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은 가면을 쓰고 논다. 새해가 되면 스위스 북동부 산간마을이자 가장 스위스다운 우어내쉬, 슈벨브룬, 발트슈타트, 에리자우 등 목가촌을 아우르는 아펜첼 지역 일대에서는 질베스터클라우젠이라는 새해 축제가 요란하게 거행된다. 행해지는 날짜가 율리우스력으로 새해 첫날이 되는 1월 13일인 것을 보면 아마도 옛 로마제국 시대 때부터 전승되어온 유서 깊은 지역 토속 세시로 보이는데 이 축제의 취지는 악마를 물리침에 있다. 축제 구성은 독특하다. 원래 무당들이 행했을 것이나 점차 마을 사람들이 연희자로 대신 참여하여 기괴한 가면과 머리 장식을 뒤집어쓰고, 몸 앞뒤로는 커다란 워낭을 몸에 둘러 그 소리를 시끄럽게 울리면서 마을 일대를 행진한다.
질베스터클라우젠 축제에서 기괴한 가면을 쓴 모습. 여인들은 미인 가면을 쓴다. 사진 Newinzurich
고대 서양인들은 3월 초부터 4월 중순까지 약 40일 동안의 예수 고난주간인 사순절이 되면 금욕에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금욕에 앞서 대략 2월 중하순 무렵 며칠 동안의 기간을 따로 잡아 사육제를 즐겼다. 사육제는 카니발로 불렸는데 어원을 살피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고기를 실컷 먹는 사육제의 특징으로 볼 때 고기를 치우거나 없앤다는 카르넬레바리움(Carnelevarium) 혹은 고기(Caro)와 배 불리기(Valiens)의 합성어 등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사육제의 또 다른 특징은 일탈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가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는 허락된 일탈’이라고 진단하였듯이 고대 유럽인들은 사육제를 통하여 일상의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고 하였다. 이 일탈을 도운 것이 가면이었다. 가면을 쓰면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진다. 그들은 가면을 쓰는 것으로 본래의 자아로 회귀하여 평소 원하던 것을 표현하거나 실행하였다. 교황이나 주교 등 지배층의 위선과 허구를 가면으로 분장하여 패러디 표현양식으로 타락한 권력을 조롱하였다. 속박된 성(性)으로부터의 해방도 이루어졌다. 피지배층의 맺힌 것을 풀어주어야 사회가 돌아갈 수 있음을 모를 리 없는 지배층은 카니발 동안의 일탈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슬로베니아 푸투이의 쿠렌트오바니예 카니발에서의 탈을 쓰고 분장한 쿠렌트(술의 신)들. 사진 dnevnik.si
동유럽 나라 슬로베니아의 프투이라는 곳에서는 쿠렌트오바니예 카니발이 전승되고 있다. 이 카니발은 풍자나 해학, 역할 전환, 대식, 호색 등 카니발다운 성격은 일절 보이지 않고 오직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어서 빨리 물러나 새봄이 와서 한 해 풍년이 되기만을 기원하는 한국의 동제 성격을 갖는다. 이 카니발 역시 커다란 워낭을 울리면서 온 마을을 헤집고 돌아다니는데 역시 빠지지 않는 것이 험상궂은 가면이다. 가면을 쓰고 분장한 사람들은 동장군을 쫓아내는 주술 행위로 행진 중에 악마에게 겁을 주어 빨리 도망가도록 하려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베네치아 카니발을 대표하는 볼토(Volto. 얼굴) 가면. 망령과 환각을 상징한다. 사진 위키백과
세계적인 가면 축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니발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1162년 아퀼레이아 도시국가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성대하게 벌인 승전 잔치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1268년 7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가 베네치아로 귀환할 때 무슬림 여인들을 데려왔다.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베일을 썼는데 이것이 무척 독특하게 보여 당시 베네치아의 패션 코드인 가면으로 승화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각종 범죄나 사회적 규율을 위반하는 일을 일으켰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가면을 법으로 강제하였으나 카니발에서만큼은 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후 16세기에 성행하였던 이탈리아 대중 연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Comedia Dell’arte)’에서 광대들이 썼던 가면들이 활용되었고 이것들이 오늘날 베네치아 카니발의 주요 가면으로 자리 잡았다. 베네치아 카니발의 가면은 벽사 의미보다는 주로 환상성을 추구한다. 즉 가면을 씀으로써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중세의 세상을 즐기는 것이다.
