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 베네치아 초기 76명의 도제들 초상화(Ritratti dei primi settantasei dogi di Venezia)
대평의회의 방(Sala del Maggior Consiglio)에는 베네치아 도제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도제의 초상화는 천장 바로 아래의 정면을 제외한 3면에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관공서에 가면 역대 장관이나 시장의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는 것과 같다. 그림의 크기가 마치 액자 속에 넣은 듯이 작은 그림이어서 다른 큰 그림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많은 도제들의 얼굴을 그려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지고 보라. 그러면 당신의 눈에도 그 얼굴들이 들어올 것이다.
대평의회의 방에서 많은 사람들은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와 베로네세(Paolo Veronese)가 그린 벽화와 천장화를 찾으려고 한다. 물론 그 그림들은 휼륭하고 중요하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보거나 또는 고개를 90도로 젖혀서 천장을 쳐다보면 16세기 베네치아를 풍미했던 유명한 화가들의 열정을 당신의 가슴에 담고 가게 된다.
하지만 빼놓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 초기 76명의 도제들 초상화다.
대평의회의 방의 넓은 공간에 도제들의 초상화는 어디에 있을까? 벽면의 가장 윗부분인 천장과 맞닿은 프리즈(Frieze) 구역에 베네치아 초기 76명의 도제들 초상화가 있다. 하나의 프레임에 두 명씩의 도제를 그렸고 각각의 도제들은 이름과 업적을 기리는 라틴어 명문이 적힌 두루마리(Cartiglio)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 이 방에는 더 오래된 초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1577년 대화재로 인해 방이 소실되면서 기존의 작품들도 모두 사라졌다. 현재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도제의 초상화는 화재 이후 재건 과정에서 틴토레토와 그의 조수들과 감바라토 등에 의해서 1577년부터 1584년 사이에 다시 그려진 것이다. 초상화의 배치는 대평의회의 방 동쪽에 있는 트리부나(Tribuna)에서 안뜰이 있는 북쪽 벽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서쪽 벽을 거쳐 석호가 있는 남쪽 벽에서 끝난다. 이곳에는 76명의 도제 초상화가 있다.
ㅣ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선출 방법ㅣ
베네치아 도제는 공화국을 통치하는 최고 지도자로 1,000년의 역사 동안에 120명의 도제들이 선출되어 베네치아 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도제의 선출은 대평의회의 방에서 진행되었으며 추첨(Sorteggio)과 투표(Scrutinio)를 통한 여러 과정을 거치는 매우 복잡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베네치아 도제는 국민에 의한 직접 선거제라기 보다는 귀족에 의한 간접 선거제로 선출되는 제도였다.
도제 선출 과정은 총 10단계로 이루어졌으며 이런 제도는 1268년부터 정착되어 베네치아 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단계는 전임 도제가 죽고 장례가 끝나면 대평의회가 소집된다. 소집된 평의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의원이 산 마르코 광장으로 나가서 8세에서 10세 사이의 어린 소년을 한 명 선택한다. 이렇게 선택된 아이를 발로티노(Ballottino)라고 하는데 '추첨을 돕는 소년'이란 뜻이다. 이 소년은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대평의회 의장 곁에 서서 투표함 속의 공(Ballotta)을 하나씩 무작위로 꺼내서 의원들에게 주거나 이름을 호명하는 역할을 했다. 소년이 잡은 공에 의해서 대평의회 구성원 가운데 30명을 뽑힌다. 이때 같은 가문이나 혈연 관계가 겹치면 배제했다.
왜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제를 선출하면서 첫 번째로 어린 소년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어린 아이가 가장 순수하고 청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어린 소년을 도제를 선출하는 당일 아침에 산 마르코 광장으로 나가서 선발하기 때문에 특정 귀족에게 미리 매수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발로티노는 도제 선거가 끝난 후에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도제의 개인 비서나 보조자로 임명되어 궁전에서 함께 생활을 했다. 그래서 귀족이 아닌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발로티노를 뽑히면 향후 안정적인 공직 생활을 보장받는 경로가 되었다.
제2단계는 발로티노가 뽑은 30명의 평의원들이 모여서 9명을 다시 추첨한다.
제3단계는 9명의 평의원이 투표를 통해서 40명을 선출한다. 이때 9명 중 7명 이상의 동의가 있는 사람만 선택이 된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가능한 인물들이 추려지는 것이다.
