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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7. 2022

면사포를 쓰는 신화 속의 한국 여인

세상을 여는 잡학

고대 서양과 중국, 서남아시아 지역의 창조신은 한국의 마고(麻姑)와 같이 여신이었다. 중국 창조신으로 복희와 남매사이었던 여와는 서남아시아뿐 아니라 중동지역과도 유사 신화구조로 연결되어 있고, 흙으로 형태를 빚어 숨결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거신(巨身) 프로메테우스와 유대 여호와의 인간 창조 구조와 똑같다. 그런 식으로 고대는 동서 막론 강력한 여권(女權)의 시대였다.


중원 땅의 은(殷) 시조 설(契)과 서(徐)의 32대 왕 언(偃), 만주 땅의 부여 시조 동명과 고고려 시조 추모, 한반도로 내려와서 가야 시조 수로와 신라 시조 불구내, 4대 이사금 석탈해 등은 난생(卵生)신화를 갖는다. 난생은 동이족이 공통으로 갖는 천손 신화 양식이자 강력한 모계사회를 상징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국가 체계가 발전하면서 모계사회를 이끌었던 여권은 남권에 밀리기 시작한다. 여권 몰락에 여신도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으니 제주 신화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고의 시대가 지나고 대명왕(大命王)이라는 남신이 나타나 천상 상계를 차지한다. 왕은 중간계인 인간 세상에 내려와 총명 처녀와 인연을 맺는다. 총명은 두 아들 대별과 소별을 낳고 왕은 소별에게 중간계를, 대별에게는 하계(저승과 지옥)를 다스리도록 한다. 왕에게는 두 아들 외에 말잣딸애기라는 딸이 한 명 더 있다. 자유연애를 즐기던 말잣딸애기는 임신을 하였고 왕은 그런 딸을 제주 땅으로 귀양보낸다. 말잣딸애기는 지금의 조천 와산 당오름에 있는 큰 바위에 틀어 앉아 딸을 낳는다. 어느 날 아비의 부름이 있어 상계로 오르기 전 말잣딸애기는 사람들에게 일러 자기가 낳은 딸을 방에 가둬놓고 자물쇠를 채워 유폐한 채 철저히 지키도록 한다. 몇 년이 지나도 말잣딸애기가 돌아오지 않는 중에 남신 동개남이 찾아들어 유폐 방에 갇혀있던 딸과 합방하여 임신시키고는 홀연 사라진다. 얼마 후 말잣딸애기가 상계에서 내려와 임신한 딸의 모습을 보고 격분한 끝에 딸 머리에 면사포를 씌워 쫓아내고 만다.


 

수녀복에 두건을 쓰고 있는 오드리 헵번. 영화 '파계(破戒)'의 스틸 컷


여신 마고 이후 남신 대명왕 자신은 상계를 다스리고 두 아들에게 중간계와 하계를 다스리게 한 것은 남권(男權) 시대로의 완전한 개편을 뜻한다. 그렇게 남권 시대가 되자 말잣딸애기의 혼전 임신에도 가혹한 제약이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 해모수와 야합하여 임신한 유화가 아비 하백으로부터 쫓겨난 것처럼 말잣딸애기 역시 비정하게 내침 당하고 있음은 여권 시대 모계사회에서 그토록 당당하였던 본미(女陰)의 권리가 한민족 역사에서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말잣딸애기가 임신한 딸을 쫓아낼 때 면사포를 씌운 것을 주목해야 한다. 면사포는 햇빛을 차단하는 장치다. 옛사람들은 햇빛이 처녀들에게 불결한 춘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는지 전 세계에 햇빛차단 풍속이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종족은 지금도 봄 되면 어린 처녀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면사포를 씌우고 있다. 아예 종교적 계율로 굳힌 것들도 있으니 이슬람교의 베일 히잡 차도르와 가톨릭교의 수녀 두건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 때 전국의 양반가 여인과 궁녀는 장옷과 너울(羅兀)로, 상민 여인들은 커다란 방갓으로 외출 시 남자의 시선과 함께 햇빛을 차단하였다. 그렇듯이 제주 신화의 면사포는 여권 탄압의 형태인 것이요, 어미가 같은 여인인 딸의 여권을 단속한 것은 확고해진 남권 사회 체제에 무릎 꿇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결혼식에서의 신부 면사포를 혼전 순결의 상징이라고 하나, 여권을 제재하는 햇빛차단의 유전자를 물려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조의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너울(羅兀)을 쓴 상궁 모습.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방갓은 육각형태의 삿갓과 달리 사각형태를 띈다. 방갓은 주로 중부 이북 지역의 상민 여인들이 썼다. 사진 문화유산채널


