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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Jul 17. 2023

엉뚱한 똥싸개

너는 누구?

  미래 소설 <작별인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주인공 철은 최첨단 기계 인간이다. 그의 세상은 기계인간과 사람의 싸움이 맹렬하다. 사람과 닮은 철은 이 전쟁의 틈에 낀 모호한 존재다. 기계 인간에게 순수인간이란 이기적이고 비정한 존재다. 자기 유익을 위해 기계 인간을 만들고 사용하다가 마모되고 쓸모가 없으면 가차 없이 폐기한다. 분노한 기계 인간들은 인간을 지상에서 몰아낸다. 그렇다고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든 것도 아니면서도, 기계 인간들은 순수인간을 똥싸개라 비하한다.   

  인간은 우주복에까지 배변통을 넣어가야 하는 존재다. 근심을 비우고 정신이 가벼워지듯, 섭취한 음식물의 찌꺼기도 정기적으로 몸 밖으로 내보내야 몸을 유지할 수 있다. 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유기체로서 똥싸개는 납득이 가는 이름이다. 분명 배변이 순수 인간과 기계 인간의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기엔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다.   

  미래 영화 <AI> 속엔 데이비드라는 소년 로봇이 등장한다. 뇌사상태의 아들을 둔 엄마 모니카는 데이비드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엄마가 읽어준 동화에서 요정이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바꾸는 장면에 매료된 데이비드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친아들이 살아 돌아온 후 모니카는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깊은 숲에 데이비드를 버리고 떠난다. 그 모험을 통해 그는 조금씩 인간을 알아간다.

  영화를 통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인물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 인간 데이비드다. 모니카를 향한 변치 않는 사랑, 자신을 사람으로 바꿔줄 요정을 찾아가는 소망을 보여준다. 기계 인간 안에 사랑과 소망 같은 인간 고유의 특성을 심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이 질문을 넘어서 작가의 의도는 명확하다. 인간에게 묻고자 함이다. 유난히 맑은 얼굴의 소년 데이비드를 통해 인간에게 묻고자 함이다. 과연 인간은 선의를 가진 존재인가? 

  철을 만든 사람은 김영하, 데이비드를 만든 사람은 브라이언 올디스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이란 무엇인가?”였다. 철도 친구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고 데이비드도 엄마를 그리워한다. 올디스는 데이비드를 통해 인간을 조롱한다. 철을 통해 인간을 보는 김영하의 시각도 냉소적이긴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철은 결국 인간다움을, 특별히 죽음을 택했다. 데이비드도 인간이 되기를 원했고 인간의 사랑을 갈망했다. 작가들도 결국 자기애를 포기하진 못한 모양이다. 


  엄마! 출근하는 딸이 나를 부른다. 어떤 신이 더 어울려? 다른 신발 두 개를 한 짝씩 신고 나를 올려다본다. 신발 고르기는 딸의 출근 의식이다. 나는 둘 중의 하나를 고른다. 어떤 날은 ‘역쉬’ 하면서 내가 골라준 신을 신고 다른 날은 ‘난 이거’ 하면서 다른 신을 신고 나간다. 게다가 둘 다 젖혀두고 세 번째 신발을 신고 나가는 날도 있다. 

  결국 제 맘대로 할 거면서 왜 자꾸 불러대는 거야? 툴툴거리면서도 미소짓는다.  별 의미 없는 일상의 순간에 행복감을 느끼는 건 도대체 왜일까? 어쨌든 신발 고르는 사람으로 제 일상에 나를 끼워주는 게 은근히 고맙다. 게다가 더 기막힌 건 작은 아이의 말이다. 제 언니가 엉뚱한 짓을 할 때마다. “오우! 저 매력 저거 어쩔꺼야!” 하며 감탄을 하니 말이다. 기계 인간이 우리를 본다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가끔 나라는 존재는 엉뚱하다 못해 괴기하다. 어릴 적 물고기 비늘에서 무지갯빛이 아른거리는 것을 본 후, 노을 속에서 같은 빛을 만날 때마다 마음은 다시 아이가 된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을 잃은 여인의 환한 미소를 본 후, 수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그녀의 미소가 선명히 떠오른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머리 위에 우산 대신 호박잎을 그려 넣고 사람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가 하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부끄러운 오래전 행적이 뜬금없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질 때도 있다. 이런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사이보그란 뇌를 제외한 몸의 다른 부분이 기계로 개조된 인간이다. 머리가 온전한 사람이기에 사이보그는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몸을 제어하는 뇌의 능력을 인정했다기보다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닐까. 문득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엉뚱함이란 영혼의 영역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피조물 중에 인간은 유독 신의 ‘형상’(image)을 따라 지어졌다고 성경은 말한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려보고 형상화해내는 신에 속한 성품, 창의와 상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품이 아닐까?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발명하고 탐험한다. 언제 어디로 뛸지 모른다. 부여받은 영혼으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靈)인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의 가장 깊은 아픔과 소망을 드러내고 질문을 하고 답을 기다린다. 내 생각과 논리를 넘어서는 섭리를 깨닫기도 한다.  

  왜? 기계 인간이 묻는다면, ‘그냥’이라는 비논리를 장착한 나. 나의 또 다른 이름은 엉뚱한 똥싸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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