제4단계는 선출된 40명이 다시 추첨을 하여 12명만 남긴다. 투표를 통한 40명의 정치적인 선택을 다시 추첨을 통해 우연성을 흔들어버림으로써 특정 귀족이 다음 단계를 장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제5단계는 12명의 평의원이 다시 투표를 하여서 25명을 선출한다. 이때는 통상적으로 12명 중 9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제6단계는 투표로 선출된 25명의 평의원들 가운데서 다시 추첨을 해서 9명을 뽑는다.
제7단계는 9명이 다시 투표를 해서 45명를 선출한다. 여기서도 역시 9명 중 7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다.
제8단계는 선출된 45명에서 다시 추첨을 통해 11명으로 줄인다.
제9단계는 남은 11명이 투표를 하여 최종적인 41명의 선거인단을 선출한다. 이 단계에서는 11명 중에서 9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과정들은 도제 선출에 있어서 사전에 특정 귀족의 개입을 철저히 막으려는 방법이었다. 추첨과 투표를 반복하면서 우연성을 배제하고 선거인단 수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방식으로 다음 단계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편이었다.
제10단계는 41명의 선거인단이 도제 후보를 놓고 투표를 한다. 이전까지는 도제를 선출할 투표자를 뽑는 과정이었다면 최종적인 41명의 투표는 실제로 도제를 선출하는 과정인 셈이다. 41명의 선거인단이 투표한 도제는 최종적으로 25표 이상을 얻어야 선출되었다. 이것은 과반수보다 높은 약 61%의 찬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을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선거의 핵심인 25/41 규칙이라 한다.
아무튼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고 할지라도 이 제도는 사실상 귀족들에 의한 간접 선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나나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라도 특정 귀족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다.
ㅣ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 1274~1355) 도제의 검은 베일(Damnatio Memoriae)ㅣ
도제의 초상화 중에서 유독 한 곳에만 인물화 대신에 검은 베일(Damnatio Memoriae)을 그렸다. 이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적 기록에서 영원히 지워지는 기록말살형으로 '기억의 저주'를 의미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베네치아 제55대 도제였던 마리노 팔리에로다.
팔리에로는 1354년 9월 11일 도제에 임명되어 1355년 4월 15일 참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다. 참수형은 도제로 있으면서 독재 권력을 유지하고자 셀프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팔리에로가 베네치아 도제로 선출될 때 이미 그의 나이는 80살이었다. 그런 그가 왜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팔리에로는 쿠데타를 일으킨 유죄를 인정하고 참수형을 당했으며 공모한 주동자 10명은 산마르코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단순 가담자는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종신형의 도제를 무사히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일설에 따르면 귀족들이 팔리에로의 어린 아내를 조롱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다.
대평의회의 방 벽에 걸린 팔리에로의 자리에는 인물화 대신 검은색 수의에 다음과 같은 라틴어 비문이 쓰여져 있다.
Hic est locus Marini Faletro, decapitati pro criminibus
이곳은 범죄로 참수된 마리노 팔리에로를 위한 공간이다.
ㅣ베네치아 공화국에 쿠데타가 일어나다.ㅣ
베네치아 공화국은 왕이 세운 국가가 아니라 서로마 제국의 붕괴와 롬바르드족의 침입을 피해 석호로 이주한 난민 공동체였다. 건국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 도제가 있었지만 여러 귀족 가문들이 특정 가문이 세습 군주처럼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정부 기구도 철처하게 분산을 시켰고 선출된 도제 역시 독자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없도록 서로 감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항시 존재하는 것 같다. 베네치아 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는 체제 전복을 획책하는 쿠데타를 겪으면서 반국가적인 행위를 방지하고 처벌하기 위해 10인 위원회를 만들었다. 반국가적 사범을 다루는 만큼 10인 위원회는 매우 무서운 정부 조직 기구였다. 공화국의 반체제 인사를 색출하고 재판하는 기구였으므로 범죄인에게는 공적으로 고문도 허용되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예전의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와 같은 조직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에 10인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1310년 7월 10일이며, 피에트로 그라데니고(Pietro Gradenigo, 1251~1311)가 도제로 있을 때였다.
그라데니고는 왜 이런 무서운 정부 조직을 만들었을까?
