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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Dec 10. 2022

K를 버려야 K가 산다

잡학은 꿀맛이다

문화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다. 잠시 일어난 어떤 문화적 현상을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가 수용함에 이어 점차 일상에 녹여 생활의 한 축으로 삼을 때 유행의 허상에서 벗어나 비로소 문화로서의 생명력을 갖는다. 그렇게 뿌리 내린 문화는 관성으로 전승되고 원심력으로 사방에 퍼져나간다.


고대 중원 땅은 서역(인도, 아랍)과 대진(로마), 안식(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의 문화가 끊임없이 드나들던 문화 단지였고 한반도는 중원에서 발호하였던 그 문화들을 받아들이던 큰 자루였다. 중원발 문화는 한반도 땅에서 원형으로 남기도 하고 토속과 만나 변형하기도 하였다. 수천 년 전 들어와 올곧게 원형을 유지한 채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는 대표적 중원 문화로 문묘(文廟)가 있다. 기록상으로 고고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태학이 설립되면서 수입되었을 것인 문묘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원의 4성(四聖) 10철(十哲)과 송조(宋朝) 6현(六賢) 등 21위에다 동국 명현 18위를 모시고 봄가을에 성균관에서 치르는 제사다. 석전으로도 불리며 현재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문묘의 원형 전승은 진행 절차를 명기한 홀기(笏記)와 악기, 제기가 보존되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유지해 온 문묘 원형은 오늘날 공산정권 수립 이후 원형을 상실한 중국과 중원에서 쫓겨난 타이완에게 20세기 말 무렵 역으로 전해졌고 그들은 각각의 정황에 맞춰 약간 변형된 형태를 취한다. 일본과 베트남의 문묘도 한국 문묘를 따르되 이들의 절차나 양식 또한 원형과는 조금 다르다. 저네들 관습이 반영된 것이다.      


문묘는 음력 2월 상정일(上丁. 첫번째 丁일)과 음력 8월 상정일에 성균관을 비롯 전국 234개 향교에서 시행된다. 사진 성균관


중원 자생 문화와 중원을 거쳐 들어온 타국 문화 중 한국화된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음악, 춤, 연주 등 각종 가무악 문화는 삼국시대 때부터 들어오면서 이리저리 우리 식으로 변형하면서 토착화되었다. 처용무의 큰 탈은 북제(北齊) 난릉왕(蘭陵王) 장공(長恭)의 전설에서 유래한 대면희(大面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악백희 중에는 중원 것 외에 서역, 대진, 안식, 선국(미얀마) 등의 기예나 환술 등도 기원 전후 중원에 유입되었다가 한반도 땅에 전래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외 음식, 관복, 일상 의상 등도 대량 들어와 우리 화 되었다.


송나라 때 썅푸(相撲)로 불리며 크게 유행하였던 고고려의 씨름. 썅푸 명칭은 일본에서 스모가 되었다. 사진 zhihu


그렇다고 고대 한국인은 중원으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 문화 수유를 해 주었던 중원은 고고려의 수박희(手搏戱) 각저(角觝)와 신라의 입호무(入壺舞) 신라박(新羅狛)을 저네들 왕실 문화로 수용하였다. 이중 고고려의 각저는 송나라 때 특히 썅푸(相撲)라는 이름으로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외교관이자 탐험가 장건에 의하여 개척된 비단길을 타고 신라의 문물이 동로마제국에까지 건너갔고, 왕인과 아직기 등에 의하여 왜 열도에 전해진 백제 문화의 정수는 6세기에 발현한 아스카(飛鳥) 문화의 출발점이었다. 고고려는 제지술과 제묵(製墨) 기술, 미술, 조각, 불교 등을 전하였으며, 신라는 선박 건조기법과 제방 축조술을, 통일 신라 때는 마침내 유교문화까지 전파하기에 이른다. 고대 왜 열도는 제2의 한반도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한반도 문화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신라박과 입호무. 12세기 당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는 신라의 44가지 무악과 산악 장면이 담겨있다.

  

중원에 원나라가 세워진 후 고려에는 몽골풍이 대거 수입되어 조선시대 때까지 전승되었다. 군인들이 입었던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는 겉옷 철릭은 몽골의 텔릭이라는 융복에서 기원하였고, 사대부들이 겉옷에 덧입는다고 하여 더그레라고도 부른 답호는 몽골 옷 비갑에서 생겨났다. 고려 말 무렵부터 왕실이나 귀족들이 즐겨 쓴 몽골 언어는 조선에 와서 아예 우리말로 정착한 것들도 있다. 식사의 높임말인 진지, 궁중의 직급 낮은 궁녀인 무수리, 삼청(三廳.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에서 잡일을 하는 조라치, 주방을 이르는 반빗과 요리사 반빗아치, 매사냥꾼 수할치, 조랑말, 사돈, 왕실과 권력가 집안의 갓난아이를 높여 부르는 아기, 아가씨의 아가, 족두리 등이 대표적 정착 몽골어들이다.

