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운하와 골목길의 풍경
# 슈퍼마켓도 미술관이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먹을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칸나레지오 지구에 있는 테아트로 이탈리아 데스파르(Teatro Italia Despar)로 베네치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슈퍼라고 했다. 밖에서 보면 전혀 마켓 같지 않다. 주변 건물에 비해 다소 독특한 모습이어서 쉽게 눈에 들어올 뿐 그저 평범한 건물이다. 건물 외양은 신고딕과 아르누보 양식이라는데 오히려 내게는 그 용어가 더 어렵다.
테아트로 이탈리아는 1916년에 짓기 시작하여 2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1915년 건축가 조반니 사르디(Giovanni Sardi)가 했다고 하지만 그는 1913년에 요산혈증(Uricemia)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테아트로 이탈리아는 원래 시네마 극장으로 지었으며 1970년대 말까지 운영되었다. 그후 카 포스카리 베네치아 대학교에서 인수하여 회의장으로 사용했으나 한동안 방치되었고, 1990년대 말에 코인 가문에서 매입하여 내부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16년 말 슈퍼마켓으로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테아트로 이탈리아는 사유 재산이 되었다.
베네치아 역사에서 보면 이 마켓 건물의 역사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주가 몇 차례 바뀌면서 건물 용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건물의 터와 용도가 서로 궁합이 맞지 않은 탓일까? 지금부터라도 제 짝이 되어 건물이 오래도록 유지되었으면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보는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슈퍼마켓이야 미술관이야?' 하고 반문할 정도로 무척 이색적인 풍경이다. 벽과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예술을 모르는 내가 보아도 범상치 않다. 벽의 그림은 귀도 마루시그(Guido Marussig, 1885~1972)가 그렸고, 천장에는 알레산드로 포미(Alessandro Pomi, 1890~1976)가 그린 '이탈리아의 영광'(Gloria d’Italia)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 현대 화가다. 또한 건물 내부에는 베네치아의 철과 유리 장인이었던 움베르토 벨로토(Umberto Bellotto, 1882~1940)가 설치한 장식품들도 여럿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유명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꾸밀 정도였으니 사유 재산이었다면 엄두도 못낼 대단한 건물이라 하겠다.
테아트로 이탈리아의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보통 베니스 비엔날레로 많이 알려져 있다.)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비엔날레 때 테아트로 이탈리아 슈퍼마켓 안에서 부대 행사로 설치 예술가인 케네스 골드스미스(Kenneth Goldsmith)의 '힐러리: 힐러리 클린턴 이메일'이 전시되었다. 이 자리에는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도 초청되었다. 전시회에서 매장을 둘러본 힐러리가 말하기를 '미국 내 수백 개의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했지만, 내가 본 슈퍼마켓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아름다운 슈퍼마켓이라는 소문은 이렇게 확산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보았던 그림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내 관심사는 매장의 와인과 요거트 코너로 먼저 가 있었다.
# 오후, 카페로 모여드는 관광객들
오후가 되자 베네치아 거리의 카페와 상가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재미있는 구경도 배고픔을 앞서지 못한다'는 말이다.
유럽에는 브런치 타임(Blunch Time)이 있다. 아침(Breakfast)과 점심(Lunch)의 합성어라고 하는데 시간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해진 것은 아니다. 시간이 제각각이라 유럽 여행을 하면서 아침이나 점심을 제대로 먹으려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고생깨나 하게 된다. 더군다나 아침은 어느 곳이나 빵과 커피가 고작이고 점심은 식당마다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이 있어서 아무 때고 불쑥 들어갔다가는 그냥 나오기 일쑤다. 그렇지만 군것질을 할 수 있는 가게는 항상 열려 있었다. 군것질이 식사가 될 수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오후가 되면 거리의 상가들은 180도로 바뀐다. 카페와 레스토랑마다 거리에 펼쳐놓은 식탁과 의자에는 관광객들로 가득찬다. 참 희한한 나라다. 공공의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유지처럼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식당들은 자리세를 국가에 납부하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고객에게 안이고 밖이고 간에 자리세를 따박따박 받는다. 이미 계산서에 찍혀서 계산이 된다.
해 주는 것도 없이 봉사료라고 팁은 팁대로 받고 자리세는 자리세대로 또 받는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식당에 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무 것도 없이 손님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아마 천국이라 여길 것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자주 보는 풍경은 관광객들이 길거리나 계단에 앉아서 테이크 아웃한 음식을 먹는 모습들이다.
거리에 사람들이 쉴만한 의자가 없으니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먹고 있다. 길거리에 서서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왜 저렇게 하고 있을까' 하고 의아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내와 나도 그들처럼 땅바닥에 퍼질러 앉거나 쪼그러 앉아서 가게에서 사온 음식을 먹고 있었으니....
유럽은 봄 여름 오후의 해가 참 길다.
우리나라도 여름에는 낮의 시간이 길지만 유럽은 더했다. 지구상의 계절과 해 길이 변화는 자전축의 기울기에 의해서 생긴다. 대략 23.5° 전후로 기울어져 변동하지만 폭은 미세하다. 그 기울기로 인해서 지구의 지역에 따라서 4계절의 변화가 생기고 해의 길이 달라진다. 여름과 겨울의 낮 길이 차이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과 영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서머타임(Summer Time)제를 실시한다. 낮의 햇빛을 더 활용하기 위해 시간을 1시간 앞당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한때 이 제도를 사용했다가 폐지했다.
해가 기웃거리며 서쪽으로 넘어가면 거리의 상가들은 불을 밝히고 관광객의 발길은 레스토랑으로 모여든다. 아침이나 점심과는 달리 저녁은 마음껏 주문해서 푸짐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땅거미가 깔리고 어둠이 깊어지면 카페에서는 술을 곁들이며 밤늦도록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떠들며 논다.
# 저녁 노을에 물든 도시
소운하의 다리 위에서 본 베네치아의 저녁 노을이 아름답다.
일몰 시간에 보는 노을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은 마치 도화지에 화려한 색상의 물감을 뿌려대는 것 같다. 자연이 만들어 내는 한 폭의 예술이다. 대체 어떤 화가가 저렇듯 심오하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면 하늘은 더욱 붉어진다.
마지막 남은 빛 그림자가 운하 위로 살포시 비추면 따글따글한 물결이 반짝이는 금모래빛 같이 곱다. 누가 감히 생각했을까? 운하를 달리는 보트는 무심한 듯이 그 고운 물줄기를 가르기 위해 달리고 있다. 소박한 상상은 헛된 망상처럼 깨지고 만다.
자연은 역시 자연이다.
보트가 지나간 자리에 운하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고 가볍고 잔잔한 물결만 섬세한 파동으로 번진다. 하늘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갈매기가 유유히 날개짓하며 날고 있다. 그렇네. 모든 것은 자유로우면서도 자신의 독창성을 뽐내고 있다. 염치없지만 나도 그 속에서 하나의 작은 소재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