피에트로 그라데니고는 베네치아 공화국 제49대 도제로 38살에 선출되어 22년간 재직했다. 오랜 시간 동안 도제로 재임했지만 국내외적으로 성과 있는 업적은 별로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두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졌다. 해상 무역의 지배권을 두고 1294년부터 시작된 제노바와의 전쟁은 1298년 쿠르졸라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듬해에 서로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베네치아의 해상 지배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1308년부터 시작된 페라라와 전쟁이다. 이 전쟁은 페라라 통제권을 두고 베네치아와 페라라 에스테 가문과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페라라는 왕위 계승을 두고 프란체스코가 로마 교황청에 지원 요청함으로써 베네치아는 교황청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 초기에는 베네치아가 우세했으나 1309년 8월 마르코 케리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가 패배하면서 전세는 기울고 말았다. 또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파문하는 것으로 맞섰다. 중세시대 교황의 파문령은 종교적인 형벌의 하나였지만 파문된 나라나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격리되어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살해의 위험까지 초래하는 것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겪었던 카노사의 굴욕(L'umiliazione di Canossa) 역시 황제가 교황의 파문령에 굴복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결국 1313년 조약을 체결하는데 페라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페라라를 교황령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대내적으로는 대평의회의 구성원 자격을 귀족으로 세습화시키는 법령을 공포했다.
세라타 델 마조르 콘실리오(Serrata del Maggior Consiglio)가 그것인데 1296년 3월에 법안을 상정하여 한 차례 거부되었으나 1297년 2월에 다시 올린 법안이 대평의회에서 승인되었다. '대평의회 폐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법안은 대평의회 구성원을 귀족 가문으로만 세습시키는 귀족 공화제의 확립을 의미했다. 사실 그 이전에 베네치아 공화국에는 시민과 귀족의 총회인 자유민 의회(Concio)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시오를 바꾸려고 하는 귀족들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번번히 거부되었는데 결국 세라타 델 마조르 콘실리오에 의해서 평민의 대평의회 진입은 막히고 말았다.
평민의 대평의회 진입이 법안에 의해 막히고 평민들이 대평의회에서 점차적으로 축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00년 마린 보코니오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사전에 첩보가 누설되어 실패했으며 보코니오와 반란에 가담한 11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참여자는 도망쳐서 죽음을 면했다.
반란은 그 이후에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귀족이었다. 1310년 6월 15일 발생한 바자몬테 티에폴로, 마르코 케리니, 바도에로 바도에르가 주동이 된 반란이었다. 도제인 피에트로 그라데니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모의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반란의 주동자였던 티에폴로는 가문의 선조가 이미 2번이나 총독을 역임한 신흥 귀족이었다. 바자몬테 티에폴로의 할아버지 로렌초 티에폴로(Lorenzo Tiepolo)는 제46대 총독이었으며 증조할아버지 야코포 티에폴로(Jacopo Tiepolo)는 제43대 총독을 지냈다. 그런데 티에폴로의 반란에는 상당수의 신흥 귀족과 성직자, 평민의 지원이 있었다.
그 이유가 뭘까?
반란의 불을 지핀 촉발점은 1297년 귀족의 세습화를 명문화한 세라타 델 마조르 콘실리오의 승인과 페라라와 전쟁(1308~1313)이었다. 세라타 델 마조르 콘실리오는 대평의회의 구성원을 귀족 가문으로 세습화함으로써 평민의 진출을 막는 폐쇄(Serrata) 법안이었다. 일정한 임기를 마친 평민들이 더 이상 대평의회의 구성원 되지 못하자 반발하였던 것이다. 베네치아와 페라라와 전쟁은 초기의 양상과는 달리 베네치아와 교황청과의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네치아 성직자들이 피에트로 그라데니고 총독의 정책에 불만을 제기하면서 의견 대립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또 다른 원인은 귀족 가문 간의 대립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베네치아는 다양한 귀족 가문이 형성되었다. 최초에 베네치아로 이동하여 터전을 가꾼 귀족을 전통 귀족이라 한다면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귀족을 신흥 귀족이라 불렀다. 신흥 귀족은 여러 부류가 있었는데 부유한 상인으로 귀족이 되었거나 나라에 공을 세워서 귀족이 된 사람, 베네치아를 위해 타국에서 지원하고 도와줘서 귀족이 된 가문들이 있었다. 이런 다양한 귀족 가문들이 때때로 대립하면서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귀족 가문이 정치를 하는 귀족 공화정이었다. 전제군주제는 아니었지만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대단했으므로 귀족 가문간의 알력은 결국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반란에 함께 참여한 마르코 케리니, 바도에로 바도에르 역시 베네치아 귀족 가문이었다. 마르코 케리니는 티에폴로의 장인으로 페라라 전쟁에 참전하여 포로로 잡혔을 때 그라데니고 정부의 인사들은 한동안 그의 석방을 요구하지 않은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 케리니는 이때 65세의 고령이어서 젊고 평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사위 티에폴로를 앞세웠다. 한편 바도에로 바도에르는 마르코 케리니의 아내 마리아의 형제였다. 따라서 세 사람은 이미 결혼을 통한 가문간의 혈연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그라데니고 총독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도 내면적으로 존재했다. 특히 귀족 가문간의 대립은 각자의 가문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상호간에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하지만 티에폴로의 반란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불행하게도 두칼레 궁전을 점령하기 위해 세 가문이 병력을 이끌고 각 지역에서 출발했으나 폭우 등의 기상 악화로 이동하는 발걸음이 지체되었다. 반면에 한 평민으로부터 티에폴로의 반란 첩보를 전해들은 그라데니고 도제는 신속하게 무장한 군사들을 소집했다. 반란군과 진압군의 전투는 산마르코 광장에서 벌어졌다. 산마르코 광장에 먼저 도착한 마르코 케리니와 그의 아들 베네데토의 병력은 진압군과 싸우다 부자가 함께 죽었고 지휘관을 잃은 반란군은 흩어지고 말았다.