몽골풍 전래 못지않게 고려에서도 각종 문화가 중원으로 넘어가 고려양으로 불리면서 원나라 왕실과 귀족들의 선호를 받기도 하였다. 고려 신발과 두루마기는 귀족들의 애용품이었고, 풍성한 치마저고리와 뒤로 올린 머리, 가체를 이용한 얹은머리, 붉은 댕기, 향낭, 은장도 등은 원나라 부유층 여인들을 현혹하였다. 치마저고리는 명나라가 세워진 후 백 년 정도 지났을 무렵 중국 고유의 의상이 아님을 이유로 금지되었으나 두루마기는 명나라 말 때까지 전승되었다. 그 외에 시루떡과 상추쌈, 만두, 약과, 독특하게 검은색을 머금는 쪽 물감 등은 오늘날까지도 몽골 사람들의 일상 풍속이 되어 있다.    

 

후한의 환관 채륜이 발명한 종이는 삼국시대 때부터 동이족의 일상 품목으로 자리 잡은 후 고려에 이르러서는 닥나무를 재료로 하는 백추지, 견지, 명표지, 청지 등 명품 종이가 생산된다. 중원사람들은 이 ‘고려지(高麗紙)’를 한 장이라도 얻으면 크게 기뻐하였다. 송나라 사람 손목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다.”라는 말까지 남기고 있다. 조선의 종이도 유명하였다. 설화지, 상화지, 경면지, 죽엽지 등은 조선에서 건너간 사절단이 선물로 나눠주면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영웅문(英雄門)』으로 1990년대 한국에 무협지 붐을 일으켰던 홍콩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김용(본명 사량용)의 직계 선조인 명나라 문인 사계좌는 자신이 쓴 『죄유록(罪唯錄)』 권4 <관복지(冠服志)>에 조선 선비들이 말총으로 만들어 입었던 치마 같은 겉옷 마미군(馬尾裙)이 송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성화 연간(1465~1478)에 마미군(馬尾裙)이 유행하였다. 이것은 조선에서 시작하여 경성 식자에게 유입되더니 다른 사람들도 점차 이를 입는 것에 익숙해졌다.”    


조선에서 건너가 명나라 식자와 관료에게 크게 유행하였던 마미군(馬尾裙) 의상. 사진 ming-yiguan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후반기까지 일본 정부는 수준 높은 조선의 문화를 국고 탕진까지 감내하며 원하였다. 이에 고려 말부터 있었던 통신사 기능을 이어받은 조선은 1420년 세종 임금 때 송희경을 정사로 삼아 파견한 것을 필두로 순조 임금 때까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총 18회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각지를 통과하는 곳마다 그들은 축제 분위기로 맞이하였고 수행원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숙소는 미어터지기 일쑤였다. 조선통신사의 최고 히트작은 마상재(馬上才)였다. 병자호란 중이었던 1636년 인조 임금은 통신사 일행에 마상재(馬上才) 연희자를 함께 파견하여 도쿠가와 이에미쓰 쇼군을 위하여 곡예를 펼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다. 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단이 아닌 문화 전파 성격이 강하였기에 일본의 지배층뿐 아니라 민중에게도 문화적 영향을 지대하게 끼침으로써 일본 사회의 발전에 근본적 토양이 되어주었다.


      

2022년 5월 미국 백악관에 초청받아 방문한 BTS. 사진 위키피디아
K-Pop 아이돌이 입는 의상을 K-Fashion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 해외 유명 블로그. 사진 blog.trazy.com


21세기 들어 한류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우리는 이 Korean Wave를 K로 칭하며 인기 좀 붙는다 싶은 장르마다 접두사로 붙여 쓰고 있다. K-Pop, K-Drama, K-Movie, K-Food, K-Costume, K-Fashion, K-Medical 등등. 조성진과 임윤찬이 각각 굴지의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여기에도 어김없이 K가 붙어 K-Classic까지 탄생하고 있다. 하지만 K를 붙임으로써 그 문화적 범위는 K로 국한된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미 유럽권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K에 대한 반발심리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스시를 J-Sushi라고 부르지 않듯이 한반도에서 피어난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 그곳 사람들의 일상 문화로 자리 잡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K 명칭은 내재적 전략 개념으로만 가동하고 이제 대외적으로는 K를 버릴 때이다. 그래야 K가 산다.      


최정철 /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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