 이어져 둘러싸고 있다. 수백 명의 전문성을 지닌 베네치아 엘리트들이 모여 치열하게 토론하고 의사 결정을 표결하는 대회의장인 만큼 최소한의 배려를 남겨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베네치아의 원로원이 하는 일은 외국에 보낼 대사를 임명하고 대사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검토하여 대외 정책을 결정했으며,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대한 선전포고나 평화 조약 체결 등의 결정을 내렸다. 그 이외에도 해상 무역 항로를 관리하고 함대의 운영과 상업 규정을 감독했으며 국가 예산을 심의하고 경제 정책을 수립했다. 이 정도면 국가의 중요한 정책들이 모두 원로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네치아의 원로원은 오직 귀족 가문으로만 구성되었다. 매년 대평의회에서 120명을 선출하며 임기는 1년이고 재선이 가능했다. 이들을 프레가디(Pregadi)라고 부르는 선출직 의원이다. 번역하면 '요청받은 자들'이란 뜻이다. 그 이외에 당연직 의원으로 도제와 6인 소위원회, 10인 위원회, 40인 위원회의 위원들과 각 부서의 실무 보좌진들이 참여했다. 실무 보좌진들은 자신들이 담당하는 업무에 따라 발언의 차이가 있었지만 정책과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사비(Savii), 예산 편성과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카메를렌기(Camerlenghi), 사법의 법적 적합성을 검토하고 감시하는 아보가도리(Avogadori)들도 꼭 참석했다.
ㅣ야코포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의 죽은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도제 피에트로 란도와 마르칸토니오 트레비산(Cristo morto adorato dai dogi Pietro Lando e Marcantonio Trevisan)ㅣ
원로원의 방 중앙 단상 뒤쪽 벽면에 걸린 대형 그림은 틴토레토와 그의 협력자들이 함께 그린 '죽은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도제 피에트로 란도와 마르칸토니오 트레비산'이다. 그림의 중앙에 십자가에서 내려진 죽은 그리스도가 있고 양옆으로 두 명의 전임 도제인 피에트로 란도와 마르칸토니오 트레비산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림을 보면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든다. 1세기에 죽은 예수를 중앙에 두고 어떻게 16세기를 살고 있는 두 도제가 같은 시공간적으로 배치를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림이니까 가능하겠지만 화가가 그렇게 한 숨은 이유는 있게 마련이다.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로 연결된 영원한 기독교적인 공화국상을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원로원의 방은 국가의 최종적인 정책 결정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어떤 안건이 투표를 거쳐 결정이 되면 때로는 국가의 생멸과 존립을 좌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로원은 개개인의 책무가 막중하고 엄중한 장소다. 그런 의미에서 방의 중요한 위치인 도제의 뒤쪽에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예수의 시신을 정중앙에 둔 것은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림의 배치는 당신의 결정이 신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어쩌면 종교적인 압박인지도 모르겠다.
ㅣ팔마 일 조바네(Jacopo Palma il Giovane)의 구세주 앞에 기도하는 도제 로렌초와 지롤라모 프리울리(I dogi Lorenzo e Girolamo Priuli in preghiera davanti al Redentore)ㅣ
원로원의 방에서 도제가 앉는 단상 맞은편은 남쪽 문으로 사각의 방으로 가는 문이다. 문 위에 도제를 지냈던 프리울리 형제가 구세주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16세기 후반 베네치아 회화를 이끌던 팔마 일 조바네가 그렸다.
로렌초 프리울리(Lorenzo Priuli, 1489~1559)는 베네치아 공화국 제82대 도제였으며, 지롤라모 프리울리(Girolamo Priuli, 1486~1567)는 제83대 도제를 역임했다. 지롤라모와 로렌초는 형제간으로 동생이 먼저 도제를 지냈고 형이 나중에 도제를 했다. 특히 지롤라모의 재임 기간 중에는 베네치아에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지롤라모는 그 역병을 퇴치하고자 분주히 대응하는 와중에 뇌졸증으로 죽었다. 한편 지롤라모의 아들 안토니오 프리울리(Antonio Priuli, 1548~1623)도 제94대 도제를 지냄으로써 프리울리 가문은 세 명의 도제를 낼 정도로 명문 귀족이었다.
