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한국인의 봄축제 삼짇날

세상을 여는 잡학

어제가 음력 3월 3일 삼짇날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는 원단, 정월 대보름, 상사, 한식, 단오, 추석, 중구, 팔관, 동지 등 9대 세시 중의 상사가 곧 삼짇날이다. 상사(上巳)는 그달의 첫 번째 사(巳)가 들어가는 날을 말한다. 따라서 해마다 날짜가 바뀐다. 동이족은 고대 때부터 상사가 아닌 3월 3일을 정하여 삼짇날이라 불렀다. 5월 5일 단오, 6월 6일 유두,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구처럼 겹치는 양수(陽數)로 양기를 더욱 북돋우려 한 것으로 봐야 한다. 고려사에 삼짇날을 상사로 기록한 것은 부득불 한자로 표기하여야 했기에 편의상 그랬을 것이다.                   


유숙의 수계도(修契圖. 1853년). 삼짇날 한양에 사는 역관과 향교 훈도 등 30여 명이 남산 묵계(墨溪)에 모여 계음을 즐기고 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삼짇날이 되면 갖가지 풍속을 즐겼고 그중 중요하게 여긴 것이 계음(禊飮)이다. 계음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해 뜨는 동쪽의 양기를 얻을 수 있는 동류수(東流水)를 찾아 몸을 씻어 부정 액운을 없앤 후 술 마시며 노는 것을 말한다. 한반도 최초의 계음 흔적은 가야 건국 신화에 보인다. 서기 42년 하늘에서 구지봉(龜旨峯)으로 수로가 담긴 금빛 상자가 내려올 때 아홉 촌장은 백성들과 함께 계음을 즐기고 있었다. 이후 사국(고고려·백제·신라·가야)~통일신라~고려를 거친 계음은 조선에 이르러서는 정부가 홍문관을 통해 주악(酒樂)을 내려 관리들이 즐기도록 널리 권장하였을 정도로 삼짇날의 주요 세시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      


중원 한족은 사마의가 조조의 위나라를 폐하고 세운 진나라 때부터 동류수를 찾는 대신 구부러져 흐르는 물을 만들어 술잔 띄우고 시 지으며 놀기를 즐겼다. 그것을 곡수연(曲水宴)이라 한다. 국내 학계에서는 이 곡수연이 한반도 계음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나 사대적 망상에 불과하다. 계음이 동이족 고유의 세시 풍속임은 이렇게 증명할 수 있다. 첫째, 공자 제자인 증점이 봄날에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오겠다는 계음 풍속을 말하자 공자가 크게 기뻐했다. 이에 모든 제자가 따랐고 그 후 공문은 계음을 유풍으로 전승했다. 공자는 죽기 전 자신이 은나라 동이족 후예임을 고백했다(“予始殷人也”. 사마천 사기 공자세가 권 47). 그렇다면 공자가 크게 기뻐하고 공문유풍으로 전승되기까지 한 계음은 공자 조상의 나라인 은나라 때부터 있었던 동이족의 세시 풍속인 것이다. 둘째, 은나라 외에도 주·진·조·북위·수·당은 한족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이족 나라들이다. 이중 동이 선비족의 나라 북위에 삼짇날 계음 풍속이 있었다. 셋째, 유두(流頭)날이나 삼짇날에 동류수를 찾는 것은 동이족만 그리한다. 북위에서 갈라져 나간 서위의 선비족 출신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다. 그의 아들 현종이 삼짇날에 동류수로 나가 계음을 즐긴 내용을 당 시인 최호의 시에서 볼 수 있다. 동이족과 동류수와의 관계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넷째, 현존하는 명 청대의 곡수를 보면 매우 작고 주로 집안이나 집 밖 근처에 만들어져 있다. 언제든 사람들 불러모아 즐기기 위한 용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족의 곡수연은 연중 수시로 열린 것이요, 동이족의 계음은 오로지 삼짇날에 맞추고 있으니 시행 날짜가 서로 다르다. 일본에서 8세기에 최초로 시행한 곡수연이 상사에 열린 것은 중원의 봄철 곡수연 역시 상사에 맞추었다는 또 다른 근거이기도 하다. 그렇듯이 계음은 고대 중원에서든 한반도에서든 삼짇날에 동류수를 찾아 즐긴 동이족 고유의 풍속인 것이다. 물론 한반도 사람들도 곡수연을 즐겼다. 신라 경주의 포석정이 곡수요, 조선 시대 선비들은 집안에 곡수를 만들어 지인들과 함께 음주시회(飮酒詩會)를 자주 열었다. 계음과는 달리 언제든 즐길 수 있는 한족 곡수연을 모방한 놀이였다. 한족 곡수연을 기원으로 삼는 것은 신라 때부터 있어 온 곡수연이요, 1년에 오직 삼짇날에만 즐기는 계음은 민족 세시 풍속이었고 곡수연은 연중 즐기던 일상 놀이로 이해하면 깨끗이 정리된다.              

