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2) 세콘도 피아노(Secondo Piano, 한국식 4층)
정부 기관의 방들이 있는 두칼레 궁전의 3층은 정치와 행정의 방들이 있는 곳이라면 4층은 사법과 국가 안보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모인 곳이다. 10인 위원회는 국가 수호를 위한 안보와 반역, 음모 등을 감시하고 사건을 심리하는 비밀 기관이며 무기고는 국가 방위를 준비하는 무기와 갑옷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3층 원로원의 방을 구경하고 4층으로 올라갔다.
# 10인 위원회의 방(Sala del Consiglio dei Dieci)
10인 위원회는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국가 안보 기관이었다. 우리나라의 국가정보원과 같은 기구이다. 이 위원회가 설립된 배경은 1310년에 발생한 귀족의 반란인 티에폴로 음모(Congiura del Tiepolo) 때문이었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의 성장으로 상업을 통해 부를 쌓은 신흥 귀족들이 등장했다. 이에 구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을 지키고 권력 독점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1297년 2월 28일 베네치아 공화국 대평의회에서 승인된 개혁 법률안 세라타 델 마조르 콘실리오(Serrata del Maggior Consiglio)다. 번역하면 '대평의회 폐쇄'지만 실제 의미는 대평의회 구성원을 세습화하는 것이었다. 즉,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 귀족들의 대평의회 진입을 엄격히 심사하고 승인함으로써 사실상 위원회 진출을 막았던 법안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티에폴로, 바도에르, 케리니 가문이 무장 세력을 규합하여 1310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며 그 사건을 계기로 10인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ㅣ마르코 베첼리오(Marco Vecellio)의 볼로냐의 평화(La Pace di Bologna, 1529)ㅣ
마르코 베첼리오가 그린 '볼로냐 평화 협정'은 1529년 볼로냐에서 체결된 평화 협정과 1530년 거행된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그림의 중에 있는 두 사람이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황제 카를 5세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16세기 유럽은 중세 봉건 질서가 붕괴되고 근대 국가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전환기였으며, 종교개혁으로 인해 정치와 종교가 강하게 충돌하던 시기였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1,000년 동안 유럽의 영토와 정치 지형은 혼란 그 자체였다. 프랑크 왕국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유럽에는 중세 봉건제도가 뿌리를 내렸지만 왕국과 공국, 선제후국, 제후국 간에는 끊임없는 영토 전쟁으로 팽창과 재편이 이루어졌다. 또한 8차례의 주요한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소년 십자군, 북방 십자군, 알비 십자군 등 부수적인 십자군 전쟁이 벌어진 시기였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 간의 대립과 분열이 지속되었으며, 절대 왕정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근대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시기 유럽의 상황을 보면 합스부르크 왕국에서 분열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16세기 카를 5세 때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봉건 귀족의 몰락, 절대 왕권의 부상, 민족 의식의 형성으로 독립 국가로 성장하는 기틀이 마련된다. 신성 로마 제국은 분열되어 수백 개의 제후국으로 나누어지고 종교개혁은 국가 간의 정치적 분열을 가져왔다.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교황령을 비롯한 수많은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쉴레이만 1세에 이르러 국력과 영토의 최선성기를 이루며 유럽을 위협한다.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1529년 볼로냐 평화 협정(Pace di Bologna)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사이에 벌어진 유럽의 영토 팽창 전쟁에서 카를 5세가 승리하면서 캉브레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황제 카를 5세가 볼로냐에서 회담을 갖고 평화 협정을 서명한 후 교황이 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대관식을 가졌던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이 그림이 왜 두칼레 궁전의 10인 위원회의 방에 걸려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림 속의 중앙 아래쪽에 쓰여진 '이탈리아의 안보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옛 베네토인들의 오래된 경건함이 더해졌다.'(Ad italiae secvritatem firmandam accessit Prisca venetorvm pietas)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황과 황제의 평화 회담을 중재했던 중재자였다.
