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오래 이 일을 해서 수당이 쌓이면서 월급도 꽤 받는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나이 많고 돈이 나가는 직원이니 늘 구조조정의 가운데 서 있다. 요양원은 환자들이 줄어들면 제일 먼저 요양보호사의 인원을 줄였다. 약간의 보상을 걸곤 희망퇴직을 권했지만, 사실은 나이가 많은 순으로 눈칫밥을 먹었다.
작년에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팔십 세 가까운 어르신이 요양원을 나갔다. 엄마의 말로는 어르신이 나이답지 않게 체력이 좋고 일을 잘하는 직원이었다. 조금 더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등 떠밀리 듯 요양원을 나가야 했다. 엄마의 퇴직 대기번호도 한 자리가 줄어들어, 이름이 불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그런 엄마의 지갑에서 꺼낸 100만 원. 어디다 쓸 건지 왜 필요한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강사가 되려면 필요한 돈이라고 하니까, 오히려 좋아하셨다. 늘 엄마는 나를 믿어주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 믿음이 내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마흔이 넘어 엄마한테 내민 손이 부끄러웠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가진 돈 대부분이 집에 묶여 있어 대출금을 갚느라 허덕였다. 남편의 월급은 대출금과 생활비, 아이들 학원비 등을 쓰느라 매번 빠듯했다. 월급보다 지출이 더 큰 달엔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나 혼자 눈치 보는 습관은 어른이 되어도 고쳐지지 않았다.
늦깎이로 시작한 도서관 강사. 강사로 자리 잡기 위해 공부하고 자격증 따느라 돈이 필요했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이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돈을 달라고 말하기엔 남편보다 엄마가 편했다. 양심은 있어서 며칠 고심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냥 지금처럼 머물 것인가, 투자하여 기회를 얻을 것인가. 전자는 작년이나 올해나 달라질 기미가 안 보여 가능성이 보이는 판에 돈을 베팅했다.
우리 엄마는 부자다. 내 기준에선 그렇다.
의지할 곳 없이 혼자서 어린 딸 셋을 건사했다. 딸만 셋이라 혹여 험한 일 생길까 봐 재혼도 할 수 없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어 허드렛일이라도 기꺼이 나섰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 10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왔고, 그 생활을 평일 주말 없이 반복했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코를 골며 잠드는 모습에 삶의 고단함이 서렸다.
빚 지고 가족을 떠난 그 사람 탓에 돈을 빌리는 걸 금기시했다. 가난해도 빚지고 살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빚내지 않고, 그냥 안 먹고 안 샀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작고 낡은 18평 아파트를 살 때도 대출 없이 현금을 냈다. 빚을 내서라도 원하는 걸 가지려는 우리와는 달랐다. 지금도 각자 가정을 꾸리고 사는 딸들은 급전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엄마를 찾는다. 미안해하는 우리에게 엄마는 부모로서 당연하다고 말했다.
"돈이 없는 건 죄야. 자식이 급하게 필요할 때 줄 쌈짓돈이라도 모아야지."
엄마는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살기 위해 아직도 돈을 번다. 손 벌리기는커녕 못난 딸들이 돌아가면서 돈을 빌려가니 죄송할 따름이다. 장례비 안 나가게 상조보험까지 가입했다는 엄마. 어릴 땐 엄마처럼 고생하면서 살지 말아야지 건방진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엄마만큼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다.
부채감. 내가 빌린 건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엄마가 준 100만 원은 내가 억만금을 벌어 갚는데도 채우지 못할 돈이었다. 허투루 인생을 쓰지 말라는 엄숙한 가르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