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흐르니 완연한 봄이다. 봄 하면 떠오르는 것이 봄비 아닐까 싶다. 그 봄비가 지난주 전국을 촉촉이 적셨다. 봄비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얇은 박사(薄紗) 커튼처럼 아련하게 뿌려지면서 삭막한 세상 풍경을 낭만적으로 보이게끔 걸러주는 것 아닐까 싶다. 시인에게 있어 봄비는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기 마련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항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시인 이수복의 아름답고 아련한 시다. 물론 비라는 것이 봄에만 내리는 것은 아니요, 봄비만 예쁘고 아름다울까. 사철 비 내릴 때마다 사연과 전설도 함께 내리는 것이다.
감성적 보컬로는 조용필도 울려 보낸 슬픈 영혼의 가수 박인수(사진 외쪽 가운데 위치). 그가 부른 '봄비'가 수록되어 발표된 옴니버스 LP(1980년). 사진 최정철
한국인은 이사하는 날 예기치 않게 비가 내리면 불편해하기는커녕 상서로운 비로 여겨 기뻐한다. 이사 들어가는 새집에서 부귀영화가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그처럼 한국인의 비 사랑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는 더 유별나기에 노래를 불러도 비 이야기가 들어가는 노래부터 찾는다. 가요 역사상 비를 노래해서 인기 얻지 못한 가요가 없을 정도다. 옛 가요를 헤아리면 손인호의 <비 내리는 호남선>,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거리>, 김추자의 <빗속의 여인>, 정훈희의 <빗속의 연인들> 등이 유명하였고, 원조 소울(Soul) 가수 박인수의 <봄비>를 비롯하여 송창식의 <이슬비>, 김정호의 <빗속을 둘이서>, 채은옥의 <빗물>, 윤형주의 <어제 내린 비>, 윤정하의 <찬비>, 최헌의 <가을비 우산속>, 이은하의 <봄비> 등은 1970년대를,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배따라기의 <비와 찻잔 사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은 1980년대를 사정없이 비에 젖게 만들었다.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영화 OST로 쓰인 강인원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당대 큰 인기를 얻으며 젊은 청춘남녀들의 마음을 수채화로 물들였다. 한국 최고의 롸커 이승철은 <비와 당신의 이야기>로 여고생 여대생들을 혼절시킬 정도로 최고 인기를 얻었으며, 급기야 ‘비(Rain)’라는 가수가 등장하여 한류 확산에의 선두주자가 되는 일도 일어났다. 영미권 팝 음악 중에서도 어쩌다 비 노래가 있을라치면 원곡이든 번안곡이든 무조건 환영받았고 21세기 들어서도 비를 품은 새로운 노래들이 이 땅에 내려지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인의 서정적 감성을 가장 아리게 그린 순수한 소년 소녀의 슬프고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 황순원 단편소설 '소나기'. 사진 주독일한국문화원
그렇게 비를 좋아하는 만큼 한국인은 많은 비를 품고 살고 있다. 빗방울이 작은 것부터 보면 땅에 닿기도 전에 증발하여 싱겁다 싶은 마른비, 가루처럼 푸슬푸슬 내리는 가루비, 안개처럼 희미하게 내리는 안개비, 안개비보다는 눈에 띄는 는개비,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비, 이슬비보다 조금 굵은 빗방울이 끊임없이 길게 금 긋듯 실처럼 내리는 실비(가랑비), 가늘고 잘게 내리는 잔비, 돗자리 칠 때 쓰는 날실 정도의 굵기로 내리는 날비, 보슬거리며 내려 곧 그치려니 하는 중에 끝내 사람 옷을 죄 적시고 마는 보슬비(가랑비), 싸래기처럼 후루룩 내리는 싸락비, 빗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 발비보다는 조금 더 세게 내리는 주룩비, 장대처럼 굵은 빗줄기로 세차게 퍼붓는 장대비(작달비), 무덤 다지는 달궁이가 짓누르듯 거세게 내리는 달구비, 맞으면 통증이 느껴질 정도 굵고 세차게 내리치는 채찍비, 물 퍼붓듯 내리는 억수(호우), 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모다깃비 정도를 들 수 있다.
