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05. 베네치아의 심장, 산 마르코 광장에서

by 박태근

산 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의 심장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시의 중심이다. 베네치아 공화국 때는 정치 일번지로 도제의 집무실과 정부 관리들의 숙소와 사무실이 있던 곳이며, 외국에서 들어온 선박들이 피아제타 항구에 정박하며 무역을 하던 장소였다. 가톨릭이 국교였던 산 마르코 대성당도 여기에 있다. 광장에서 석호로 난 항구는 아드리아해의 해류가 가끔 거세게 베네치아로 몰아치더라도 길쭉하게 펼쳐진 리도(Lido) 섬이 자연 방파제가 되어 막아 준다. 물줄기는 대운하로 이어져 크고 작은 선박을 통해 베네치아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천혜의 요지에 산 마르코 광장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산 마르코 광장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광장이 조성되기 이전에 이곳에는 산 마르코 대성당이 먼저 세워졌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초기에 테오도르 성인을 숭배했다. 그러다가 828년 1월 31일 성인 마르코의 시신을 실은 배가 베네치아 항구에 도착했다. 성인 마르코는 마가 복음을 쓴 마가를 말한다. 배에서 내린 시신을 주교로부터 인수 받은 사람은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였다. 제11대 도제였던 주스티니아노 파르티치파치오(Giustiniano Participazio)는 마르코의 유해를 도제의 궁전 요새에 안치하고 죽기 전에 아내와 후임 도제에게 마르코의 유해를 안치할 교회를 건립하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산 마르코 대성당이다.


산 마르코 광장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가 1496년에 그린 '산마르코 광장에서의 성체 성혈 대축일 행렬'(Processione del Corpus Domini in Piazza San Marco)이다. 그림 속의 광장은 현재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반면에 광장의 얼굴이기도 한 산 마르코 대성당은 금박의 화려한 치장과 묵직한 돔이 주는 장엄함으로 황홀하기가 그지없다.

Gentile Bellini, Processione del Corpus Domini in Piazza San Marco (1496).jpg Gentile Bellini, Processione del Corpus Domini in Piazza San Marco (1496) - 출처 : Wikipedia



산 마르코 광장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큰 광장인 피아자(Piazza)와 작은 광장의 피아제타(Piazzetta)가 그것이다. 베네치아 본섬에서 피아자를 붙인 광장은 산 마르코 광장이 유일하다. 소운하를 따라 걷다 보면 조금이라도 공간이 넓은 곳에 광장을 조성했는데 대략 꼽아도 20개가 넘는다. 이때는 피아자나 피아제타라 하지 않고 캄포(Campo)라고 부른다. 캄포는 광장 이전에 식량을 재배하는 경작지였고 가축을 방목하는 풀밭이었기에 '들판'이라는 의미에서 붙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산 마르코 광장도 애초에는 풀이 자라던 목초지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혹자는 계획된 설계로 만들어진 광장에는 피아자를 붙인다나 어쩐다나? 말장난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유가 뭘까 궁금하지만 설명된 글을 찾을 수 없다.



1) 피아자(Piazza)


베네치아의 골목길 마르차리아 델 오롤로지오(Marzaria dell'Orologio) 거리에서 커다란 시계탑을 보면서 길을 나서면 산 마르코 광장이 나온다. 서너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대운동장 같은 큰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진다. 피아자인 대광장이다. 광장은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종교적 의식, 정치적 의식 그리고 시민들의 생활과 문화의 장이 어우러진 아고라(Agora)다. 그것을 직접 마주하니 베네치아 사람들이 얼마나 공들여서 만들었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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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길다란 사각형이다. 산 마르코 대성당쪽이 넓고 반대편의 나폴레옹시대 윙 건물쪽은 조금 좁다.

산 마르코 광장은 항상 붐빈다. 관광객들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 정량적인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들 틈에서 광장의 중앙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긴팔 옷을 입었으나 반팔 셔츠 차림의 사람들도 많다.


산 마르코 광장의 배치는 광장의 중앙에서 볼 때 동쪽의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시계 방향으로 남쪽의 산 마르코 종탑과 프로쿠라티 누오브, 서쪽의 나폴레옹 윙, 북쪽의 프로쿠라티 베키에와 시계탑이 있다. 광장의 넓이는 동서로 길이가 170m이고, 남북으로 폭이 80m에 이를 정도로 크다. 소운하 사이의 골목길을 걸어오다가 이런 광경을 보니 신세계를 만난 듯 하다.