티에폴로의 반란군은 마르코 케리니보다 늦게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동했다. 산마르코 종탑 근처의 산 바소 교회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진압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티에폴로의 반란군은 진압군에 밀려 리알토 시장으로 후퇴했다. 한편 바도에르 반란군은 베네치아로 가는 석호에서 그라데니고 진압군에 의해 맥없이 격파당했고 바도에르는 포로로 잡혔다.
반란군의 기세를 꺾은 그라데니고 도제는 잡히지 않은 티에폴로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티에폴로와 가담자들이 베네치아를 떠나 북부 이탈리아의 정해진 지역에서 4년간 망명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도제의 협상을 받아들인 티에폴로의 망명은 돌아올 수 없는 유배길이 되었고 결국 그곳에서 암살되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바도에르와 가담자들은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티에폴로의 반란을 수습한 그라데니고는 1310년 7월 10일 정부 조직 기구로 10인 위원회를 설립했다. 망명한 반란자들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한시적으로 구성된 10인 위원회였지만 그후 국가의 안전과 정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보안과 감찰 기관으로 반국가적 사범을 다루는 기구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으며 1797년 베네치아가 몰락하는 순간까지 유지되었던 정부 조직 기구였다.
10인 위원회의 임시 기구가 정부의 상설 기구로 승격된 배경에는 마리노 팔리에로의 쿠데타도 한 몫했을 것이다.
1355년 4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였던 마리노 팔리에로가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 사실을 사전에 알아채고 막았던 조직이 바로 10인 위원회다. 팔리에로의 쿠데타는 준비와 실행 모두가 매우 어수룩했다. 쿠데타의 이유로 자신의 어린 아내를 모욕한 귀족에 대한 복수가 발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배 귀족들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고 자신은 베네치아 공작이 되려고 했다니 논리적 공감대가 너무나 빈약하다. 무엇보다도 팔리에로는 10인 위원회의 3명의 수장(Capi)까지 역임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팔리에로가 자신이 몸을 담았던 10인 위원회의 권력과 정보력을 모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던 것일까? 어쩌면 80살의 노욕이 빚은 참극인지도 모르겠다.
ㅣ이후의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들 초상화ㅣ
대평의회의 방을 채운 도제의 초상화는 다시 옆에 있는 선거 개표의 방으로 이어진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는 모두 120명이었다. 그런데 대평의회의 방과 선거 개표의 방에 있는 도제들의 초상화는 그 수와 일치하지 않는다. 도제의 전체적인 수가 120명임에도 불구하고 두 방에 그려진 초상화의 수가 다른 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변방의 영토로 라벤나 총독령(Esarcato di Ravenna)에 속했다. 8세기 중반의 이 시기는 아직 독립된 공화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된 마기스트리 밀리툼(Magistri militum)이라는 군사령관이 1년 임기로 통치했다.
그런데 베네치아 옛 연대기에 따르면 마기스트리 밀리툼이 통치하기 이전에 이미 세 명의 도제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파울루치오 아나페스토(Paoluccio Anafesto, 697~717), 마르첼로 테갈리아노(Marcello Tegalliano, 717~726), 오르소 이파토(Orso Ipato, 726~737) 등이다.