ㅣ팔마 일 조바네(Jacopo Palma il Giovane)의 캉브레 동맹에 대한 승리의 우화(Allegoria della vittoria sulla Lega di Cambrai)ㅣ
원로원의 방 서쪽 문 위를 장식하고 있는 작품은 '캉브레 동맹에 대한 승리의 우화'다. 이 그림은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큰 위기였던 캉브레 동맹 전쟁을 극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다.
캉브레 동맹은 중세시대에 전쟁을 위한 이해관계국간의 연합이었다. 영토 확장 전쟁이 일상적인 시대에 이해 당사국간의 합종연행과 이합집산은 필연적이었다. 중국의 기원전 춘추전국시대에도 그렇지 않았던가?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현재 이탈리아라는 단일 국가의 이름이 생기기 전 중세시대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수많은 국가가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사보이아 공국, 제노바 공화국, 모데나 공국, 피렌체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 교황령,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샤르데냐 왕국 등으로 난립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인 고구려, 신라, 백제는 여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셈이다.
캉브레 동맹은 1507년 교황 율리오 2세 때 베네치아가 점령하고 있는 도시들을 반환하라고 요청했으나 베네치아가 이를 거부하자 1508년 12월에 교황령, 프랑스, 아라곤, 신성로마제국 등이 체결한 동맹이다. 동맹국은 베네치아를 정복한 후 그 점령지를 동맹국들간에 서로 분할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동맹국들은 각국의 지역에서 베네치아를 침공했다. 1509년 5월 베네치아는 프랑스 루이 12세와 맞붙은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의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군이 패배하면서 북부 지역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 한편 교황 율리오 2세는 라벤나를 점령했고 페라라 공작은 폴레시네를 차지했으며 피사 공화국은 피렌체에 항복했다. 그러나 1509년 9월의 파도바 공성전을 계기로 반격의 기회를 맞은 베네치아는 11월에 총공세에 나섰다.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베네치아는 병력과 자금난에 봉착해서 교황과 화해를 시도했다. 교황 역시 프랑스의 급격한 세력 확장에 경계심을 갖고 1510년 베네치아와 교황령은 새로운 동맹을 맺는다. 이것은 이후에 프랑스와 맞서는 신성 동맹의 태동이 되었다.
전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비극적이다.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나가고 건물은 파괴되어 잔해만 남는다. 그런 전쟁의 공포는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트라우마로 산 사람을 휘감는다. 그래서 전쟁은 일어나는 것보다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준비하고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손자병법에도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 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는 의미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해야 한다면 싸워서 백전백승을 거두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하수다.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 중의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중앙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가 서 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두 천사는 월계관을 들고 있다. 도제는 캉브레 동맹 전쟁 당시의 레오나르도 로레단(Leonardo Loredan, 1436~1521)이다. 도제 앞에는 산 마르코 사자와 칼을 든 여인이 말을 타고 방패를 든 군인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산 마르코 사자가 국가적 상징이라면 칼을 든 여인은 국민적 의지의 표현이다. 베네치아가 캉브레 동맹이라는 거대한 외세에 대항해 맞서 싸우는 상징성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과거의 전쟁을 잊지 않고 되새김질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떤 국가든지 해왔다. 전쟁을 겪은 사람은 그 공포를 알기 때문에 다시는 전쟁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고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쟁의 공포를 교훈적으로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것은 전국민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ㅣ원로원의 시계(Orologio della Sala del Senato)ㅣ
원로원의 방에는 두 개의 시계가 있다. 하나는 로마 숫자 시계(Orologio con numeri romani)이고 다른 하나는 황도십이궁 시계(Orologio con i segni dello zodiaco)이다. 서로 마주 보는 벽면에 걸려 있는 두 시계 중에서 전자는 지상의 시간을 의미하고 후자는 천상의 시간을 의미한다. 서쪽 벽에 있는 시계는 지상의 시간으로 말 그대로 인간의 시간이며 정해진 규율을 상징한다. 반면에 동쪽 벽에 있는 시계는 천상의 시간 즉, 우주의 시간을 말하며 영원성을 상징한다.
