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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월 Sep 18. 2023

8일차

2부

8일차 2


사실 나는 나와 그렇게 친분이 있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식사를 대접받는다는 게 영 부담스러웠다.(장로님이 계속 밥을 산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래서 약속 전날 베니스몰을 산책하며 대니에게 아무래도 부담스러우니 저렴한 식당에 가자고 미리 이야기를 맞춰 놓았다. 우리를 만난 장로님은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자며 대니에게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묻더니 앞장 서라 이야기하셨다. 나는 대니를 쳐다보며 어제 우리가 찜해둔 저렴한 식당으로 가자고 눈치를 주었는데 대니는 애써 내 얼굴을 모른 척했다. 그리고 본인이 가고 싶었던, 평소에는  너무 비싸서 항상 식당 주변만 기웃거렸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는 대니의 성화에 못 이겨 한 번 그 식당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메뉴판만 확인하고 서둘러 나왔터였다.(티본 스테이크 하나에 100,000원 했다.)


내가 불안해하자 장로님은 괜찮다며 우리를 위해 티본 스테이크, 치킨, 피자 등을 마구마구 주문해, 거한 한 상을 차려 주셨다. 그 덕에 대니 얼굴은 싱글벙글 했다. 아, 문제는 가격만큼 맛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구글 평점은 4.2로 나와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나중에 음식 가격을 어림잡아보니 150,000원이 훌쩍 넘었다. 혼자 무척 민망했다.


장로님은 한국에서 대기업에 다니시다 이른 나이에 퇴직하시고 지금의 동업자를 만나 필리핀에 오게 되셨다. 아무리 탄탄한 사업 아이템이라 하더라도 해외에 자리 잡기란 쉽지 않단다. 가장 힘든 것은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가 너무 다르고 더욱이 소통에 큰 애로가 많아 적당한 직원을  교육하고 같이 일한다는 게 생각보다 아주 ~~ 힘들다고 하셨다. 필리핀에 도착한지 첫 해 몸무게가 10kg이나 빠지셨다.


또, 어렵게 자리 잡은 사업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난항을 겪었다. 외국에서 물건을 어마어마하게 선적 받아놓고 한국에 발이 묶여 필리핀에 입국할 수 없어 고민하던 차, 막말로 여기 있는 직원들이 마음먹고 물건을 팔아치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쁜 사람을 만든다 생각하셨다.(소설 죄와 벌이 생각났다) 당시 필리핀의 사회적 거리 두기는 거의 극단적이었다. 가족 당, 한 개의 출입증을 발급했는데 소지자만 외부 출입이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식재료를 사는 것도 많이 불편했다. 장로님이 맨 처음 했던 것은 20kg 쌀 배달이었다. 과거 어진 동네 지주가 가뭄 등의 천재지변으로 온 나라가 힘들 때  곳간을 풀어 동네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던 정서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그 후에도 직원들에게 계속 얼마간의 월급을 꾸준히 지급했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업은 딱 직원들 월급 주는 정도로만 유지되었다.


드디어 출입국이 가능해지고 어느날 장로님은 서둘러 입국하여 공장으로 달려가셨다. 그리고 물건 재고를 확인했는데 한 개의 오차도 없이 창고에 물건이 잘 정리되어 있었단다. 아마도 다른 회사들과는 다르게 꾸준히 월급을 지급했던 것이 직원들의 신뢰를 쌓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더불어 그때 여기저기 회사들이 문을 닫아 실업자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직장을 잃은 유능한 영업사원들을 채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지금은 자리를 잘 잡은 회사가 되었단다. 그때를 회상하며 하시는 말씀이 그때의 결정은 최고는 아니었지만 최선이었다 하셨다. 힘든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또 평범한 사원이 어떻게 하면 신뢰 있는 유능한 회사의 구성원이 되는지, 절박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현명한 판단과 그 실천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 비단 회사만 이럴까 싶다. 내 삶이, 또 내 아이를 키울 때에도 모두 필요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어느 책에나 나오는 흔한 이야기였지만 가까이 있는 지인으로부터 들으니 또 새로웠다.  


유익한 시간이었고 타지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니 고맙기도 했다. 헤어질 때는 내가 민망할까 봐 5천 페소의 용돈을 주시며 당신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어 고마워 주는 것이니 받아두라 하셨다. 극구 사양했지만 시부모님과 남편의 인연으로 살뜰히 챙겨주신 것 같다. 여행비가 빠듯하던 참에 너무나 감사했고 그렇게 미안한 마음으로 받았다. 나도 나중에 꼭 누군가에게 이 같은 멋진 어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돈 없는 여행자에게 조금이 나마 내 돈을 흔쾌히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본다. 대니는 2시간 동안의 인생 수업을 본인이 그렇게 원하던 음식을 열심히 먹으면서 잘 들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장로님과 헤어지고 쿨하게 다시 헬스장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잠깐 쉬고 있으니 대니가 헬스장에서 돌아왔다. 대니는 헬스장을 다니기 위해 필리핀을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어떻든, 누구든 만족하면 된 거라 합리화하면서 대니를 학원에 데려다주러 집을 나섰다. 금요일은 그랩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잡기 힘들다. 또 월급날은 다양한 모임이나 피티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서 일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장로님 말로는 안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파티에 너무 진심이어서 월급을 받으면 3~4일 내로 사람들과 만나서 먹고, 마시면서 대부분의 돈을 써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또 없는 데로 산단다. 그렇잖아도 대부분의 레스토랑이며 카페에 파티룸을 있길래 왜 그런가 신기하던 참이었는데 그런 연유에서 그런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금요일과 월급날이 겹쳤다. 그것도 모르고 여유를 부르며 그랩을 불렀는데 도통 오질 않는 거다. 그 덕분에 지각을 강박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아이를 지각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많이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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