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 6화] 종이 냄새와 어둠 - 세 번째 칸의 기록은 피다
[시즌 1 – 6화] 종이 냄새와 어둠 - 세 번째 칸의 기록은 피다
인트로
도시는 기억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저 피로 적셔진 선택의 흔적을 모아, 그것을 역사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의 틈새에서,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도시의 목소리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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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민은 두 번째 칸에서 벽이 기록하는 이름의 실체를 보았다.
도시는 이름을 통해 인간의 관계와 시간을 조작하고, 선택을 왜곡한다.
하민은 벽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새기며 통과자가 되었지만,
도윤의 배신과 엄마의 목소리 속에서 또 다른 문을 마주하게 된다.
1. 낯선 문, 낯익은 목소리
세 번째 칸의 문은 다른 문들과 달랐다.
표면에 낡은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종이들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민, 이제… 돌아와.”
엄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한층 더 선명했다.
하민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냐, 진짜가 아니야. 이건 도시가 내 이름을 훔쳐 만든 거야.”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이 낮게 들숨을 쉬었다.
종이들이 한꺼번에 팔랑이며 떨리자, 그 속삭임이 피처럼 번졌다.
2. 종이 냄새의 비밀
문을 열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종이 냄새…?”
아니, 그건 종이와 피가 섞인 냄새였다.
안쪽에는 수천 장의 기록지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각 기록지에는 이름, 날짜, 그리고 붉은 글씨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민은 손끝으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글씨가 번져 있어서 읽기 힘들었지만, 확실히 보였다.
‘08:08,
하민,
선택 실패.’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피로 기록 완료.’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기록이 아니야.
이건 누군가의 목숨이야.”
3. 기록의 정체
“정확히 말하면, 피는 도시의 잉크다.”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하민은 반사적으로 뒤돌았다.
종이더미 사이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흰 옷이 종이처럼 찢겨 있었고,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하민이 물었다.
“나는 기록관.
사람들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하는 자.”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도시는 말하지 않아.
대신 우리 같은 자들이 그들의 피로 도시의 목소리를 써낸다.”
하민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럼… 이 피들은 다—”
“모두 실패한 선택의 대가다.”
그녀가 말을 자르듯 끊었다.
“누군가 통과자가 되지 못할 때, 그들의 시간이 피로 남는다.”
4. 과거의 기록
기록관은 한 장의 종이를 하민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 기록이다.”
종이에는 하민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가 했던 선택들이 붉은 글씨로 정리되어 있었다.
- 아이를 구함 → 시간의 균열 발생
- 두 번째 칸 진입 → 이름의 왜곡 확인
- 도윤과의 연결 → 불완전
마지막 줄에는 커다랗게 써 있었다.
‘세 번째 칸 진입 전: 불합격’
“불합격이라고?” 하민이 분노를 터뜨렸다.
“누가 감히 내 선택을 심판해!”
기록관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도시는 심판하지 않아.
그냥 기록할 뿐이지.
심판은 네가 스스로 내리는 거다.”
5. 피의 구조
기록관은 손끝으로 공중에 무언가를 그렸다.
붉은 빛의 글씨가 공중에 떠올랐다.
“도시의 시간 구조는 여덟 갈래로 나뉜다.
그리고 각 갈래마다 실패한 선택이 피처럼 모여 하나의 강을 이룬다.”
하민은 숨을 삼켰다.
“그럼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은…”
“피의 강 위에 떠 있는 종이섬.”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너희 인간은 그 종이 위에서만 발을 디딜 수 있어.
그것이 너희가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도시가 너희를 가두는 방법이지.”
6. 도윤의 기록
하민의 시선이 한쪽 벽에 멈췄다.
그곳에는 도윤의 이름이 반복해서 새겨진 기록들이 수십 장 붙어 있었다.
“도윤… 너도 실패했어?”
기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때 통과자가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를 벽에 팔아넘겼지.”
“그럼 그가 날 속인 것도…”
“도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선택이야.”
하민의 두 손이 떨렸다.
도윤의 배신은 단순히 조작된 것이 아니라,
그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하민의 가슴을 찔렀다.
7. 불타는 기록
갑자기 방 안의 종이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붉은 불꽃은 피와 잉크를 동시에 태웠다.
기록관이 차분히 말했다.
“도시는 오래된 기록을 정리한다.
새로운 선택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피를 태워야 하거든.”
“그럼 이 기록들은 모두 사라지는 거야?”
하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불꽃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때, 네 이름이 어떤 색으로 새겨질지가 결정된다.”
8. 세 번째 문을 향해
기록관은 하민에게 작은 종이 조각을 건넸다.
“이건 마지막 경고다.
세 번째 문은 기록을 넘어서 피 자체가 심문하는 곳이다.
네가 그곳에 들어가면, 네 선택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피의 계약이 된다.”
하민은 종이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붉은 얼룩이 스며들었다.
“내 이름은 내가 쓴다.”
그는 낮게 속삭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문 앞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기록관의 모습은 이미 종이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남은 것은 비릿한 피 냄새와, 여덟 번 울리는 신호음뿐이었다.
클리프행어
세 번째 문이 열리자, 붉은 빛이 하민을 삼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민, 이번엔 내가 기록을 쓸 거야.”
다음 화 예고
[1-7화] 첫 번째 계단 ― “아홉 번째 울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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