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라던지 여행이라던지 하다못해 술자리라도 추억하면 좋으련만, 고시원 생활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쪽방 같은 고시원에서의 2년. 첫 직장이 강남인데 집에서 다니면 두 시간씩 걸리고 자취방 구할 돈이 없어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다. 가난했지만 엄마 밑에서 등 따시고 배 부르게 살았으니 세상 물정을 몰랐다. 촌동네 살아서 다 고만고만한 집들이니 열등감이랄 것도 없었다. 그런 내가 강남에 입성해 고시원에 들어가다니, 첫 날부터 후회했다.
비좁은 방엔 창문도 없었고 공용 주방과 화장실이 불결했다. 타인의 체취가 뒤섞인 공간은 아무리 환기를 해도 비릿한 냄새를 지울 수 없었다. 생활공간을 타인과 나눠 쓴다는 불편은 2년을 살아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내 삶을 전당포에 맡긴 것처럼 무력감을 느꼈다. 당장 짐 싸서 집에 내려가고 싶었지만 엄마를 설득해 간신히 얻은 고시원이라 참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작은 신생 광고기획사에서 시작한 카피라이터. 사장부터 직원들까지 모두 젊었다. 그때 사장이 지금 내 나이 40대였다. 젊다고 깨어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 없는, 이른바 열정 페이를 받고 다녔다. 연봉 협상이란 걸 해본 적 없으니 주면 주는 데로 넙죽 엎드린 나 자신이 한심했다. 2년이란 시간은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쓰기 위한 나와의 약속이었다.
회사가 갤러리라 백화점 부근이라 명품을 두르고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내가 고시원에 산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회사 사람들에게도 고시원에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교대역 어디쯤에서 자취한다고 둘러댔다. 그 정도 거짓말은 눈 하나 깜빡 안 해도 할 수 있었다.
광고기획사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출근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하지만 퇴근 시간은 기약이 없었다. 광고를 따기 위해 경쟁 PT가 있는 때는 평일, 주말 없이 회사에 출근했다. 한 달 넘게 이 생활을 지속한 적도 있었다. 쉼 없이 일만하는 회사에서 무슨 아이디어가 나온단 말인가.
야근에 지쳐 쉬고 싶지만 고시원 쪽방으로 또 다시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방음도 안 되는 고시원에서는 옆 방의 소리 뿐 아니라 외부 소음까지 들려왔다. 대학의 축제 기간인지 노랫소리와 함성이 끊임없이 방을 비집고 들어왔다. 간이 침대에 누워 벽 사이로 다른 세계가 펼쳐진 기분. 그들의 함성이 커질수록 나는 더 초라해졌다.
유일한 위안은 상자만한 작은 티비였다. 이어폰을 끼고 티비를 보는 순간에는 주변의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일본 드라마 <노부타 프로듀스>를 즐겨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왕따 여고생이 킹카인 두 남주의 비호를 받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 시절 나에게는 위로가 됐다. 내가 노부타처럼 세상에 속하지 못한 왕따 같았다. 나를 구원해줄 왕자를 기다리던 순진한 시절, 덧없는 희망이라도 품어야 그나마 버틸만했다.
2년 뒤 고시원을 나와서는 오래된 3층 빌라의 옥탑방을 구했다. 옥상에 지어진 가건물이라 여름에는 더위를 고스란히 흡수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그대로 통과시켰지만, 고시원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낯선 타인과 부대끼는 삶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자유를 느꼈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고시원을 볼 때면 가슴 한 켠이 시큰하다. 골방에 틀어박혀 있다보면 세상에 발 내딛을 용기마저 잃게 된다. 방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면 그곳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현실에서는 노부타를 세상 밖으로 꺼내줄 구원자는 없었다. 오직 나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