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04. 운하와 골목길의 풍경

by 박태근

# 거리에 무심하게 놓여진 조각품들


거리를 걷다 보면 가끔은 무심한 듯이 놓여진 조각품들을 보게 된다.

야외 박물관도 아닌데 커다란 청동상은 높다랗게 서 있으며 작고 낡은 비석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형물은 큰 것도 있지만 작은 것은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기도 하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다. 도시의 여러 곳을 다녔더라면 더 많은 조각품들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은 욕심이다. 사흘 동안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까? 시간은 정해져 있고 볼 것은 많았지만 다 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선택적 관광에 머무르고 말았다.



우물(Pozzo di Venezia)


베네치아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물은 포쪼(Pozzo)다. 번역하면 '우물'이며 복수형으로 포찌(Pozzi)라 쓴다. 포쪼는 베네치아에만 있는 특수한 건축물이어서 도시 이름을 함께 붙여 베네치아 우물(Pozzo di Venezia)이라 부른다. 배네치아는 바다 위에 도시를 형성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담수원이 없었다. 물과 공기는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로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인류 역사의 모든 문명들이 거대한 강을 끼고 발전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는 강이 아니라 바다 위에 마을을 형성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그들에게 물보다 더 절박했던 것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탈출하여 살아남는 것이었다.


물이 없는 곳에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식수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바로 빗물이었다. 포쪼는 우물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빗물을 받아서 모으는 저수조다. 우기 때 비가 내리면 빗물을 포쪼에 받아 모래층을 통해 불순물을 정화해서 떠오른 물을 식수로 사용한 것이다. 베네치아 역사가인 마리노 사누토(Marino Sanuto)의 기록에 따르면 베네치아 본섬에는 담수원이 없었으나 리도(Lido) 섬의 모래 언덕에서 빗물이 모래층을 지나면서 불순물이 여과되어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포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포쪼를 개인들이 집집마다 만들어 사용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초기에는 우리나라의 공동 우물처럼 공용 포쪼를 만들어 함께 사용했다. 포쪼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 대평의회는 1322년 도시에 50개의 포쪼를 건설하도록 했다. 포쪼는 그 후 추가적으로 건설되면서 1858년에 베네치아 공화국 시 기술국 발표에 따르면 도시 내에 건설된 포쪼 수는 모두 7,000여 개로 추정했다. 총 갯수 중에서 개인 우물이 6,046개였고 공공 우물은 180개 였으며 기존에 매설된 우물이 556개 이상이었다.


포쪼를 만드는 과정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물을 저장할 장소를 물색하고 정한 후에 5~10m의 깊이로 구덩이를 판다. 커다란 웅덩이가 만들어지면 바닥에 빗물이 모일 수 있도록 전체적인 수조를 만들고 네 곳에 이스트리아 석재로 만든 맨홀을 설치한다. 바닥의 중앙에는 단단하고 미세한 돌 실트와 모래 점토로 만든 벽돌 카란토(caranto)를 원통형으로 쌓아 지면까지 올린다. 이때 땅을 판 웅덩이는 바다의 뻘밭이기 때문에 원통형 안으로 바다의 불순물이 들어올 수 있다. 따라서 포쪼를 만들 때 다른 불순물의 이입을 막고 여과된 빗물을 담수화하는 과정이 중요한 기술이었다. 원통형이 만들어지면 빗물을 정수할 수 있도록 피아베 강에서 가져온 담수 모래를 채우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이물질이 스며들지 않도록 포장한다.


지면 위로 올라온 원통형의 포쪼 상부에는 도르래를 설치하고 줄 끝에 양동이를 달아 물을 길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를 만들 때 처음에는 단단한 벽돌이 주재료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돌, 청동 등으로 재료가 다양해졌고, 밋밋했던 상부 표면에는 주문한 사람의 문장이나 문양을 조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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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쪼의 모양이 아름답고 예술적인 것은 고르라면 단연 두칼레 궁전에 있는 것을 꼽겠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가 기거하는 곳이고 외국의 사신과 종교 지도자들이 항상 방문하는 장소인 만큼 포쪼의 모양도 한껏 멋을 부렸다. 궁전의 안뜰 중앙에 놓인 포쪼의 재료는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모양새는 거대한 항아리 같다. 원통형의 포쪼 상부에 섬세하게 만들어진 조각상들은 예술 그 자체다. 대체 어떤 숙련된 솜씨의 조각가이기에 이렇듯 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두칼레 궁전의 포쪼는 16세기 중엽에 알폰소 알베르게티(Alfonso Alberghetti) 주조소에서 제작해서 알베르게티 우물(Pozzo dell'Alberghetti)이라 부른다. 앞서도 물항아리 같다고 했지만 투박하면서도 투박하지 않고 잘록하게 들어간 곡선미는 주물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포쪼의 가운데는 비어 있는 청동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우리나라 궁궐에 놓여져 있는 '드므'로 알았다. '드므'는 궁궐의 화재를 막기 위한 벽사 시설이다. 그 속에는 물이 담겨져 있어서 작은 불을 끄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면 두칼레 궁전의 항아리도 그런 용도인가? 하지만 나중에 그것이 궁전의 물을 공급하는 우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무식함에 부끄러움이 앞섰다.