삼짇날에 즐기는 풍속은 계음 외에도 다양하다. 마을 삼신당에서 자손 바라는 고사를 올렸고, 용왕당에서는 가뭄 들지 않기를 빌었다. 춘경제(春耕祭)라는 의식도 치렀다. 춘경제는 강릉 단오굿처럼 읍치제(邑治祭) 형태를 보인다. 읍치제란 지역 수령이 참여하되 나서지는 않고 육방 중 호방과 지역민이 주도하여 치르는 제사를 말한다. 치자(治者)와 백성이 함께 행복을 누리자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춘경제는 호방이 소를 끌어 논을 가는 시범을 보인 후 풍년 기원 제사를 치르는 식으로 진행하는데, 지역에 따라 소 대신 목우(木牛)를 쓰기도 하고 조선 후기 때부터는 탈놀음을 곁들이기도 했다. 춘경제는 제주의 입춘굿, 강원도의 입춘제, 함경도의 나경(裸耕)과 맥을 같이 하는 전형적인 봄철 풍농 기원 의식이다. 춘경제는 중국에도 있었다. 주로 푸젠성 등 중국 양쯔강 이남 지역에서 행하여졌다. 인도인들 역시 널리 시행한 듯하다. 싯다르타의 득도는 춘경제에 참여했다가 늙은 농부가 소 몰며 밭 가는 모습에 충격받아 가출한 것에서 시작한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것으로 추정되는 농경문청동기. 함경도에서 행해지던 나경(裸耕) 모습이 새겨있다. 벌거벗은 농부가 여자를 상징하는 지신(地神)과의 섹스로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적 


삼짇날 되면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부터 만나야 한다. 제비를 보면 절 세 번 하고 왼손으로 옷고름을 풀었다가 다시 여민다. 그래야만 여름 더위를 이길 수 있다. 나비도 만나야 한다. 흰나비를 보면 그 해에 집안사람 누군가 죽어 상복을 입어야 하고, 노랑나비를 만나면 한 해 큰 복을 얻는다. 

세시 명절에 음식 빠질 리 만무다. 주로 떡이나 부침개를 해 먹는다. 속에 팥을 넣은 방울 모양의 흰떡 네다섯 개에 각각 색깔을 달리 들여 실로 꿰듯 익혀내는 산떡이 있고, 쑥을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찌는 쑥떡, 여기에 송기까지 넣는 고리떡이 있다. 이름있는 양반가에서는 화면(花麵)이나 수면(水麵)이라는 진귀한 음식을 만들어 사당에 바친 후 가족이 음복했다. 진달래꽃과 녹두가루를 같이 반죽하여 익힌 것을 전병 모양으로 말아 가늘게 썬 다음 그것을 오미자 물에 담가 잣을 띄운 것이 화면이요, 부침개 형태 대신 국수로 만들어 먹는 것이 수면이다. 일반 민가의 젊은 여인들은 삼짇날을 답청절(踏靑節)로도 부르는 것을 무색하지 않게 하려고 산과 들로 몰려나가 진달래꽃 따서 화전을 부쳐 먹었다. 화전 먹기에 앞서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동무 중 연장자를 뽑아 ‘좌상 노인’을 정한 후 화전을 놓고 한 사람씩 한 문장의 가사를 지어 노래로 읊는다. 듣고 있던 좌상 노인의 심사평으로 장원을 뽑은 후 각자 지어낸 가사들을 이어붙여 노래를 불렀으니 그것을 화수가(花酬歌)라 한다. 


떡은 사람을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공동체 의식고취 음식이다. 삼짇날의 대표 세시 음식인 진달래화전. 사진 위키백과


놀 거리도 제법 많다. 꽃술끼리 부딪치게 하거나 혹은 서로의 꽃술을 얽어 잡아당겨 누구 꽃잎이 더 많이 떨어졌느냐로 승패를 겨루는 꽃 싸움이 있다. 풀 싸움도 있다. 질경이처럼 질긴 풀을 서로 얽고는 힘껏 잡아당겨 누구 것이 끊어지는지로 승패를 가른다. 술래를 정한 후 각자 이런저런 풀을 뜯어 다시 모인다. 술래는 자기가 따온 풀을 하나씩 꺼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때마다 술래가 보인 풀과 같은 것을 내어야 한다. 술래의 풀과 같은 것을 누가 많이 따왔는지를 가려내어 상벌을 주는 식이다. 사내아이들은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계집아이들은 풀로 만든 인형을 만들어 놀았다. 

삼짇날은 초승달이 뜨는 날이기도 하다. 옛 조상님들은 미래 번영을 상징하는 신성(新星)의 기운이 드는 날 밤에 후손 생산을 위한 거사를 성스럽게 치렀고, 그 열 달 후 음력 1월에 태어난 자는 어딜 가도 귀인으로 대접받았다. 


서울을 관통하는 청계천은 동류수(東流水)이다. 사진 위키백과


삼짇날 풍속을 현대적 시의로 재연함으로써 전국 각지의 봄축제로 재탄생시키면 어떨까 한다. 멀리 산으로 들로 나갈 것 없다. 가까운 도심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서울 경우는 청계천이 마침 동류수다. 그 일급수 물에 발 담가 부정 씻어낸 후 계음주에 떡 화전 나누어 먹어 서로 단합을 다지고, 웃음소리 난무하는 꽃 싸움 풀 싸움이며 아이들 버들피리에 풀 인형 각시 뛰어놀고, 화수가 경연대회와 풍요 기원의 가무악 춘경제라, 어찌 아름다운 축제가 아닐 것인가.      

                                                                                

2022.4.4.

작가의 이전글 비를 사랑하는 한국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