콜레조의 방이나 원로원의 방에 있는 시계는 24시간제 시계다. 베네치아는 12시간제 시계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24시간제 시계를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만의 독특한 시간 측정 방식인 이탈리아 시간(Ore Italiane) 체계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이탈리아 시간 체계에서 하루의 시작은 자정이 아니라 해 질 녁(일몰)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해가 지는 순간이 하루의 끝이자 24시였고 시간은 그때부터 다시 새로운 하루의 시간이 1, 2, 3, 4....로 시작된다. 그런데 일몰 시간은 항상 변동적이어서 계절에 따라 매일 달라진다. 요즘으로 보면 매우 불편한 체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사용했던 까닭은 바다를 무대로 하는 해상 국가였기 때문이다.
항구에 배가 들어오고 나갈 때 밀물과 썰물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베네치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반도의 나라였기에 조수 간만의 차가 컸다. 따라서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의한 조석 현상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서 하루를 끊임 없이 보여주는 24시간제 시계가 필요했다.
로마 숫자 시계의 부족한 면을 보완해 주는 것이 황도십이궁 시계였다. 이 시계는 달의 모양과 태양을 위치를 함께 보여주고 있어서 사람들은 황도십이궁 시계를 보면서 '달이 보름이나 그믐이니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사리구나' 하고 생각하고, 혹은 '달이 반달인 상현이나 하현이니 물때의 변화가 적은 조금이구나' 하고 판단하게 된다.
원로원의 방에 있는 시계는 어쩌면 아주 평범한 모양의 장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관심 없이 보다가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것을 보면서도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물은 인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ㅣ원로원의 방에 있는 천장화ㅣ
원로원의 방 천장에는 틴토레토의 그림이 있다. 그림은 틴토레토 혼자서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도메니코 로부스티와 공방 작업실의 화가들까지 참여해서 만들었다.
천장화의 중앙에 있는 큰 그림의 제목은 바다의 여왕으로서 베네치아의 승리(Trionfo di Venezia come regina dei mari)다. 그림의 중앙 위쪽에 왕관을 쓴 여성이 앉아 있고 주변에는 신화적인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여성은 베네치아를 상징한다.
그림은 사실성과 추상성을 결합하어 이미지화된 작품이다. 사실성은 보이는 그대로 그리면 되지만 추상성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 대체해야 한다. 가령 국가, 사랑, 행복, 희망 등의 추상명사를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의인화된 대상에 대한 암묵적이고 사회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바다의 여왕으로서 베네치아의 승리'에서 여성상이 베네치아라는 의인화를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네치아는 바다 위에 건설된 도시였기에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를 연상하여 자신들의 도시와 서로 연결시키고 바다를 지배하는 존재로 묘사해 왔다. 다음으로 베네치아는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았지만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정복되지 않은 순수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언어의 고전적인 전통성을 따르는 것으로 고대 로마 이래로 도시와 국가, 정의, 자유 등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였다. 특히 베네치아는 스스로 아드리아해의 여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려면 그림 아래로 가서 고개를 뒤로 확 젖혀야 한다. 보는 방향도 왕관을 쓴 여성상을 위로 두고 보아야 전체적인 그림의 시선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사람과 구름 그리고 빛의 흐름이 정적이 아니라 동적인 리듬을 가진다. 그림 때문은 아니겠지만 순간적으로 그림을 보는 내가 휘청거리며 어지럽다. 멀리 떨어져서 보는 것이 오히려 나을까? 조명 불빛이 그림에 반사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다.
중앙에 있는 '바다의 여왕으로서 베네치아의 승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개의 작은 그림들이 패널화로 그려져 있다. 그 내용은 정의, 평화, 풍요, 승리, 종교 등을 담고 있다. 물론 그런 의미를 담은 내용으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의뢰를 했겠지만 그보다는 아기자기한 배열로 그림을 세심하게 그려나간 화가들의 열정이 대단해 보인다.
원로원의 방을 나가는데 벽화와 창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이한 것은 아니지만 괴상해 보이고 몽환적이지는 않지만 환상적이다. 빛이 주는 묘함이 그런 것일까? 그로테스크한 장식으로 눈에 비치는 현실이 마치 춤추고 있는 벽화 그림처럼 나의 여행도 하나의 그림이 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