이렇듯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인에게 있어서 가면은 진정한 자아를 찾게 해주고 일상의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어플리케이션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은 가면보다는 탈을 써왔다. 가면과 탈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엄밀하게 따지면 가면은 얼굴 앞면만 가리는 도구요 탈은 머리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도구이기에 그 차이가 분명히 있다. 먼 고대 때 마을 단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지 종교가 일어나는데, 초기에는 토테미즘이 성행하였을 것인지라 주신으로 모시는 짐승 모양의 탈을 만들어 쓰고 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풍년과 자연재해로부터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였다. 토테미즘에 이어 샤머니즘이 번성하면서 탈은 주로 벽사의 상징으로 성격을 전환한다. 한국인의 대표적 벽사 탈은 삼국시대 무렵부터 존재한 방상씨 탈이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 정벌 때 만들어서 울릉도 방어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끝내 항복하게 만든 대형 사자 형상은 함경도 사람들이 벽사 의미로 받아들여 놀음으로 꾸렸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는 북청사자놀음이다. 처용 또한 벽사 탈의 소재가 되어 춤으로 이어지고 있다. 백제에는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수입한 기악(伎樂)이 있었다. 오나라에서 부처를 모시는 의식으로 시연하였던 기악은 백제로 건너와서는 오히려 중을 희롱하고 외설스러운 내용을 담는 등 풍자와 해학적 성격으로 변하였다. 백제식 탈놀이로 정착한 기악은 일본에까지 전수되기도 한 무언극 형태의 탈놀이로서 그 원형 일부가 조선의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신할아비와 신할미.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인의 탈은 고대에는 종교의식과 벽사의 요소로 활용되었으나 점차 놀이성이 강화되면서 고려 산대잡극과 조선 산대도감극 등에서는 완연한 연희 요소로 성격을 굳혔다. 그러다가 17세기 중반 무렵 두 번의 호란으로 국고가 피폐해짐에 산대도감에서 퇴출당한 광대들이 생계를 위하여 애오개 일대에서 민중을 상대로 산대놀이라는 이름으로 탈놀이를 시연하였는데, 이것이 큰 호응을 얻어 송파와 양주 등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성행하였던 탈놀이들은 해학과 풍자를 풍부히 담고 있다. 양반이라는 지배층과 타락한 불교를 조롱, 힘없는 민중의 설움을 달래어 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북청사자놀음의 사자탈. 사진 위키백과
한국인은 예부터 ‘잘 노는 민족’이었다. 국가적 행사로 치른 상고시대의 천제는 술과 춤, 노래로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는 집단 엑스터시의 용광로였다.동이족이 행하였던 천제 중 신라 때부터 시행되다가 조선 건국과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진 팔관회 이후 이 땅의 축제는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중 사회에서 불붙은 탈놀이는 놀이 민족으로서의 본연을 회복하게 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재건 시기를 거치면서도 탈놀이는 민족 고유문화로 여전히 그 맥을 전하고 있으니, 현재까지 원형을 전승하고 있는 탈놀이를 헤아리면 전국적으로 열다섯 개가 남아있다. 함경도의 북청사자놀음, 황해도의 강령탈춤 은율탈춤 해주탈춤 봉산탈춤, 경기도의 송파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 강원도의 강릉관노가면극놀이, 경상도의 안동하회별신굿탈놀이 동래야류 수영야류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 등 열네 개 탈놀이는 지역 고착 형이고 유일한 전국 유랑 형으로 남사당놀이가 있다. 왕실을 뛰쳐나와 민중을 상대로 시연되었던 산대놀이의 시조는 애오개 일대의 산대놀이인데 이것을 본산대놀이라고 불렀다. 안타깝게도 그 맥이 끊어졌으나, 현재 구파발 일대의 연희자들을 중심으로 복원에 힘을 쓰고 있다고 한다.
안성남사당놀이 공연 장면. 남사당놀이의 탈놀이는 '덧뵈기'로 부른다. 사진 안성시청
지난 11월 30일 우리의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경사가 있었다. 한국인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일탈과 환상의 탈놀이 세계가 마침내 세계인의 유산으로 길이 전승될 수 있게 된 만큼 정부와 예술계는 한국 탈놀이의 부흥을 위하여 머리를 맞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