아나페스토에 대해서는 실존 여부를 두고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수 의견은 전설적인 인물로 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첫 번째 도제로 기록하고 있다. 테갈리아노 역시 실존 여부를 알 수 있는 실증적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에 이파토는 역사적 사료상으로도 실재가 확인되는 최초의 통치자로 귀족 회의의 선거를 통해 도제로 선출되었다. 이파토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는데 727년 롬바르드 왕국의 리우트프란드 왕이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를 점령하자 80척의 함대를 이끌고 가서 탈환을 한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이파토(Ipato)라는 칭호를 주는데 그것은 집정관(Hypatos)이란 뜻이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레오 3세의 성상 파괴 정책으로 인한 분열과 에라클레아(Eraclea)와 에킬리오(Equilio, 현재 예솔로) 사이의 귀족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여서 이파토는 737년 에킬리오 귀족 가문에 의해서 살해된다.
이를 계기로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의 도제 제도를 폐지하고 제국에서 파견된 마기스트리 밀리툼(Magistri militum)이 1년 임기로 통치했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5년 후에 다시 도제를 선출하는데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 테오다토 이파토(Teodato Ipato)가 되었다. 그는 이전에 마기스트리 밀리툼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755년 갈라 가울로(Galla Gaulo)의 반란으로 폐위되고 눈이 멀게 되는 형벌을 받는다. 사필귀정일까? 갈라 가울로도 1년 후에 도메니코 모네가리오(Domenico Monegario)에 의해 똑 같은 상황에 처한다.
ㅣ오르소 오르세올로(Orso Orseolo)와 도메니코 오르세올로(Domenico Orseolo)는 도제인가, 아닌가?ㅣ
그후 시간이 흘러서 11세기 초에 오토네 오르세올로가 18살의 나이에 최연소 도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가 도제로 있을 때 이미 공동으로 섭정을 하였고, 도제로 선출된 이후에는 가문의 형제들을 교회의 중요한 요직(총대주교와 주교 등)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베네치아 귀족들은 오르세올로 가문의 세습화와 국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이유로 거세게 반발하였다. 아퀼레이아와 그라도의 분쟁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베네치아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1026년 도메니코 플라바니코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 귀족들이 민심을 선동하여 대규모 봉기을 일으켰다. 이때 오토네는 반대파들에게 체포되어 도제의 권위인 수염이 깎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되었다. 오르토가 추방된 이후 잠시의 공백 상태를 그라도(Grado)의 총대주교였던 오르소 오르세올로(Orso Orseolo)가 맡았으나 정치가 안정되자 정식적으로 도제가 선출될 수 있도록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 도제로는 피에트로 첸트라니코가 선출되었다.
첸트라니코는 도제로 선출되어 재임하는 6년 동안에 뚜렷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는 오히려 국제적인 압박 속에 고립된 외교적 상황에 처해졌고 그로 인한 내부적인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때 오르세올로 가문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추방된 오토네의 복위를 주장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도제 피에트로 첸트라니코는 실각되었다. 그라도의 총대주교였던 오르소는 오토네를 복귀시키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베네치아 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리고 오토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약 14개월 동안 도제의 권한을 대행하며 베네치아를 다스렸다. 그러나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오토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오토네의 사망으로 오르세올로 가문의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오르소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오르세올로 가문의 도메니코 오르세올로(Domenico Orseolo)가 1032년에 도제를 계승하려고 했다. 귀족들의 선출 과정을 생략한 채 도제가 되려고 하자 다른 귀족들이 결집하여 하룻만에 도메니코를 축출하였고 그는 라벤나로 도망을 갔다.
오르소와 도메니코는 귀족들의 선출에 의해서 도제가 된 것이 아니라 섭정이나 찬탈로 도제가 되었기에 두칼레 궁전의 대평의회의 방이나 선거 개표의 방에는 그들의 초상화가 없다. 다만 코레르 박물관의 전시물이나 후대에 만들어진 '도제 연속 초상 시리즈'에는 포함되는 경우가 있었다. 두 사람의 초상화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글귀가 적혀 있다.
오르소 오르세올로의 초상화에는,
'그라도 총대주교인 형이 대신 통치하고 있을 때, 오토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Ottone fratre supplente patriarcha Gradensis ab exilio defunctum comperit esse.)
도메니코 오르세올로의 초상화에는,
'나는 한 사람의 후계자를 이어 도제가 되었으나 단 하루 동안 통치하였다.'(Unius ab haerede rexi una luce duc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