아는 것도 백지 위의 한 면이요, 모르는 것도 백지 위의 한 면이다.

안다고 백지 위를 먹물로 써내려 가지만 글을 채운다고 해서 꼭 아는 것은 아니다. 백지를 공백으로 두어도 깊은 공감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 아닐까? 생각하고 깨우치는 의미는 작은지라도 떨림을 함께 공명할 수 있다면 소소하고 소박한 앎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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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동안 베네치아인들의 식수가 되었던 포쪼는 19세기 말에 수로교가 건설되면서 하나 둘 사라졌다.

포쪼의 단점은 비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안정성이다. 빗물을 받아서 먹는 물로 담수화하는 것이 포쪼이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물 부족 현상이 발생한다. 올 가을에 우리나라 강릉에서 있었던 가뭄으로 인한 식수난 문제를 초래한 것이 그 사례다.

또 다른 단점은 아쿠아 알타의 발생으로 도시가 침수되는 경우다. 바닷물이 뭍으로 올라와 거리를 채우면 포쪼의 빗물이 들어가는 맨홀에 바닷물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그 포쪼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웅덩이를 파서 재시설하거나 파묻는 수밖에 없다.


베네치아는 베네토 실레(Sile) 강의 물줄기를 파이프로 연결하여 베네치아까지 잇는 수로교를 1884년 6월 23일 개통하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수로교가 개통되면서 포쪼를 사용하는 시민들이 줄어서 포쪼 수가 감소했다. 현재 베네치아의 식수원은 지하 300m에서 뽑아올린 지하수를 사용한다. 이를 위해 상하수도 인프라도 건설했다. 지하수는 분수대를 만들어서 물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회사가 베리타스(Veritas)다. 베리타스는 관광객들이 분수대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기 위해 앱을 만들어 식수대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나는 분수대의 물을 음용하지 않았다.

물갈이가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물을 바꿔서 배앓이를 한다면 그것은 큰 낭패로 이어진다. 매일 수퍼마켓에서 생수를 사 먹었고 여행하는 동안 어쩔 수 없는 생수 사랑이 그렇게 내내 이어졌다. 소심한 행동이었을까?



카를로 골도니(Carlo Osvaldo Goldoni) 동상


미로 같은 베네치아의 골목길을 벗어나 조금 넓은 거리로 나가니 중앙에 큰 동상이 있었다.

거리를 헤매면서 한두 번 보았던 동상 같았다.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다. 도시의 방향 감각은 자꾸만 혼미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머릿 속은 한없이 헷갈릴 뿐이다. 골목길에 있는 건물들은 높지도 않은데 시야를 막는 바람에 주변 위치에 대한 판단감이 떨어진다. 골목길에서 하늘을 보면 손바닥으로 가릴 만큼 좁다.


아!

기억난다. 이 동상. 누구일까 하고 다시 보았더니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라고 새겨져 있었다. 카를로 골도니는 18세기 이탈리아 극작가로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베네치아어로 쓴 방언을 많이 사용해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상은 안토니오 달 조토(Antonio Dal Zotto)가 1883년에 조각하여 이곳 캄포 산 바르톨로메오에 세워졌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 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다. 조각가는 조각을 남기고, 화가는 그림을 남기며, 작곡가는 음악을 남기는데 이도저도 아닌 나는 무엇을 남길까? 이 세상에 왔다가 칠십 평생을 살아도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으니 인생이 허무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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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 Arditi di Venezia 비석


베네치아 캄포 델라 게라(Campo della Guerra)에 있는 작은 광장의 소운하 계단 근처에 석비가 하나 서 있다.


