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대기 회고
(1편에 이어서)
들어가자마자 문 바로 왼쪽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 두 명이 핸드폰을 하다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실장님이 부르는 소리로 달려갔다.
그곳은 소녀시대 광고 촬영 스튜디오의 대기실이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두 명은 티파니와 효연이었다.
실장님은 비즈가 뜯어진 옷을 고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당당하던 실장님이 몸을 쪼그리고 앉아 옷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나에게 당혹감과 연민을 들게 했다.
작은 목소리로 실장님은 지시했고, 나는 그대로 이행했다. 하지만 옷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입구 반대쪽에서 어떤 여자가 성큼성큼 나타났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실장님 미쳤다면서 이거를 어떻게 입냐는 말을 해댔다. 몸을 감싸고 있던 천을 양 쪽으로 펼치자 우리가 만든 상의만 입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효연과 티파니는 놀라며 옹호했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은 tg였다.
그녀는 스타일리스트 실장님의 본명을 부르며 어떠한 존경어도 쓰지 않은 채 미친 거 아니냐며 큰 소리를 질렀다. 화면에서 보던 모습과 전혀 다른 언행에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화를 내던 그녀는 씩씩거리며 다시 자신이 나왔던 곳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스타일리스트 분이 안 좋은 표정으로 나타나자 실장님은 바로 달려가 바지가 있다며 바지를 왜 안 입혔냐며 말했다. 스타일리스트 분은 바지가 안 왔다고 말했고 실장님은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 사이 효연은 굉장히 높은 킬힐을 신고 여자 2~3명과 잡담을 하며 메이크업을 받았다. 내 눈에는 굉장히 높은 힐이라 발이 굉장히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웃으며 대화했기에 연예인도 대단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온 tg는 나의 눈앞에 섰는데, 옆모습이 매우 특이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몇 초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시선을 의식했던 것 같지만 피하지 않았다. 실례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자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드라마 촬영인지 다른 촬영이 있던 유리는 이미 촬영을 끝낸 것인지 사복 차림으로 멤버들에게 인사를 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뒷모습만 봤던 나는 그때 연예인들이 얼마나 마르고 작은 체구를 유지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대기실 바로 옆 메이크업 의자에 윤아가 앉아있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도대체 언제 온 거지?)
이후 촬영이 끝난 몇 소녀들은(잘 기억 안 나지만 티파니, 효연이었던 것 같다?) 밝은 목소리로 수고하셨다는 말을 밖 스튜디오에 몇 번 하고 촬영장을 떠났다.
실장님은 사무실로 돌아가라며 그제야 나도 사무실로 돌아갔다.
(연예인 대기실을 처음 본 경험은 현재까지도 이것 하나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3개월 인턴이었음에도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었던 걸 깨닫는다.)
패션 위크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착장 디자인이 완료되니 나의 일도 패턴 생성이 주된 업무가 되었다. 원단 픽업이나 주문은 인턴 언니가 도맡게 되었다. 관람자로서 보기만 했다가 처음으로 스텝이 되니 과정을 지켜보는 게 또 하나의 재미였다.
디자이너 분은 쇼의 주제에 어울리는 음악 선정에 긴 시간을 고민했다. 여러 가지 음악을 틀으며 구성원 모두에게 감상을 물어봤다. 그와 동시에 프리랜서 모델들이 자신의 프로필이나 포트폴리오를 주고 가거나, 모델 소속사가 날을 잡아 여러 명의 모델을 데려와한 명씩 워킹을 시키는 날도 생겼다.
모델의 프로필을 보여주며 느낌을 물어보기도 하고, 원하는 이미지의 모델을 찾기 어려워 애를 먹거나, 다른 쇼를 선택한 모델을 보며 아쉬워하는 상황 모두 볼 수 있었다.
어렵게 모델이 정해지니 모델들의 발 사이에 맞게 주문한 신발들이나 액세서리들도 하나씩 사무실에 도착했다.
30분이 안 되는 쇼 하나를 위해서 고려해야 하는 것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신기함과 동시에 무언가 실제로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패션 위크 전날에는 모든 착장의 순서, 소품의 개수, 모델과 착장의 매치 등을 모두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쇼에 도움을 줬던 작업자나 디자이너 분이 아시는 분이 찾아와 덕담과 응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일, 아침 일찍 모인 우리는 준비한 것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행사가 열리는 동대문으로 갔다. 스텝증을 목에 걸고 가니, 교수 활동도 하고 있던 디자이너 분의 학생들이 헬퍼로 와 있었다. 많은 수의 학생들을 처음 봤기에 내향인인 나는 긴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패션과 답게 많이 꾸미고 왔지만 나는 실무자 행태였다.
보조 디자이너분은 카리스마 있게 학생들을 인솔했다. 잘 꾸미고 오기도 했고 한 두 번 겪는 상황도 아닌 듯했다.
