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상하게도 감옥이 두칼레 궁전 안에 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상을 뛰어넘는 발상이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그것은 두칼레 궁전이 도제가 거주하는 궁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입법, 행정, 사법, 국가 안보 기관이 모두 모여 있는 종합 정부 청사이기 때문이었다. 궁전 안의 정부 기관에서 죄인을 체포하고 심문하며 재판을 통해 판결이 내려진 후에 죄수를 즉시 구금하거나 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감옥을 궁전 안에 두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궁전 안의 감옥은 처음에는 포찌(Pozzi)와 피옴비(Piombi)라는 구감옥이 있었다. 포찌는 우물이란 뜻이지만 궁전의 지하 1층에 있는 지하 감옥을 말하며 어둡고 빛이 전혀 들지 않았고 습기가 가득했으며 때로는 바닷물이 들어차기도 했다. 이곳에는 흉악범이나 하층민 죄수들이 수감되었다. 피옴비는 납이란 뜻으로 궁전의 지붕 납판 아래에 있는 지붕 감옥을 말하며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주로 정치범이나 비교적 신분이 높은 죄수들이 수감되었다.
16세기 후반에 들어 베네치아 정부는 궁전 내부의 감옥이 비위생적이고 화재 위험이 크다는 판단하에 운하 건너편에 별도의 감옥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고 신감옥(Prigioni Nuove)을 건설했다. 이때 궁전과 신감옥을 연결하는 통로가 1600년경에 만들어진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다.
죄수들이 탄식의 다리를 건너 신감옥으로 가는 통로는 일반적으로는 형사 콰란티아의 방(Sala della Quarantia Criminale)을 나가서 좁은 복도를 지나는 것이었고, 국사범의 경우에는 10인 위원회의 방(Sala del Consiglio dei Dieci)에서 같은 통로로 나갔다. 이것은 죄수들이 이동할 때 일반 관료나 시민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죄수들만 다니는 내부의 폐쇄된 통로만을 이용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길은 통로가 좁고 차가운 돌벽에다가 창문도 없는 그런 길이어서 죄수들에게도 상당한 심리적인 압박을 주었다.
법률 감독관의 방(Sala del Magistrato alle Leggi)에서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가는 한두 개의 좁은 계단으로 내려가면 형사 콰란티아의 방(Sala della Quarantia Criminale)이 나온다.
# 형사 콰란티아의 방(Sala della Quarantia Criminale)
형사 콰란티아의 방은 사법 기관의 하나로 40인 위원회가 살인, 폭행 등 주요 형사 사건을 담당하는 법원이었다.
이 방의 정면에 놓인 세 개의 의자는 형사 재판의 수장인 카피(Capi)가 앉는 자리로 이들은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해 40인의 위원들 중에서 선출된 3명의 의장단을 의미한다. 임기는 보통 2개월로 짧았으나 해당 기관을 대표하며 재판의 진행을 주재하고 판결 절차를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ㅣ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피에타(Pietà)ㅣ
형사 콰란티아의 방 정면에 보이는 3개의 의자 위에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본래 두칼레 궁전 내부에 있는 산 니콜로 예배당(Cappella di San Nicolò)을 장식하기 위해 의뢰된 작품이었다. 산 니콜로 예배당은 궁전을 개조하면서 도제의 개인 예배당(Chiesetta del Doge)으로 변모되었으며 조반니 벨리니의 피에타 역시 형사 콰란티아의 방으로 옮겨졌다.
ㅣ피에트로 말롬브라(Pietro Malombra)의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리알토의 산 자코모 교회에 면죄부를 부여하다(Papa Alessandro III concede l’indulgenza alla chiesa di San Giacomo di Rialto)ㅣ
형사 콰란티아의 방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 왼쪽 벽에 있는 그림으로 피에트로 말롬브라가 17세기 초에 그렸다. 그림의 주제는 1177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베네치아 평화(Pace di Venezia) 조약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갈등하던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베네치아로 피신했을 때 베네치아는 교황을 머물게 하고 보호해 주었다 교황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리알토의 산 자코모 교회(Chiesa di San Giacomo di Rialto)에 특권과 면죄부를 부여했는데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ㅣ주세페 포르타(Giuseppe Porta)의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zione di Cristo)ㅣ
형사 콰란티아의 방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 오른쪽 벽에 있는 그림으로 살비아티(Salviati)로 알려진 주세페 포르타가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은 1560년경의 작품이다.
그는 1520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의 루카 현에 위치한 카스텔누오보 디 가르파냐나(Castelnuovo di Garfagnana)에서 태어나 1535년 로마에 있는 프란체스코 살비아티(Francesco Salviati, 1510~1563) 공방의 작업장에 들어가 견습생으로 수련했다. 1539년에는 살비아티와 함께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많은 그림 작업에 참여했다. 주세페 포르타는 그림을 사인할 때 주로 멘토인 스승의 성을 따랐기에 주세페 살비아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두칼레 궁전의 산 니콜로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프레스코화로 있던 것을 보존 문제로 떼어내서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 포르타의 화풍은 스승인 살비아티의 영향을 받아서 매너리즘(Mannerism)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림을 보면 인물의 인체 길이가 길고 과장되며 역동적인 자세와 복잡한 구도를 하고 있다.