ㅣ마르코 베첼리오(Marco Vecellio)의 동방박사의 경배(Adorazione dei Magi)ㅣ
10인 위원회의 방 정면으로 보이는 위원들의 좌석이 있었을 벽면에 있는 그림이다. 마르코 베첼리오와 그의 화파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의 중앙에 흰 옷을 입은 사람과 오른쪽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이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주로 마구간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그림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베네치아 회화의 미술 양식이라는 특징과 궁전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 때문이다. 당시 베네치아 회화는 인물보다 자연 풍경을 웅장하게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그림이 놓여질 궁전이라는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 공화국의 권위가 집결된 곳인 만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는 행사로 묘사를 했다.
ㅣ이름을 알 수 없는 그림들ㅣ
10인 위원회의 방에는 벽면에 있는 그림과 천장에 있는 그림들이 많이 있다. 그림은 분명히 누군가 그렸기에 화가의 이름이 있을 것이고 그림에 대한 이름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림을 보면서도 그런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아는 지식이 없다는 반증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ㅣ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산 마르코 프레미아 레 비르투(San Marco premia le virtù)ㅣ
10인 위원회의 방에 있는 천장화로 그림 이름을 번역하면 '덕에 왕관을 씌워주는 산 마르코'다. 번역이 뭔가 매끄럽지 못하고 이상하지만 그 정도로 하자.
베로네세가 1556년에 그린 그림으로 천상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인 산 마르코가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있는 덕으로 의인화된 사람에게 금색 왕관을 씌워주려는 장면이다. 그 말은 결국 수호성인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람들이 도덕적 정당성과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 성 마르크 레콩상송 레 베르투스(Saint Marc récompensant les vertus)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림이 프랑스로 간 이유는 간단하다. 179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점령했을 때 베네치아를 비롯한 점령 지역의 많은 미술품과 유물들을 프랑스로 가져갔는데 이 천장화도 그때 강제로 떼어내서 이듬해에 파리로 가져 갔고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 정부는 약탈한 문화재들을 되돌려 주기도 했으나 '덕에 왕관을 씌워주는 산 마르코'는 파손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돌려주지 않았다.
10인 위원회의 방 천장에 있는 그림은 복제본이다.
덤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 하자.
나폴레옹 군대가 이때 가져간 베로네세의 또 다른 작품으로 가나에서의 결혼식(Les Noces de Cana)이 있다. '가나에서의 결혼식'은 원래 1563년에 그려서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 식당 벽에 걸려 있었으나 1798년 나폴레옹 군대가 약탈해서 파리로 가져갔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몰락한 후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정부에게 베네치아에서 약탈해 간 예술품 반환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예술품 중 일부는 반환하고 일부는 돌려줄 수 없다고 했는데 '가나에서의 결혼식'은 그림이 너무 크서 이동할 때 훼손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림 크기가 무려 가로 9.94m, 세로 6.77m의 대작이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대신에 같은 베로네세의 작품인 시몬의 집에서의 식사(Le Repas chez Simon)를 반환하겠다고 해서 오스트리아는 그 그림으로 돌려 받았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베네치아가 약탈 당한 예술품을 왜 오스트리아가 돌려받은 것일까?
그 이유는 프랑스 공화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경유지에 있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되어 몰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국력이 쇠퇴하여 힘이 없던 시기였기도 하지만 두 나라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1797년 10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 벨기에)와 베네치아령의 이오니아 제도(코르푸, 잔테, 케팔로니아 등)를 받았고,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아드리아해 영토인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그리고 자라 공국을 차지했다. 이로써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전성기에는 이스트리아해와 지중해를 주름잡으며 연안 지역을 지배했던 강성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국력이 쇠퇴하여 이제는 팔 다리 다 잘리고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역사를 보면 세계사의 흐름은 참으로 냉혹하고 냉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대국이 지배하는 힘의 논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똑 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본다. 약소국은 맥없이 주저앉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토는 토막이 나고 만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로 잡을 힘이 없다. 그래서 국력은 언제나 중요하다. 국가가 힘을 가지지 못하면 국민은 입이 열 개, 백 개라도 할 말을 못한다. 어느 나라의 역사든지 한 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는 것은 국민의 책임이라기 보다 위정자의 책임이 클 때가 많다. 물론 그런 위정자를 뽑는 국민의 책임도 적을 수는 없다. 우리의 자식들이 풍요롭고 강건한 나라를 이어받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자각과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가나에서의 결혼식(Les Noces de Cana) 현재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 맞은편에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