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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ug 26. 2024

멕시코 ‘죽은 자들의 날’ 축제와 한국인의 죽음의 축제

Stardoc.kr 최정철 칼럼

수확 시즌에 명절 새겨 즐기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풍속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추석인데, 아시아권은 양력의 나라 일본 오봉절을 빼고는 음력 8월 15일을 추석으로 쇠고, 서양은 10월 초부터 11월 중에 이른바 추수감사절을 지낸다.


추석 만월. 사진출처=pinterest.com


베트남 쯍투는 오늘날 어린이날 성격으로 변질되었고, 중국 중추절은 만월을 상징하는 월병을 먹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명절, 미국의 땡스기빙데이와 독일의 에른테당크 페스트, 프랑스의 투쌩 등은 기독교 문화를 근거로 하는 추수감사절이다.


여기에서 새겨볼 것이 있다. 추석 때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느냐 않느냐인데, 추석 때 조상을 기리는 나라에 한국과 일본, 그리고 의외로 멕시코가 있다.


죽은자의 날 오프렌다 장면. 사진출처=11alive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 축제는, 콜럼버스의 북미 항로 발견(1492)과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테카 제국 정복(1520) 전, 이미 14세기부터 제국의 수도인 호수 도시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선인장의 땅. 현재의 멕시코시티)에서 시작된 축제다.

이 축제의 주인공인 ‘죽은 자들’은 일 년에 한 번 이승의 가족과 친구들을 찾아오는데 그들을 위한 의식과 놀이가 축제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원래 아즈테카의 멕이카(Mex-i-ca, 원주민)들은 옥수수 수확 시기인 여름 초입 때 이 축제를 즐겼다.

그랬던 것이 누에바 에스파냐, 스페인 식민지가 되고 나서부터 가톨릭 영향을 받아 만성절(萬聖節,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11월 1일)을 기점으로 거행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만성절 전야인 할로윈데이(All Hallow Eve. 할로우는 성인), 만성절(All Saints’ Day), 모든 영혼의 날(All Souls‘ Day), 즉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가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 축제 일정이 되었다.


영화 ‘007 스펙터’ 오프닝에 나오는 죽은자의 날 퍼레이드 장면. 사진출처=‘007 스펙터’ 스틸컷.


축제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묘지를 찾아가 참배와 청소를 한 후 설탕을 녹여 예쁘게 만든 설탕 해골(Sugar Skull)과 죽음의 꽃이라고 부르는 마리골드(Marigold), 그리고 촛불로 무덤을 장식한다. 이것을 오프렌다(Ofrenda)라 한다.

사람들은 오프렌다를 차려놓고 이제 전통 술과 빵을 차례 음식으로 바쳐 고인의 혼을 기린다. 그들의 이런 의식은 아즈테카 신화에서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죽음의 여신 믹크테카시우아틀(Mictecacihuatl)에게 제사 지내던 것이 시원이라고 한다.


죽은자의 날 퍼레이드 장면. 사진출처=pinterest


그렇게 조상 잘 기렸으면 이제부터 신나게 놀 차례다. 갖가지 해골 형상으로 분장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죽음의 퍼레이드’를 꾸린 채 춤과 노래를 즐기며 온 도시를 활보한다.


멕이카의 후예들은 왜 죽은 자들, 그리고 죽음을 위한 축제를 벌여왔을까? 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또 다른 지혜로 삼고 있음이다. 즉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비춰주는 거울로 여기는 것이다.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거듭나기. 이것이 이 축제가 던져주는 화두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원래 산 자들의 축제였다. 호남 서해지방의 초상집에는 씻김굿을 벌여 죽은 자의 천도뿐 아니라 산 자들을 위로하기도 했으니, 특히 상주를 달래기 위한 재담꾼 다시래기는 초상집을 웃음판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진도다시래기 장면.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남 지역과 강원도 일대의 오구굿은 죽은 자의 천도 의식을 통해 산 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잔치였다. 심지어 곧 죽을 사람을 모셔놓고 벌이는 산 오구굿까지 있었을 정도다.

그런 식으로 옛 한국인들은 한 인간의 죽음을 단순히 애끓는 이별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잔치를 벌여 산 자들에게 새로운 기운을 새겨주는 축제 인자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인은 이 죽음의 잔치를 외면하고 있다. 언제인가 ‘죽음’과 인연 많은 어느 지역의 시청 고위 공무원에게 ‘죽음의 축제’를 제안했더니 얼굴 허옇게 변하는 것을 봤다. 우리는 ‘죽음’ 하면 그저 ‘죽음’만 생각하는 것이다. 용기 없고 지혜의 안목이 짧은 것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즐겼던 ‘죽음의 축제’는 과연 부활할 수 있을까?



글=최정철 | 축제감독. 전 한국영상대학교 교수.


출처 : 스타다큐(https://www.stardoc.kr)

https://www.stardoc.kr/news/articleView.html?idxno=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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