주세페 포르타가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구도로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Basilica dei Santi Giovanni e Paolo)에 있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성인들, 그리고 봉헌자들(Resurrected Christ with Saints and Donors)의 그림은 두칼레 궁전의 주세페 포르타의 그림에서 보이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다. 특히 이 그림에서는 강한 색채 대비가 눈에 띌 정도로 돋보인다.
# 포찌(Pozzi)와 피옴비(Piombi)에 대하여
두칼레 궁전의 감옥을 구경할 때 포찌와 피옴비는 일반 투어가 아니라 특별 투어로 사전에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정식 티켓은 €40.00이고 할인 티켓은 €20.00이다. 포찌와 피옴비는 1층 안뜰(Cortile)에서 시작되지만 특별 투어를 예약하지 않는 나로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부분을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피옴비와 관련하여 카사노바가 탈옥한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1725~1798)는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8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배우로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공연했으므로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2살에 파두아 대학교에 들어가 17살에 법학 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똑똑했지만 그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카사노바는 자신이 살았던 그런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내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라는 자서전으로 저술하여 출판했다. 그 이야기 중에는 카사노바가 두칼레 궁전의 피옴비 감옥을 탈출한 사실도 서술하고 있다.
1753년 베네치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1755년 7월 26일 새벽에 공화국의 통치 기구였던 10인 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체포된다.
체포 이유는 성스러운 종교에 대한 공개적으로 모욕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사유였으며, 그 이외에 연금술, 오컬트에 심취해 귀족들을 현혹시켰다는 사기꾼 혐의와 신비주의와 관련한 금지된 서적을 소지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리메이슨(Freemasonry) 활동을 통한 비밀 결사와 귀족 등 상류층 여성들과의 도덕적 스캔들로 인해 베네치아의 엄격한 사회 질서를 해치는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는 베네치아 국립 기록 보존소(Archivio di Stato di Venezia)에 있는 1755년 당시 카사노바를 감시했던 정보원 마노치(Manuzzi)의 보고서와 10인 위원회의 판결문으로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그의 자서전 『내 인생 이야기』에서 자신의 체포는 '명백한 법적 근거가 없는 부당하고 전제적인 처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카사노바는 별도의 재판 없이 5년형을 선고받고 두칼레 궁전의 납 지붕 아래에 있는 지붕 감옥인 피옴비에 수감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피옴비는 여름에는 태양열로 납 지붕이 달궈져서 내부 온도가 40~50°C까지 치솟는 찜통 같은 더위로 기승을 부렸고, 겨울에는 차가운 냉기를 그대로 흡수하여 혹독한 추위가 몰아쳤다. 그런 열악한 환경 때문에 카사노바는 자신을 피옴비에 가둔 것 자체가 일종의 고문이자 부당한 처우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카사노바는 피옴비를 탈출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서 성공하게 된다.
카사노바는 피옴비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허점을 파고 들었다. 지붕 감옥의 외부 벽은 두꺼운 돌로 되어 있었지만 내부는 목재로 된 칸막이였으며, 지붕은 경사로 인해 천장이 매우 낮았다. 그래서 복도를 산책할 때 얻은 쇠막대기를 갈아 송곳을 만들어서 자신의 방 천장의 목재와 서까래를 뚫었다. 그리고 지붕을 덮고 있는 납판을 들어내고 밖으로 탈출했다. 당시 지붕에 있는 납판은 못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거운 무게로 눌려 있는 상태여서 힘을 쓰면 들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카사노바가 피옴비를 탈출하는데는 중요한 조력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옆방의 죄수인 성직자 마리노 발비(Marino Balbi)였다. 카사노바는 간수의 눈을 피해 구한 쇠막대기를 성경책 속에 숨겨 발비에게 전해 감옥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여 감옥의 벽과 천장을 뚫었다.
1756년 10월 31일 밤에 두 사람은 천장을 뚫고 올라가 지붕을 덮고 있던 무거운 납판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경사가 가파르고 미끄러운 지붕에서 채광창이 설치된 곳으로 기어가 창을 부수고 궁전 내부의 행정 구역으로 들어갔다. 밤이라 궁전 안의 문은 잠겨 있었고 카사노바는 탈옥을 하면서 드러워진 옷을 깨끗이 정리하여 공화국 관리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피옴비에 갇힌 귀족과 정치범들은 죄수복을 입지 않았다. 상류층 죄수들은 자신들이 체포될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으면서 감옥 생활을 했다. 또 베네치아 상류층 남성들이 입던 옷은 궁전의 행정 관리들의 평상복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카사노바와 발비는 아침이 되어 궁전 문으로 온 수위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고 수위는 그들을 궁전의 행정 관리로 생각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궁전을 나온 두 사람은 즉시 곤돌라를 타고 궁전을 벗어난 후에 다시 마차로 갈아타고 볼차노(Bolzano)와 인스브루크(Innsbruck)를 거쳐서 바이에른 선제후국(Kurfürstentum Bayern)의 수도인 뮌헨(München)으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