여권 탄압의 사회적 체계는 육지에도 곳곳에 있었다. 경주 서쪽 10km 떨어진 곳에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알천에 의해 백제 장군 우소의 군대가 몰살당한 것으로 유명한 여근곡(女根谷)이 있다. 훗날 사람들은 누군가 이 여근곡에서 솟는 샘물에 막대기를 꽂거나 돌을 던지면 인근 처녀들이 방탕해진다고 여겨 입구에 사당을 지어 그곳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전국 각지의 여근곡과 여음 바위들도 비슷한 처우를 받으니 때마다 제를 지냄으로써 여인들의 춘정을 누르는 곳이 여전히 있을 정도다. 남권은 혼인을 치르기 전에 죽은 처녀들까지 난도질하였다. 생전에 본미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죽은 것도 억울하거늘 혼기 앞둔 다른 처녀를 해코지하는 원귀 손각시로 재생시켰다. 남권은 그에 멈추지 않고 손각시의 해코지 범위를 처녀에서 공동체로 확장하였다. 조선 시대 내내 전국 각지에 부근당(付根堂)이라는 신당을 세워 남근목이나 남근석을 바쳐놓고 손각시의 원혼으로 지역사회에 해가 끼치지 않기를 빌었다. 부근당은 관사(官事)가 잘 풀어지기를 기원하는 용도로 곳곳의 관청에도 세워졌으니, 1898년 고종이 어명으로 철폐하라 독촉하여도 관리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였음은 손각시에 씌운 사회적 규약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부근당 안에는 가상의 부군과 혼례를 치르는 손각시 탱화를 모시고 그 앞에는 남근 형태의 조형물을 놓는다. 이 부근당에는 남근석이 보인다. 사진 한국민속촌


남권은 여신에게 투기 죄도 씌웠다. 지리산 하동의 쌍바위는 서로 마주 보면서 각각 마마신과 산신(産神. 삼신할미)을 대신한다. 마마신과 산신은  지리산 최고 여신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이다. 어느 날 산신이 재주를 부려 경천동지할 만큼 예쁜 딸을 낳자 마마신은 산신 딸에게 마마 역병을 씌운다. 산신이 마마신에게 애걸하자 마마신은 자기에게도 예쁜 딸을 낳게 해 주면 산신 딸이 낫게 해 주겠다고 한다. 거래는 이루어졌고 마마신은 곧 아이를 밴다. 그러나 산신의 딸에게 차도가 없었다. 따지는 산신에게 마마신은 자신이 먼저 딸을 낳고 나서 산신 딸의 병이 낫게 해 주겠다고 어깃장을 낸다. 열 달이 되어 진통이 시작되었는데도 마마신은 해산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산신이 장난친 것이다. 산신은 어서 자기 딸이 낫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마마신도 해산부터 해야 한다며 버틴다. 서로의 고집으로 타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제 산신은 살이 썩어 죽어가는 딸을 보며 가슴을 쳐야 했고, 마마신은 뱃속에서 커져만 가는 아기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때 산신령이 나타나 해결책을 들려준다. 산신은 마마 바위에 난 숱한 마마 구멍을 손으로 긁어 메워야 딸이 나을 것이며, 마마신은 뒤집어 누운 상태로 산신 바위를 배 위에 얹어 견디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서로의 바위를 손으로 긁고 배 위에 얹는 더 큰 고통이 시작된 것이요, 그 둘이 토해내는 극심한 고통의 울부짖음은 아직도 지리산 일대에 울려 퍼지고 있다. 남권의 상징 산신령이 두 여신을 투기 죄로 징벌함으로써 남권 우월을 증명하고 있음이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데메테르 등 여신들은 각자 고유의 권한과 지위로 남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한국의 손각시처럼 해코지를 주기능으로 삼는 여신 세이렌과 로렐라이조차도 절대 남신에 밀리지 않는 당당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다. 그에 비하여 한국의 여신들은 남신에 비해 초라한 신세에 머물고 있다.


 

해외의 페미니즘 운동 상징. 사진 나무위키


인간의 욕구로 탄생한 신화는 인간의 질서로 무너진다. 욕구는 본능이고 질서는 규약이다. 본능이 지배하던 시대는 가고 규약이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서 여인의 운명은 언제든 구겨질 수 있는 눈물 젖은 종잇장에 불과하다. 새 정부 들어서면서 여성가족부를 해체한다는 것을 두고 사회적 찬반이 요란하다.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예전과는 달리 사회적 지지를 널리 받고 있으나 아직은 갈 길 멀다. 여성 우월을 이정표로 삼으려는 극단 행동까지 일어나기도 한다. 한국인 뇌리에 각인된 남녀유별(男女有別)은 서로 우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남녀 각각의 권리는 따로 있다는 뜻이다. 세계 일류국가의 국민으로서 이제는 여권에 대한 굴절된 인식은 내려놓고 몰락한 신화 속 한국 여인의 면사포를 벗겨주는 위대한 시대적 지혜를 서둘러 찾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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