한국인은 농경민족이었기에 농사와 관련하는 비들이 제법 있다. 농사에 도움 되는 꿀비, 필요할 때 알맞게 내리는 단비, 농작물 잘 자라도록 내리는 택우(澤雨), 모낼 무렵에 내리는 목비, 모를 다 낼 만큼 넉넉하게 내리는 못비, 긴요하게 내려주는 약비, 여름철 우기에 내리는 오란비(장마), 초가을에 내리다 개고 내리다 개는 건들장마, 여름날 논일 없을 때 낮잠 자기 좋게 내려주는 잠비, 한바탕 시원하게 내리고 금방 그치는 소나기, 먼지나 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먼지잼, 장마에 쌓인 진흙을 씻어내는 개부심, 바람까지 동반하는 바람비, 가을걷이 끝난 후 떡 해 먹으며 쉬라고 내려주는 떡비, 겨울철 농한기 때 술 마시며 놀라고 내려주는 술비 등이다.
해학적 코드로 풀어내는 비들도 있다. 맑은 날에 찔끔 내리다 마는 여우오줌비, 과부 보쌈하듯 밤에 몰래 내리는 도둑비, 마누라 바가지 긁듯 쉬지 않고 장시간 내리는 누리비가 그것들이다. 때를 이르는 비를 들자면 해 질 무렵에 내려 저녁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모우(暮雨), 음력 보름날에 내리는 보름치, 음력 그믐날에 내리는 그믐치 등을 들 수 있고.
비상한 비들도 있다. 비가 내리는 중에 잠시 그치는 웃비, 햇빛을 피해 한쪽으로 내리는 해비, 우레를 동반하는 우레비, 맞으면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며 병을 얻는 질우(疾雨), 장마철도 아닌데 오랫동안 음산하게 내리는 음우(陰雨), 하늘에 구름이 전혀 없는데 내리는 천루(天淚) 혹은 천읍(天泣), 추운 날 둥글거나 불규칙하게 생긴 얼음 입자로 내려 지면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동우(凍雨. 우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022년 1월 4일 미국 텍사스에 내린 물고기 비. 사진 KBS TV News 화면 갈무리
한국인의 비는 대체로 시적이고 낭만적이거늘 다른 나라들의 비는 어떨까? 동남아시아 땅의 스콜(Squall)은 단 몇 분 이내에 엄청난 돌풍과 함께 억수처럼 쏟아붓는 소나기를 말하고, 중국에는 공장 매연에 의해 형성된 검은 구름이 비로 변해 내리는 흑우(黑雨)와 황사 섞여 내리는 토우(土雨)가 있다. 대서양 기후에 영향받아 궂은날이 많은 서유럽 나라에서는 비가 낭만 타령으로 불릴 리 없다. 유럽 땅 그 외 나라들 역시 비에 대한 감상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산업혁명 여파로 1870년대부터 영국 땅에서 생겨난 공해 중 하나가 산성비다. 기후학자 로버 스미스가 1872년 학회에서 처음 거론한 비로, 맞으면 사람 머리털 빠지게 하기에 머리숱 없는 사람들로부터 격렬히 항의받는 비다. 남미 서해안 지역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가루아(Garua)는 구름이 낮게 깔릴 때 짙은 안개가 끼면서 물방울을 만들어 내리는 비다. 남아프리카 땅에 내리는 수우(樹雨)는 높은 산 속에 낀 구름에서 나온 작은 물방울이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다가 바람에 의해 모여 커지면서 폭우로 변하는 비다. 중미 온두라스에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물고기 떼가 섞인 비가 내린다. 바다에서 생긴 용오름과 폭풍이 만나 만드는 현상으로 이렇게 내리는 비를 괴우(怪雨)라 한다. 외국의 비들은 분명 한국 땅의 비와 같은 대접은 받지 못하는 듯하다.
사분오열의 혼란 속에 끝난 20대 대통령 선거의 여야 후보 득표 판세. 사진 위키백과
최근 우리는 역대 최악급 대통령 선거로 극도의 분열을 겪어야 했다. 극우파와 극좌파, 정치 철새들, 권력욕에 눈먼 기득권층, 광신기독교 집단과 혹세무민 무속인 등등 가장 해로운 인간들이 제 세상 만난 듯 활개 쳐대며 진지해야 할 선거를 혼돈의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도 그렇지만 대선이 끝났음에도 태반의 국민이 아직도 원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듯하여 문제다. 후유증이 이토록 심한 대선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이번 대통령 선거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괴우이지 않았나 싶다.
지난주에 내린 봄비에 사람들의 충격이 씻어지는가 했으나 괴우는 괴우인지 별무소득인 듯하다. 이럴 때는 봄비 대신 여름 소나기를 억지로라도 끌어당겨서 한 차례 내리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소나기를 백우(白雨)로 부르는 것은 소나기 그치고 나면 곧바로 날씨가 하얗게 맑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백우가 급시우(及時雨)로 내려주어 우리의 어지러운 심사를 일거에 개부심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