모델들은 도착하자마자 미용과 메이크업을 받기 시작했다. 상황은 많이 혼잡했고, 주변의 여러 브랜드도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탈의실은 열악했다. 디자이너 분은 보기 잘 힘들었고,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여자 모델들이 남자 모델들 앞에서 어떻게 옷을 갈아입냐며 탈의실을 요구했다. 디자이너 분은 이해를 못 했지만 실장님과 보조 디자이너 분은 옷이나 천으로 가려주어 탈의할 수 있게 도왔다. (나중에 디자이너 분은 모델인데 남자 모델이 있는 이유로 옷을 못 갈아입는다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외국은 그냥 다 갈아입는다는 사례를 들며. )
현장에서 내가 정확히 어떤 일들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모델과 옷의 매칭이 맞는지 확인하거나 메이크업 순서를 확인하고 안내하는 등의 일을 했었던 것 같다. 대체로 보조 디자이너 분이 매우 빠릿빠릿하죠 솔선수범으로 했었다.
무사히 쇼가 끝나고 디자이너 분은 애프터를 위해 현장에 남았다. 그 외 우리와 메이크업&헤어 담당 인턴 한 분과 함께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갔다. 보조 디자이너 분은 면식이 있는지 인턴 분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피곤하고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나는 거의 말없이 창 밖만 봤다.
그러던 중, 인턴 언니가 졸업 연도를 말했던가, 그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해당 나이에 내가 대학을 입학했다던가 하는 말을 했었다. 당시엔 매우 순수하게 말했던 거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바로 내가 인턴 언니를 물 먹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인턴 언니는 그저 웃기만 했지만 나는 모두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그런 분간도, 판단도 잘 안되었다.
무사히 패션위크를 치르고 나의 인턴 기간도 끝이 다가왔다.
패션 위크 준비가 완료되어 갈 때쯤부터 디자이너 분은 내게 정직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 뒤에도 한번 더 정직원 여부를 물어봤지만, 나의 결정은 변함없었다. 디자이너 분은 아쉬워하자, 실장님은 쟤는 이미 떠나갔어. 하며 위로하기도 했다.
기간 종료 2~3일 전, 실장님과 마주 앉아 작업을 했을 때였다. 실장님은 이후로 어떤 것을 할 거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어떤 말을 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나의 답변을 들은 실장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이어서 실장님은 악착같이 돈을 모았는데 가족이 아파서 병원비로 쓰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실장님은 그 경험으로 어차피 쓰일 돈이라면 나를 위해서 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과 함께 여행도 가 보라고 하셨다. 실장님의 이 말은 나의 머리를 잠시 멈추게 했던 것 같다.
마지막 날, 퇴근하기 전 실장님은 어떠한 물건을 주며 퇴근하면서 업체에 물건을 반납하고, 반납증은 시간이 될 때 가져오라고 했다. 실장님은 반납증을 이유로 다음에도 사무실에 올 여지를 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날 당일에 퇴근하면서 반납하고 반납증을 가져오라고 이해해 버렸다.
그래서 반납증을 받고 다시 사무실로 갔을 때, 실장님은 나에게 왜 왔냐며 물었다. 나는 이유를 말하니 실장님이 오늘 오라는 게 아니라 나중에 시간 될 때 오라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는 인턴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 이후 사무실은 압구정 쪽인가로 이사했는데, 실장님이 놀러 오라고 했기에 한번 놀러 갔었다. 그땐 내가 인턴을 했던 것처럼 다른 인턴 2명이 있었고, 디자이너 분의 학생들이었다.
보조 디자이너 분들은 모두 독립을 한 상태였다. 남자 디자이너 분은 내가 퇴사할 당시 이미 독립이 정해져 있었기에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인턴 분들과 실장님, 나는 소파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브랜드는 잘 되어가고 있었다. 디자이너 분은 한 TV쇼에 출현해 최종 3인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그 준비로 사무실은 바쁜 상황이었다.
실장님은 인턴 2분에게 이전에 인턴을 했었고 일을 엄청 잘했었다며 나를 소개해주셨다.
(실장님이 나를 예뻐하신다는 것은 인턴을 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부터 느꼈다. 아마 내가 사회 눈치가 덜해서 가능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사무실은 바빴기에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디자이너 분은 보지 못했다.
방문 이후 실장님과 연락은 아주 간간이 이어졌다. 실장님도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독립하게 되었다.
지금도 남자 보조 디자이너 분과 실장님은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일에 재미도 있었고 다양한 경험도 많이 할 수 있었다. 정직원에 대해 고민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야근이 잦은 환경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리고 기가 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도 항상 어색했고, 위축감을 느꼈다.
내향 성향이 강했을 시절이었고, 은근한 기싸움과 위계가 나는 힘들었다.
실장님도, 디자이너 분도 좋은 분들이셨고 좋았지만, 업계 특유의 강한 기가 나에게는 어려움이었다.
철야를 할 때도 재미보다는 힘듦을 더 느꼈다. (집 거리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패턴을 뜨다 보니, 내가 제대로 뜨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함과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패턴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수가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했었고, 나에게 필요한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회사를 퇴사했다.
(이후, 실장님의 말씀대로 나는 태국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여행에 눈을 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