베네치아에 있으면서도 내가 베네치아에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책에서만 보던 유명한 건축물들을 직접 마주하면서도 머릿속은 꿈결을 헤매는 것 같았다.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면서 동시에 익숙한 문화들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많은 것들은 이미 책에서, 매스컴에서 보아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내가 그 속에 없었을 뿐이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카메라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내가 이곳에 왔노라!'하는 사실 확인은 아닐까? 아내와 나도 그들 틈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기억보다 확실한 증거다.

사람들은 여행했던 많은 순간들을 모두 기억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남은 추억이 또 다른 기억으로 뇌리에 저장된다. 더러는 기억이 중첩될 수 있고 때로는 기억이 백지처럼 사라질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하다. 젊을 때는 그래도 누가 어디 갔던 곳을 이야기하면 '어, 맞어. 그때 거기를 갔었지.' 하고 생각이 났던 것도 나이가 들면 이야기를 들어도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베네치아의 봄은 그렇게 내 마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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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l


광장을 구성하는 건축물 중 으뜸은 단연 산 마르코 대성당이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836년에 산 마르코의 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도제 주스티니아노 파르티치파치오의 유언에 의해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976년 민중 봉기로 불타고 크게 훼손되었다. 그것을 도제 피에트로 4세 칸디아노가 가문의 비용으로 2년 만에 훼손된 부분을 보수했다.


9~10세기까지만 해도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종속적인 관계였으며 경제적 성장력도 발전하지 못한 미미한 존재였다.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으며 지중해로 향한 대양 진출을 통해 대외 무역을 확대하려고 했다. 한 나라의 국력이 되는 경제력과 군사력은 대외적으로 그 나라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힘의 평가 기준이 된다. 국력이 미약하면 국내외적으로 국가의 영향력이 적어진다. 베네치아가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면서 부를 축적해 나가는 시기는 대략 11세기 이후다. 산 마르코 대성당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063년이었다.작은 교회 건물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증개축함으로써 국력의 성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 했다. '국력은 힘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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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 종탑(Campanile di San Marco)


98.6m의 종탑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종탑 중의 하나다.

이 종탑은 베네치아 본섬 내륙에서는 좁은 골목길의 건물들로 잘 보이지 않지만 석호의 바다에서 보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높다. 종탑은 원래 베네치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요새의 감시탑으로 10세기경에 건립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베네치아의 경제력은 아주 낮은 수준이어서 탑을 완성하는데 거의 100년이 넘게 소요되었다. 감시탑은 때때로 등대로 이용되기도 했다.


요새의 감시탑이 성당의 종탑으로 바뀐 것은 12세기 후반부터였다. 산 마르코 대성당이 완성되고 국력이 성장하자 감시탑을 종탑으로 교체한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지반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종탑을 높이려면 하부 구조가 지탱할 수 있도록 탑의 하중을 줄여야 했다. 그 방법으로 첨탑을 목재로 만들었는데 문제는 화재에 취약하였다. 종탑은 결국 화재를 견디지 못하고 소실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지금의 산 마르코 종탑은 노후로 완전히 붕괴된 것을 1912년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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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쿠라티(Procuratie) 건물들


산 마르코 광장의 대광장은 희게 보이는 연한 회색 건물이 ㄷ자 형태로 에워싸고 있다. 프로쿠라티 건물이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모습이다. 양쪽 건물 끝의 서쪽에 있는 작은 건물은 또 어떤가? 모든 건물에는 그 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다. 건물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건물의 용도도 시대의 필요성을 담고 있다. 프로쿠라티는 이곳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성이다.


프로쿠라티는 프로쿠라토르(Procurator)들이 살던 임대 아파트이면서 근무하는 행정 관청이었다.

프로쿠라토르는 고대 로마에서 세금, 재산 등 재정 관리와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 관료였다. 속주에서는 총독 아래에 있는 재무담당관이었으며 작은 속주일 때는 두 가지 일을 겸임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프로쿠라토르는 초기에는 도제 다음의 직위를 가진 1인 종신직으로 성 마르코 대성당의 재정과 행정을 관리했다. 이후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인원수도 늘어 심지어 40명에 이르렀고 점차 원로원과 대평의회의 일원이 되는 핵심 엘리트 관료로 성장하였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단어의 의미가 우리말과 서로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하다. 번역을 해 놓으면 원래의 뜻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프로쿠라티를 검찰청으로 번역하는 것도 그렇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프로쿠라토르는 재정과 행정 기능을 담당했지만 사법 기능은 수행하지 않았다. 프로쿠라토르의 라틴어 어원은 프로쿠라레(procurare)로 대리인, 관리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법권을 가진 곳은 프로쿠라토르가 아니라 콰란티아(Quarantia)와 10인 위원회(Consiglio dei Dieci)였다. 따라서 프로쿠라티를 검찰청이 아니라 청사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프로쿠라티 누오베(Procuratie Nuove)