석비에는 글자도 별로 없다. 정말 무심한 듯이 외롭게 서 있는 보잘 것 없는 석비가 보기보다는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여행을 하면서 많이 보고 싶고 자세히 보고 싶어도 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이 없다면 제대로 볼 수 없다. '돼지 발에 진주' 혹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이 있다. 성서 마태복음 7장 6절에 나오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글에서 비롯된 이 말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가치를 모르면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관심이 없으면 눈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내가 보고 있는 사물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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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석비에는 두 종류의 글이 쓰여져 있다.

하나는 석비 윗면에 쓰여진 'K n° 10'과 석비 하단의 '1752'이다. 'K n° 10'과 '1752'는 이 석비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면 무슨 암호처럼 난해한 이 알파벳과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1752년 베네토 지방 북부의 마르체시나(Marcesina) 고원에 있는 지금의 베네토와 트렌티노 경계선인 치피의 길(Sentiero dei Cippi)을 따라 베네치아 공화국(Serenissima)과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에 국경선이 결정되었다. 두 국가 사이의 경계선은 이미 1605년 로베레토(Rovereto) 회의에서 확정되었지만 경계석 설치를 둘러싼 이의 제기와 경계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은 이후 수십 년간 이어졌고 그 사이에 두 나라 간의 충돌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1752년 양국의 공동 측량단이 합동으로 국경선에 파견되어 최종적인 경계선을 마련하고 29개의 석비를 세웠다. 29개의 석비 중에서 경계 구간의 중요 핵심이 되는 고개나 능선의 변곡점에 특별히 4개의 중요 표식을 세웠는데 'K n° 10'이 그 중 하나였다.


여기서 'K n° 10'은 29개의 석비 중 일련번호가 'K 10번'이라는 의미다. 당시 유럽에서는 국경선을 표시하는 경계석에 알파벳과 숫자를 함께 명기했다. 그 이유는 야외에 세워진 석비가 비와 바람 등의 풍화로 마모되기 때문이다. 국경 협정 문서에도 경계 구역 표기는 알파벳 A, B, C...로, 경계석 번호는 숫자 1, 2, 3...으로 표기하여 서로 등치시켰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숫자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을 때 알파벳으로 확인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K n° 10'은 'K 구역이면서 10번째 경계석'이란 의미다. 두 국가의 K 구역은 마르체시나 고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알파벳과 숫자의 순서를 서로 등치시키면 K는 11번째가 된다. 11번째 K가 10번째 K로 된 이유는 뭘까? 정확하지 않지만 유럽의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알파벳 I와 J를 표기할 때 서로 비슷하여 혼용을 피하려고 I와 J를 하나로 보고 다음에 K를 사용했기 때문이라 한다. 국가의 문서에도 알파벳 I 다음에는 J가 아니라 K를 쓴 기록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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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석비 중앙에 낙서처럼 새겨진 작은 글자다. 이 글은 후세에 삽입된 것으로 원래의 석비를 훼손한 것이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GLI ARDITI DI VENEZIA CHE SOLO LA MORTE FERMÓ NELL’ASSALTO. I SUPERSTITI

IV XI MCMXXIX

VIII

XXIX VII MCMXVII

'베네치아의 아르디티, 오직 죽음만이 공격을 멈췄다. 생존자들'

1929년 11월 4일은 기념비를 설치한 날이고, 8은 파시즘 8년이며, 1917년 7월 29일은 부대 창설일을 말한다.


베네치아의 국경에 세워져 있던 경계석이 졸지에 치포의 전사자 기념비(monumento ai caduti a cippo)로 둔갑하여 베네치아로 끌려온 것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한 사건으로 촉발된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며 이합집산으로 연합하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동맹국의 위치였지만 전쟁 중에 연합국으로 쏠렸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삼국동맹을 배신한 이탈리아 왕국을 징벌하기 위해 1916년 5월 아시아고를 공격했다. 징벌전쟁이라는 뜻의 스트라프 원정(Srafexpedition)은 그렇게 해서 붙여진 것이다. 전투는 아시아고 고원, 몬테 피오르, 아르체시나에서 벌어졌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이탈리아군은 초반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패전하면서 후퇴하였으나 점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전선을 끝까지 사수했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 열세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결국 아시아고 전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전쟁기념비는 아르체시나에서 전투를 했던 이탈리아 왕립군 특수 돌격 부대의 보병인 아르디티 군을 기리기 위해 그곳에 있던 경계석을 가져와 비문을 적은 것이다. 이탈리아군은 아시아고 전투에서 약 146,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Stele del Pane(빵 비석)


베네치아 칸나레지오 지구의 소토포르테고 팔리에에 있는 산티 아포스톨리의 운하쪽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으며 모두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선명하다. 회색의 이스트리아 석판에 글을 새겨 세운 이 비석은 1727년 베네치아 공화국 제112대 도제였던 알비세 세바스티아노 모체니고(Alvise Sebastiano Mocenigo, 1662~1732)가 불법적인 빵 판매를 금지하기 위해 공화국 시민들에게 공포한 공고문이다.


