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퇴사를 했을까 - 두 번째(1)

퇴사 일대기 회고

by HanaLim

나는 중, 고, 대학교, 첫 번째 회사 모두 동네에 있는 곳을 다녔다.

생애 첫 퇴사를 결정한 뒤에야 동네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두 번째 회사는 청담에 있는 디자이너 작업실이었다.

당시 나는 패턴사가 되고 싶었고, 작업실에서는 패턴과 패션디자인을 보조할 수 있는 인턴을 뽑고 있었다.

면접을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귀찮음이 이유였다.

당일까지 결정하지 못한 나는 경험을 쌓자는 생각으로 면접에 갔다.


사무실은 좋은 건물의 반지하에 있었다. 밖에서는 내부가 다 보였지만 뒷문을 나가면 미니 테라스가 있는 독특하면서도 나름 괜찮은 구조였다.

디자이너 분과 실장님은 동대문에 직접 원단을 구매해 옷을 만들어본 경험과, 다양한 스타일의 패턴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높게 봐주셨다.


그렇게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턴 생활은 재미있었다.

동대문에 가서 스와치와 주문한 원단을 가져오고, 새로운 스와치들 중에서 발주가 발생하면 전화로 주문을 넣었다. 새로운 룩이 완성되면 디자이너 분이 그리신 일러스트와 설명을 듣고 전지 위에 패턴을 그리고, 광목 재단부터 재봉까지 모두 진행해서 완료되면 디자이너 분께 보여드렸다. 당시 우리들 중 모델만큼 키가 큰 사람은 없었기에 그나마 가장 큰 사람에게 입혀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들은 핀으로 집거나 설명을 들었다.

언제는 나시 끈이 몇 번을 고쳐도 자꾸 사선 형태로 떨어져서 애를 먹었었는데, 원단에 따라 떨어지는 라인이 달라진다는 걸 당시엔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은 아주 나중에 텍스타일을 하면서 알게 된다.)

그래서 사무실 청소,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되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꼽을 주어도 그게 꼽을 주는 건지 판단을 못했기 때문에 무난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인턴은 나를 포함해 총 2명이었고, 보조 디자이너도 2명이었다.

그래서 각 1명씩 짝을 지었고, 나의 담당 보조 디자이너분은 아주 어린 여성이었다.


보조 디자이너 분은 빠릿빠릿하고 소위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비슷한 타입이었다.

반대로 다른 보조 디자이너 분은 남성이고, 열정이 넘치지만 상대적으로 일머리가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인턴은 언행이 굼뜬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최강체와 최약체 팀으로 나뉘어 버렸고, 비교대상군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실장님은 언니에게 원단 픽업 심부름을 시켰다. 외근을 나간 언니는 3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는 실장님의 말에 언니는 무어라 답했고 실장님은 그래? 말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나는 언니가 개인적인 일을 하고 왔기 때문에 늦었다는 걸 알았다. 외근을 나가기 전 언니가 나에게 말해줬었기에. 나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야 처음으로 글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언니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황당함과 동시에 대단함을 느꼈다. 착실한 노예(?)인 나는 외근 중 이탈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당연했던 어린 나는 그때 직장인의 융통성(?)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디자이너 분은 신진으로, 시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디자이너 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분은 황재근 님이었다.


황재근 님은 사무실에 두어 번 정도 찾아왔다. 올 때마다 디자이너 분과 수다를 떨었다. 당시 에너지가 상당하고 발랄했기에 아직까지도 그 목소리의 톤이 떠오른다. 디자이너 분은 황재근 님에게 고충을 털어놓거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우리 셋은 사무실을 나왔다. 인사를 꾸벅하니 위아래로 나를 보던 황재근 님은 '인사는 잘하네'라고 말했다. 황재근 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기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디자이너 분은 황재근 님과 그리 맞지 않으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디자이너 분은 내향인이라 기가 빨렸던 것 같다.




디자이너 분은 서브 브랜드를 만들었다.

내 기준으로 가격이 높았지만, 퀄리티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가격대의 브랜드였다.

