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도 가 본 적 없는 남편은 늘 총알을 장전하고 있었다.
남편의 총구는 언제나 나를 향해있었고, 자주 아들과 딸을 향하기도 했다. 그 안에 평화는 없었다. 나는 늘 심장이 벌렁거렸고, 애들은 자신감을 잃고 흔들리는 꿈으로 빠듯이 자라났다. 키우는 이도 바라는 이도 없었던 원망만 담을 넘어 잡초처럼 무성해져 갔다.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무서운 것은 평화가 없는 공간이다.
집을 갖고 싶다. 열 평짜리 방 한 칸에 사는 내가 꿈꾸기엔 문자 그대로의 꿈, 그림의 떡처럼 영원히 꺼낼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르지만 꿈만큼 공격당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이 어디에 있겠으며, 그보다 희망에 차오르게 하는 것도 없을 테니 구겨진 마음을 펼쳐 놓고 마음껏 꿈꿔 보기로 했다.
집에 대한 내 간절함은 지금도 따끔거리는 상처의 시간을 건너고 있는 우리 애들이나 나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굳이 비싸야 할 이유는 없지만, 집으로서의 효용 가치가 끝나고 나서도 괴물처럼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무와 흙처럼 세월이 깊어지면 흔적 없이 조용히 사라질 줄도 아는 자재들로 지어진 집이면 좋겠다. 가고 오는 세대 속에서 가는 세대의 뒷모습이 흉한 것은 오는 세대에 대한 사랑의 부재요, 책임감의 부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비단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조금 앞서 왔다가 가는 단순한 이유가 결코 특권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쓰다 버리는 온갖 폐기물들,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저 끔찍한 것들을 다 어찌할 것인지 참으로 걱정스럽다.
지구 곳곳에 쓰레기 산이 생겨나고, 지구온난화와 사막화와 같은 기상 이변은 재앙이다. 이는 그 물질의 효용이 존재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과한 숨을 내뱉어 다른 생명체들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 미래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삶은 다가오는 세대에게 너무나 죄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나의 바람은 그저 이불속의 작은 외침일 뿐이지만, 내가 꿈꾸는 집은 자연 속으로 잘 스며드는 것이어야 하고 강하면서도 순한 자재들이 어우러진 한국적인 가치가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앞마당엔 아침 햇살이, 뒤 뜰엔 석양이 욕심껏 머무르게 하고 집안엔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로 구석구석을 밝혀 그늘 없이 따뜻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자꾸 불편한 마음이 생겨나서 다른 곳을 기웃거리게 되거나 이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호흡이 편안한 그런 곳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빛이 잘 드는 한편에는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방을 만들고 싶다. 고무줄 바지를 입고 편하게 늘어져 있어도 마음 쓰이지 않는 그런 공간을 마련해서 마음이 바다처럼 커 가슴에 우주를 담고 있는 사람들과, 모든 사물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을 즐겁게 맞이하며 살고 싶다.
비 내리는 날이나, 눈 내리는 날이나 혹은 바람 부는 날이나, 우리 마음이 낯선 풍족함으로 특별해지는 날에는, 상처 난 우리 마음을 쓰다듬어 준 그림 이야기들과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깨우침을 주는 이런저런 책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조금은 멋지기도 하겠고, 청국장 냄새처럼 친근한 향기로 가득해지지 않을까.
삶의 피곤이 어깨 위로 내려앉던 어느 오후, 장천행 버스 안에서 기침을 참고 까만 비닐봉지 속에 얼굴을 묻고 콜록거리던 그녀를 본 날, 내 몸속의 피 한 방울이 깨끗해지는 걸 느꼈던 순간처럼, 작고 소중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온 집안에 굴러다니게 하고 싶다.
그런 집에 어울릴 내가 만든 시답잖은 음식들을 나누는 것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이 될까. 과하게 양념 맛을 빌리지 않고, 텃밭에 제 맘껏 자라난 푸성귀들의 소박한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에게 기꺼이 먹거리를 내어 주는 모든 것에 고마워하며 살고 싶다.
두 주 전에 동생과 함께 오랜만에 고향 영덕에 다녀왔다. 영덕의 고향 집은 혼자 살고 계시던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후 20여 년째 지금까지 빈집으로 남아 있다. 살다가 마음이 부스스해지는 날이면 뭔가 유난히 따뜻하고, 몹시 진한 정이 그리워지는 날이 있을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십여 년까지는 엄마와 가족보다 더 끈끈하게 지내셨던 미숙이 할머니께서 환기도 시켜주시고 당신 집처럼 애지중지 돌봐주셨는데 미숙이 할머니도 사는 일이 심드렁해지셨는지 삶의 끈을 놓으셨고, 지금은 집만 홀로 남아 있으니 그 모습이 어떨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됐지만, 우리 칠 남매가 나고, 자라고 숨 쉰 이야기들이 다 거기에 있고, 아홉 식구의 추억이 묻혀있는 곳이므로 애틋한 그리움을 앞세우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열린 적이 없던 자물쇠는 검붉게 녹이 나 있었고, 삐거덕거리며 힘겹게 제 몸을 열어 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우리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가슴속에 오래 익숙했던 풍경 위로 덧칠해진 생소한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안방 천장이 흘러내려 방바닥으로 쏟아지면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건축재들이, 먹잇감을 향해 사납게 이빨을 드러낸 맹수처럼 볼썽사나운 공포영화 속 폐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의 뜨거운 숨을 전달받지 못하고, 쓰다듬는 손길이 끊어진 집은 더는 집이 아님을 확인하는데 왜 그리도 낯설던지 이곳이 정말 우리 칠 남매가 나고, 자라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공간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힘겹게 제 몸을 지탱하고 있던 늙고 병든 집은, 마치 손사래를 치며 매몰차게 등 떠밀어 쫓아내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둘러 다시 자물쇠를 채우고 돌아서야만 했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엄마를 또다시 잃는 기묘하고 서늘한 기운에 오한이 느껴졌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어야 하고, 사람으로부터 온정과 사랑을 받아야 집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관심을 받는 동안은 집도 사람에 기대어 호흡을 갖게 된다. 집으로서의 요건은 바로 거기에 있다.
더불어 집이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이 보장된 공간에서 기쁜 얼굴로 서로의 들고 남을 맞이하며, 서로에게 평화가 되고 위로가 되며, 아끼고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곳이어야 하고, 동물들과 물건들까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로 살아가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돌보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처럼 집 또한 주인의 관심과 애정으로 생명을 얻고, 집으로서의 가치를 드러내며 함께 살아가는 그곳이 집이다. 더하여 굳이 길을 나서지 않아도 하루하루 변화해 가는 사계의 신비로움을 눈동자에 담을 수 있는 집이라면 무얼 더 바랄까.
시렸던 손이 녹여지고, 꺾였던 무릎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가는 그런 집, 대단하거나 특별하지는 않아도 해가 떠오르고 지는 일상의 순간들을 감사로 채우며, 쓸쓸한 시간과 마주하고 있는 이웃들의 삶에도, 붉은 노을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도래하기를 빌어주며, 자연의 한 조각으로 풀처럼 꽃처럼 숨 쉬다가 하늘이 호흡을 거두는 날, 조용히 돌아가는 그런 집, 내 가녀린 꿈 속으로 그 집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