석비에는 도제의 공고문 내용을 세금 담당 종신 재판관이 공포하는 형식으로 적혀 있다. 처음에는 원문과 번역문을 모두 옮겨 적었으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이 있을까 싶어서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도시 내에서 불법적으로 빵을 제조하거나 판매하다가 적발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태형, 징역, 갤리선 노역, 25두카트의 벌금에 처해졌으며, 만약에 제빵업자가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정해진 벌금의 두 배를 징수하도록 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빵은 반드시 제빵 조합 규정에 따라 인증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밀수품으로 간주되어 행위에 관련된 사람은 25두카트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알비세 세바스티아노 모체니고 도제가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전매권을 통한 세수 확보, 빵의 품질관리와 가격 통제, 그리고 제빵 길드 체제의 유지를 위한 조치였다. 그렇다 보니 불법 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가혹했다. 태형으로 '밧줄형 고문'인 스트라파도(Strappado)가 행해졌는데 이것은 범죄인의 양손을 등 뒤로 묶고 밧줄을 천장의 도르래에 연결하여 몸을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내렸다 하는 형벌이었다. 스트라파도를 당한 죄인은 어깨 관절이 탈구되거나 심하면 근육과 신경이 손상되어 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갤리선 노역은 벌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나 신체가 건강한 남성의 경우에 집행되었다. 왜냐하면 25두카트의 벌금은 당시만 해도 서민들의 수년 치 급여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현재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금 함량 기준(1두카트는 약 3.545g의 순금)으로 계산할 때 약 10.5유로이며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1,800만 원이다.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조정의 결정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길거리와 저자거리에 써 붙였던 방(榜)과 같았던 이 비석의 공고문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높여주고 잘 지키라는 의미였겠지만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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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사르피(Paolo Sarpi) 동상


여행을 하면서 궁금한 것이 어디 한두 개 일까마는 베네치아에서는 캄포(Campo)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광장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거리를 말할 때도 캄포는 끼어들었다. 산마르코 광장처럼 피아자(Piazza)는 분명하게 광장으로 해석했다. 피아자와 캄포 그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넓고 큰 광장을 피아자라 하고, 좁고 작은 광장을 캄포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캄포 산타 포스카(Campo Santa Fosca)에 가면 파올로 사르피(Paolo Sarpi)의 동상이 있다. 두 손을 배 앞에 포개고 얼굴은 앞을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우수에 깃든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왜일까?

파올로 사르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학자이자 신학자였으며 갈릴레오와 친구로 지냈다. 그는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자유주의자였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지지한 매우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이런 의식은 로마 교황청과 맞서는 매우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베네치아는 1605년에 공화국의 동의 없이 교회나 교회 공동체 설립을 금지하는 법과 교회의 사제와 종교 단체의 재산 취득을 금지하는 법을 원로원에서 제정했다. 1606년에는 두 성직자가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서 체포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자 로마 교황청은 교회법에 따라 베네치아를 파문하고 교황 금지령을 내렸다. 이때 베네치아를 대표해서 교황청과 맞선 사람이 파올로 사르피였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교황청은 1607년 1월 사르피를 파문했다. 심지어 그를 죽이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암살자를 보냈다. 중세시대 교회에서의 파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큰 형벌이지만 교황은 사르피에게 파문도 모자라 마녀사냥까지 시작한 것이다.


1607년 9월 교황과 그의 초카 추기경은 사르피를 암살하기 위해 로틸리오 올란디니를 보냈다. 불행하게도 암살자는 사전에 음모가 발각되어 베네치아 공화국에 들어오는 순간 체포되었다. 암살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교황은 1607년 10월 다시 암살자를 보냈고 사르피는 이곳 캄포 산타 포스카(Campo Santa Fosca)에서 암살자가 가진 무섭게 생긴 스틸레토 단검에 세 차례 찔려 쓰러졌다. 행운의 여신이 지켜준 탓일까? 사르피는 다행히 살아날 수 있었다.


동상은 사르피가 암살자에 의해서 칼에 찔렸던 장소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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