광장의 남쪽에 있는 건물로 '신 청사'라 부른다. 중세시대의 낡은 건물들을 대체하기 위해 1578년 빈첸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 1548~1616)가 공사를 시작하여 1640년경 발다사레 롱게나(Baldassarre Longhena, 1598~1682)에 의해서 완료되었는데 무려 62년이 걸렸다. 3층 건물의 1층은 아케이드 형태의 로지아(복도)가 있으며 상가로 분양되었다. 2층과 3층은 아치 형태의 창문이 나 있고 프로쿠라토르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건물 외관은 전체적으로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의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그 수가 465개라고 한다.


1층에는 상점들이 입점해 있으며, 1720년에 설립된 커피하우스인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카를로 골도니, 괴테, 카사노바, 바이런, 마르셀 프루스트, 찰스 디킨스 등이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다. 베네치아를 가기 전에 반드시 가겠다고 점찍어 두었으나 막상 가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2층은 코레르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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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쿠라티 누오비시메(Procuratie Nuovissime)

서쪽에 있는 건물로 '나폴레옹 윙(Ala Napoleonica)'이다. 영어의 윙은 우리말로 동(棟)이다. 아파트의 1동, 2동을 부르는 것과 같다. 이곳에는 1557년 자코포 산소비노가 완성한 산 제미니아노 교회가 있었으나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몰락하고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에 입성하여 기존의 교회를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다.

역사에서 패전한 국가와 패배한 왕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비참하다. 나폴레옹은 프로쿠라티 누오베를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청사에서 왕실 주거 공간으로 개조하면서 부족해진 연회장을 짓기 위해 1807년 교회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구한 역사를 담고 있는 교회 건물이지만 침략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는 코레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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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쿠라티 베키에(Procuratie Vecchie)

산 마르코 광장의 북쪽에 있는 건물로 '구 청사'다. 산 마르코 광장이 광장다운 모습을 갖춘 시기는 제39대 도제였던 세바스티아노 지아니(Sebastiano Ziani, 1172~1178) 때였다. 그는 가문의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산 마르코 광장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좁은 운하를 메워 광장을 확장하고 소광장인 피아제타를 조성했다. 광장의 '구 청사' 자리에 1층의 긴아케이드 위에 단층 구조로 된 건축물을 지었다. 그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 1496년에 젠틸레 벨리니가 그린 산 마르코 광장에서의 행렬이다.


프로쿠라티 베키에는 1512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다. 베네치아는 교황청,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등 캉브레 동맹과의 전쟁으로 재정적인 압박이 심한 와중에도 1514년부터 건물 전체를 해체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24년 만인 1538년에 완공했다. 건물의 1층은 상가로 임대했으며 2~3층은 대부분 프로쿠라티와 시민에게 임대 아파트로 분양했다. 건축물 형태는 프로쿠라티 누오베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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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탑(Torre dell'orologio)


'구 청사'인 프로쿠라티 베키에와 붙어 있는 건물이 시계탑이다.

시계탑 아래의 높다란 아치문으로 들어가면 리알토 다리로 가는 마르차리아 델 오롤로지오 거리가 나온다. 베네치아 공화국 원로원에서 1493년에 산 마르코 대성당의 정면 꼭대기에 있는 구식 시계탑을 대체할 필요성을 의결했다. 하지만 새로운 시계를 어디에 설치할지 시계탑의 위치를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시계탑을 광장에서 유명 상가들로 나가는 마르차리아 델 오롤로지오 거리쪽에 아치형 위의 탑으로 세운다는 의견만 모아졌다. 시계탑은 제74대 도제인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Agostino Barbarigo, 1419~1501) 때 건설되었으며 1496년에 주변의 주택들을 철거하고 공사를 시작해서 1499년에 완공했다.


완공된 시계탑은 왠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기형적이고 불균형한 모습이었다. 산 마르코 종탑처럼 시계탑 역시 처음에는 홀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502년부터 시계탑 주변의 건물들을 추가로 매입하여 시계탑 양쪽에 각각 두 칸씩의 건물을 달아내기로 했다. 공사는 1506년에 모두 마쳤으며 지금과 같은 모습의 건축물은 그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같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더라도 무미건조한 아파트 건물처럼 일률적으로 길게 이어져 오던 프로쿠라티 베키에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시계탑은 뭔지 모르게 시원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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