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새벽빛

by 모든 햇살

창밖이 어둑하다. 이른 새벽이다. 요즘 들어 가끔 새벽녘에 정신이 총명해지는 낯선 일을 겪고 있다. 세상이 아직 잠에 빠진 틈에 시곗바늘 소리가 고요를 타고 거실 가득 퍼져나간다. 새벽 안경을 찾아 쓰고 책장을 펼친다. 이름 모를 새가 울기 시작한 건 정확히 네시 반이다. 새의 울음은 전쟁을 예고함일까. 북창에 퍼런 서슬의 기운이 물든다.

잠잠히 나를 들여다본다. 책 속의 한 문장이 벌떡 일어서며 마음에 부딪힌다. 나를 정직히 바라보기 위하여 간절히 용기를 구한다. 거울 앞에 나를 더 밀어내어 비춘다. 숨어있던 고약한 먼지가 드러난다. 빛은 사정없이 그것들을 베어내어 선연한 피를 낸다. 마음은 동의를 넘어서 승복하여 무릎을 꿇게 된다. 마침내 밀려나지 않으려 버티던 핑계의 벼랑 위에서 몸이 아득히 떨어진다. 몸이 닿은 곳은 뜻밖에도 푹신한 깃털의 언덕이다. 깃털은 포근히 몸을 안는다. 새벽은 선한 싸움의 전장. 푸른 칼날은 안일함을 처단하고 무디어진 양심의 조각을 도려내어 수술한다. 새벽빛에 씻긴 몸이 가볍다.

빙하의 단면 같은 푸르던 빛이 어느덧 하얗게 변하며 맞은편에 놓인 화병을 비추고 있다. 아침이 이제 막 캐스케이드 산에 이마를 얹었나보다. 블라인드 사이로 빛은 파란 수국과 흰 데이지 꽃잎 위로 부서져 내린다. 예리한 빛의 칼날은 명쾌한 채도를 더한다. 빛이 없어도 꽃은 그 자리에 있겠지만 색은 없을 것이다. 과연 빛은 모든 색을 담고 있음을 프리즘이 없어도 볼 수 있다. 빛은 파란 수국 꽃잎 위에 파랗게 덧칠을 하고, 소박한 데이지 꽃잎을 여왕의 장갑 같은 고결한 순백으로 만든다. 색으로 부활한 꽃에 눈이 부시다. 새벽빛은 숨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고수의 칼날이다.

뒷마당으로 나간다.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이슬 밟는 소리에 놀라 꼬리를 들썩이며 담장 아래로 사라진다. 어느새 해는 동쪽 언덕을 넘었다. 차가운 발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담장을 무너뜨릴 듯 무사의 장도가 빛을 발한다. 담장의 나무판자들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온다. 나의 자기 의(義)는 어쩌면 낡고 이끼 낀 저 담장일 뿐, 빛의 전진을 막을 수 없다. 빛은 나의 오만을 비웃고 담장을 거뜬히 넘어 마당에 가득하다. 모든 허물 많은 것들 위에 넉넉히 내린다.

창조의 첫날, 혼돈과 흑암을 비집고 시간과 공간 속으로 나오던 최초의 빛도 전사의 발걸음처럼 용감했을까? 처음 아담의 몸에 비치던 그 빛으로 창조주의 형상을 닮은 아담은 황홀하였을까? 그 빛은 아담의 소속을 분명히 보여주었을까? 빛은 최초의 창조물, 그리고 모든 에너지의 본질. 마침내 피조물이 돌아갈 곳엔 조명이 없다. 해와 달이 없다. 코끝의 생기로 빛을 맘껏 들이킨다. 나는 빛에서 왔고 빛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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