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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Jul 18. 2023

엄마의 뜰

   열두 시간 비행에 이어 세 시간 공항버스를 탔다. 집 현관에 들어섰을 때 내 품에 쏙 안기는 엄마의 작아진 몸에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부터 몸이 나른해졌다. 엄마의 공간에서 먹고 자는 일을 며칠 반복한 후,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엄마 집엔 이상한 기운이 있다. 어쩌다 어른으로 살아오다 엄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신생아로 돌아간 걸까. 잠이 참 달았다. 

   베란다에 있는 고목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우리 집에 있던 물건인지 아득하다. 어릴 땐 그 가지에다 모기장을 걸었었다. 화분이 늘어가는 베란다에서 아직도 떡하니 버티고 있다. 어디서 생긴 물건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분이 아버지에게 갚아야할 돈 대신에 가져온 물건이라고 했다. 저거 치울까요? 하는 말에 펄쩍 뛰시는 걸 보면 엄마는 그 고목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른손으로 또박또박 건반을 누르며 한 곡을 쳤다. 아버지가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쳐주셨지. 엄마가 말했다. 같은 말을 할 때마다 그건 아버지가 그립다는 고백인 걸 나는 알고 있다. 피아노 위 사진 속에서 아버지가 당신의 사랑스런 아내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의 부엌칼은 몇 십 년의 노동으로 칼날이 더 날렵해져 있었다. 도마는 깊이 파여 있어 썰기에 불편했다. 자주 사용하는 냄비 중 하나는 뚜껑에 손잡이가 없다. “이거 버릴까요?” 하고 묻는 내게 엄마는 아니라 했다. 언니가 눈치를 주었다. 연로해질수록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고. 엄마에겐 손때 묻은 익숙한 것이 좋은 것이다.

  엄마의 냉장고는 늘 먹을 것이 넘친다. 어느 때 누가 불쑥 찾아온다 해도 한 상 가득 차려낸다. 내겐 엄마표 호박 된장찌개면 족한 줄 알면서도 딸을 살찌워 보내야 한다고 애를 썼다. 엄마에게 기쁨을 드리려는 마음으로 즐거운 과식이 이어졌다. 나에겐 음식을 많이 만드는 버릇이 있다. 좀 넘치더라도 모자라면 안 된다고 믿는 이 지병도 전적으로 엄마에게서 온 것임을 확인한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 내내 빗소리가 소란하더니 급기야 날카로운 전자음이 더해졌다. 창을 열고 내다보았다. 이사 오는가 보다. 이 빗속에서 크레인이 짐을 들어 올리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점심을 드시던 엄마가 창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나지막이 읊조리셨다. “소리도 없이 종일 비가 오네.” 갑자기 들이치는 빗물같이 엄마의 말에 또 한 번 마음이 아렸다. 

  어디선가 조르르 물소리가 났다. 베란다에서 엄마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엄마의 뜰엔 꽃과 나무들이 다정하다. 화분을 하나하나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다. 기린초엔 빨갛게 꽃들이 피었고 알로카시아는 들이치는 장맛비도 다 받아낼 듯 쟁반만 한 잎을 창으로 뻗었다. 이 열대 나무 화분 안에는 어미를 똑 닮은 새싹들이 두어 개 올라오고 있다. 연두로 옷 입은 그들은 엄마의 증손주들을 닮았다. 엄마는 야위어 가시고 새싹들은 푸르게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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