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돼지저금통

여행 경비 모으기

by 도가경

점심시간. 고등학교 운동장은 거대한 오른 달팽이 껍데기였다.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을 대충 걸치고 삼선 슬리퍼를 끌며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을, 그 외 계절엔 매점 빵 하나씩 입에 물어다가 운동장을 뱅글 뱅글 돈다.

가끔 왼쪽으로 나타나는 무리도 있었는데, 지나치는 모든 이와 마주치는 눈인사에 지쳐 다음 날이면 오른쪽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무리가 똑같이 오른쪽으로만 향하는 모양새라 위에서 내려다 보기엔 퍽 이상했을거다.


성이 황 씨라 별명도 황 씨가 되어버린 친구는 달팽이따라 걷는 3년 내내 인도 이야기를 했다.

진정한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던가. 그놈의 나라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주는 내용은 거의 무법지대에서 살아남기였다.


황 씨가 나열하는 인도에서 그나마 몸을 누일 만한 숙소를 찾는 방법은 아래와 같았다.

1. 창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 (세상에나)

2. 문을 억지로 연 자국 유무 확인

3. 돈을 미리 지불하지 말 것. 선불이면 조건과 액수를 서명이 된 영수증으로 받아 낼 것

4. 비자 및 여권은 원본 말고 사본으로 보여 줄 것

5. 방에 들어와서는 자물쇠로 창문, 방문 이중으로 잠글 것


산에 올라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아버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아들아, 밤낮으로 쉴 새도 없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머물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어머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어머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우리 막내야, 밤낮으로 잠도 못 자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버림받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형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형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동생아, 밤이나 낮이나 집단행동 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너라. - 산에 올라-


마침 고전문학 선생님이 위나라 시대 시구절을 나눠 주었다. 과장된 면 없이 우리 여행을 배웅하던 부모님의 심정과 같아 여행 계획서를 제출한 다음 날 양가 부모님 4분 및 우리 두 명의 6자 대면이 이루어졌다. 계획이랍시고 위와 같은 안전한 숙소 찾는 방법 1번에서 5번을 내밀었으니 부모님이 아연실색 하는 것은 당연했다.


여차저차 설득 끝에 3년간 함께 모은 돼지 저금통 2개로 비행기표를 샀다. 나름 낭만이 있는 여행 시작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