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여는 잡학
중국 상하이가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도시 전체를 봉쇄하면서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을 원천차단하고 있다. 시절 좋았을 때 상하이는 세계적인 관광지였다. 금융가를 뒤덮은 고층 건물들을 유유자적 바라볼 수 있는 황푸강 와이탄(外滩) 산책로, 고풍스러운 유럽식 옛 건물들이 즐비한 상하이라오지에(上海老街), 황푸강에서 서쪽으로 20분 걸어가면 나오는 화려한 난징루(南京路), 그곳으로부터 10분 걸음의 서남쪽에 있는 ‘상하이의 홍대’ 텐즈팡(田字坊) 등이 대표적 핫플레이스다. 한국인은 여기에 한 곳을 더 추가한다. 바로 난징루와 텐즈팡 중간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다. 한국독립을 이끌었던 거목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정성껏 재현 전시되고 있는 옛 모습들을 보면 눈이 시큰거리고 심장이 뛰기 마련이다.
오늘이 1919년 4월 11일 일제의 한반도 무력강점을 부정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된 지 104년째 되는 날이다. 상하이의 임정 청사는 대개 한 곳에만 존재한 것으로 알 것이다. 현재 우리가 찾아가는 임정 청사는 푸칭리(普庆里) 마땅루(马当路) 청사로, 1926년부터 윤봉길 의거 직후인 1932년 5월까지 존재했다. 그렇다면 1926년 이전의 청사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 된다. 2019년 한국 정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프랑스 조계지 구역이었던 샤페이루(霞飞路), 지금의 화이하이쫑루(淮海中路)에서 옛 사진과 함께 이전 청사의 흔적을 각고 노력 끝에 찾아내었다. 이 청사는 푸칭리 청사로부터 서쪽으로 5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이 청사 이전에 또 따른 청사들이 있었다. 임정 수립 선포 직후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진슨푸루(金神父路)의 청사가 최초 청사였고 이후 창안리(長安里) 민단 사무소 등을 거치다가 샤페이루에 자리를 잡은 것인데, 이곳 역시 한 달 만에 프랑스 조계지 당국에 의해 폐쇄당했다. 그 후 상하이 국제공조 조계지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일제의 추적을 피해 숨 가쁘게 이곳저곳 옮겨 다니던 끝에 마침내 1926년 지금의 푸칭리에 안착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도 몇 년밖에 버티지 못했다. 중일전쟁의 시동을 걸고 있던 일제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중국 군대에 일격을 가한 후 본격적으로 임정에 압박을 가함에 어쩔 수 없이 상하이를 떠나서 항저우(1932~1935), 자싱(1935), 난징(1935~1937), 창사(1937~1938), 광저우(1936~1939), 치장(1939~1940), 충칭(1040~1945) 등으로 전전하는 고난의 대장정을 해야 했다.
대한민국 광복의 꽃을 피운 기반이 된 상하이 임정 탄생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역사가 있다. 일제 강점 후 이 땅의 피 끓는 젊은이들은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고 해외로 퍼져 나갔다. 그들 중 뜻을 모은 선우혁, 여운형, 조동호, 한진교, 장덕수, 김철 등 6인은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세운다. 이후 서병호, 김구, 이광수, 안정근 등도 가담한 이 단체는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있었던 한인 학생들의 독립선언과 3월 1일의 만세 운동과 직결하게 된다.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이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윌슨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기에는 신한청년단의 치밀한 전략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자 전후수습을 위한 강화회의가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에 맞춰 한국도 대표를 보내 회의에 참석시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규탄하고 한국독립을 널리 주장하자는 의견이 일어났다. 많은 단체 중 신한청년당이 그 일을 맡기로 하고는 김규식을 선발, 파리에 보내기로 했다. 당시 김규식은 당시 조선상고사의 신채호, 한국통사의 박은식, 임꺽정의 홍명희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단체를 결성하고 있었고, 신한청년당과는 자연스럽게 일체로 지냈다.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한 까닭은 김규식이 일찍이 한국 땅에서 언더우드로부터 영어를 배워 영어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김규식의 파리 체제 경비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하던 안희제가 당시 돈으로 거금인 3천 원(지금의 1억 5천만 원)을 대기로 했다.
그렇게 대표 뽑고 경비도 마련했으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한국을 어느 누가 알아줄 것이냐였다. 이에 신한청년당은 일제의 심장 도쿄와 조선의 중심지 경성에서의 ‘대한독립 선언’ 운동으로 전 세계에 ‘코리아’의 존재를 각인시키기로 한다. 그에 앞서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명의로 윌슨에게 1918년 12월 ‘독립청원서’를 보냈고, 만주 지린성으로 옮긴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만주,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 독립운동가 39명이 모여 2월 1일(음력 1월 1일) 항일무장투쟁을 결의하는 ‘무오독립 선언(음력으로 무오년인 1918년 12월에 선언문 결의)’을 발표한다. 이어서 일어난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이 전 세계에 대서특필 타진되면서 김규식의 파리 행보는 든든해질 수 있었다. 신한청년당이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인 1919년 1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유인물을 각국 대표들에게 전한 김규식은 강화회의가 1월 18일부터 시작됨에 회의 참석을 시도했으나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이에 신한청년당은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임정을 서둘러 세웠으니 그날이 그해 4월 11일이요, 임정은 그 즉시 김규식에게 외무총장이자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 위원으로 임명하는 신임장을 만들어 발송했다. 그 결과 6월 30일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표단이 한국독립 문제에 관한 공식보고를 청취했고, 7월 28일 프랑스 동양정치연구회에서는 한국과 중국 문제 연설회를 개최해 주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회의 기간 내내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 한국민대표부’를 운영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한 김규식은 비록 일제의 방해로 한국독립에 관한 열강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지는 못했으나, 비정부 단체 등 유럽의 민간인들로부터는 대단한 호응을 얻으면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 당시 한국과 같은 신세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도 대표를 파견하고 있었다. 그 대표가 바로 호찌민이었다. 그러나 호찌민은 김규식처럼 국가를 대표하는 공식 신분이 아니었기에 회의장 입구에는 발도 들이지 못했다. 호찌민이 땅을 쳤을 저네들 임정의 부재였고, 그에 반해 한국은 상하이에 보란 듯이 임정을 세워놓았기에 유럽 일대에 ‘코리아’를 울려 퍼지게 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을 이끌던 선조들의 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위대했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후 해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를 이승만 정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언급했다. 이 논리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이끌었던 악종 극우단체 뉴라이트에서 만들어졌다. 뉴라이트는 이승만이 친일세력인 저네들을 각별하게 옹호해 준 것에 크게 감읍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김구와 상하이 임정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직 이승만 정부만 인정함으로써 상하이 임정 고난사를 연장하려 했다. 일제 강점 후 임정은 전 세계 곳곳에 있었으나 일대 통합한 것이 1919년 4월 11일의 상하이 임정이다. 그 상하이 임정에서 조국 광복의 씨가 발아되었기에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이곳에서 찾아야 함이 마땅한 것이요, 그렇기에 문재인 정부가 이를 분명하게 공식화한 것이다. 역사는 그 시대의 사실과 집단 지성의 교차 점검으로 증명되는 것이지 일부 집단의 억지 지식으로 정해지는 것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에 옛날을 돌아보자니, 이번에 정권 교체된 것이 저네를 위한 것으로 착각할 임정 부정의 뉴라이트 포함, 친일 반민족 행각 저지르며 떵떵거릴 괴물들 생각에 혈압만 잔뜩 오를 뿐이다.
2022.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