동대문에 새로운 하이테크(였나?) 쇼핑센터가 생겼고, 그곳에는 다양한 신진디자이너들의 브랜드가 입점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로 선정되어 판매 중에 있었다. 재고가 부족하면 몇 개의 옷을 가지고 가서 매장에 전달해 줬다.


언제는 두타에서 상설할인 같이 이벤트에도 되어서 옷이 걸린 행거를 그대로 가지고 가서 현장에서 다림질을 한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복잡한 백화점의 할인 행사에도 참여하게 돼서 매대를 홍보하기도 했다. (이때는 너무 혼잡해서 실장님이 금방 사무실로 보내주셨다.)




나는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퇴근시간 이후까지 일을 하게 되는 것에는 상당한 불편함과 짜증을 느꼈다. 같이 일하는 인턴 언니 외의 직원 분들은 모두 기가 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친하기도 힘들어 회식에도 어려움을 느꼈다.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던 시절, 감정이 표정으로 다 드러났고 패턴 작업 외의 일로 야근을 하게 될 때는 항상 불만이 얼굴에 표출되었다.


어떤 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퇴근 이후 모든 직원들이 디자이너 분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위해 대기를 했는데, 집에 가지 못해 불편했던 나의 표정이 드러났나 보다.

디자이너 분은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한숨이나 창 밖만 바라보는 내가 거슬렸을 것이다. 얼마 안 가 디자이너 분은 집에 가도 좋다며 나만 퇴근하게 해 주었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 외근을 나갔던 나는 디자이너 분의 픽업으로 함께 차를 탔다. 단 둘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어색했다. 그래서 쇼에 대한 궁금증이나 괜스레 질문을 했다.

당시 쇼의 주제는 '꿈'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제 선정에 대한 질문을 하니 생각보다 디자이너 분은 자세하게 알려주셨다. 마치 프레젠테이션을 하 듯이.

그리고 어떤 대화를 하다가 디자이너 분은 앞을 보며 말했다.

'싹수가 없지만 않으면 돼'

사무실에 돌아온 디자이너 분은 실장님에게 내가 쇼의 주제에 대해 물어봤다는 말을 했다. 느낌상 어이가 없다는 것 같았지만, 그 뒤 별 일은 없었다.




디자이너 분은 디자인을 잘했다. 원단 컬러를 보는 감각도 좋았다.

만들어지는 옷들 중 구매하고 싶은 옷도 있었고, 그 브랜드 특유의 카라 라인은 지금도 못 찾고 있을 정도로 이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인맥도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디자이너 분을 찾는다며 방문했다. 디자이너 분은 자신의 손님이라며 차를 내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소녀시대 등 유명한 연예인을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 분이셨다. 나는 디자이너 분에게 중요한 손님인 것 같아 유독 친절하게 대했다. 디자이너 분은 이상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ㅋㅋㅋㅋ;;;)


스타일 리스트분은 소녀시대의 광고 의류를 요청했고, 짧은 시간에 12벌을 만들어야 하는 미션이 생겨났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유명한 연예인을 위한 옷이기에 패턴은 동대문 쪽에 맡기게 되었다.

인턴 언니는 밤새 비즈를 달았지만, 나는 밤을 새운 적은 없었다. (아마 내가 야근을 싫어한다는 걸 다들 느껴서 그런 것 같다.)


굉장히 타이트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2벌은 다 완성되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패션위크 프로젝트에 좀 더 투입이 되었기에, 소녀시대 프로젝트는 많이 관여하지 않았다.

언젠가 평소와 같이 패턴을 뜨고 있을 낮이었다. 실장님은 어떠한 의류를 가지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지금 당장 와 달라고 했다. 목소리가 급했기에 나는 시키는 대로 택시를 타고 불러준 주소로 찾아갔다.


도착한 곳은 겉에서는 일반 건물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실장님은 지하로 오라고 하시며 절대로 문을 크게 닫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나는 금방 그 사실을 망각하고 문을 살살 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문을 열자 굉장히 넓은 공간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황 판단을 하느라 멍하니 바라보다 문이 절로 닫히며 쾅 소리가 났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내가 있는 문 쪽을 쳐다봤다. 나는 재빨리 실장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길이가 너무 길어서 2개로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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