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에서
가을 숲으로 들어선다. 어제 내린 비로 축축한 길 위에 말들이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 지도가 세워져 있다. 살펴보니 이 숲에는 여러 개의 산책로가 있다. 길마다 다른 이름을 가졌다. 말은 오른쪽 길로 간 모양이다. 남편과 나는 왼쪽 길을 택한다. 처음 온 숲이라 오늘은 가장 짧은 코스부터 걸어보려 한다. 이 길의 이름은 연령초 길이다. 모든 이름에는 이유가 있으므로, 봄에 이 길을 걷는다면 뾰족한 꽃잎으로 새초롬한 멋을 낸 연령초를 만날 수 있으리라.
조금 걷다 보니 세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두 번째 갈림길을 만난다. 갈림길에서 나는 가지 않을 길 쪽으로 눈길을 한 번 주고는 미련 없이 꽃 그림을 따라간다. 꽃잎이 그려진 그림을 택하기만 하면 이 숲에서 길 잃을 염려는 없다. 호기심이 가득한 남편의 눈은 독수리가 그려진 가장 먼 길 어귀에서 서성인다. 안전과 도전 사이에서 살아온 우리의 단면을 이 숲에서도 만난다.
늦가을의 숲에는 조명이 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하늘에서 우수수 내려오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손바닥 모양의 노란 단풍잎이다. 안내인의 손에 낀 장갑처럼 크고 작은 노란 잎은 줄곧 이어지며 길을 안내한다. 잠시 보이지 않는다 싶다가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단풍나무 아래 노란 잎이 이불처럼 펼쳐지기도 하고 작은 나무 위로 지붕을 씌우기도 한다. 숲에 깊이 들어갈수록, 단풍잎은 연령초 꽃잎의 일을 대신한다. 흐린 날의 가을 숲. 해는 구름 뒤 어디엔가 숨어있는데, 나를 따라 오세요. 단풍잎만 말하듯 노랗게 빛을 뱉는다.
이 숲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을까? 그들 중 얼마는 흙으로 돌아갔고 또 얼마는 앞으로도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오늘, 숲이 이곳에 있고 내가 이 숲을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숲도 사람도 시간 속을 지나고 있다. 나는 단거리 경주자이므로 빠르게, 숲은 장거리 경주자로 내 경기가 끝난 뒤에도 자기만의 속도로 계속 달릴 것이다. 숲이 사람의 마음에 생기와 치유를 주는 것은 나무가 제공해주는 산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전에 철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몇천 년을 사는 나무들도 있다 하니 고작 백 년을 사는 사람을 품는 숲은 넉넉하다.
옷을 다 벗어버린 늙은 단풍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어본다. 하늘을 찌를 듯 이끼 낀 가지들이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가만히 나무 아래 서본다. 발이 디디는 땅은 그지없이 푹신하다. 나는 몇 번의 가을 위에 서 있는 걸까? 이 나무가 숲속 모든 단풍나무의 조상이라도 되는 걸까?
지난주였다. 주립대학 캠퍼스 광장을 가로지르다 문득 발밑에 흩어진 무수한 단풍나무 열매에 눈이 닿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나무라곤 저만치 도서관 양옆에 서있는 삼나무 두 그루뿐인데 이들은 얼마나 멀리서 온 걸까? 비행에 지친 열매들이 광장의 붉은 블록 위에 널려 있었다.
시간을 돌려 날개의 긴 여정을 그려보았다. 단풍나무의 초록 열매들이 가을이 깊어갈수록 무게를 줄이며 갈색의 깃털모양으로 여위어갔다. 열매의 끝부분에 씨앗이 담겨 있어 무게중심이 되고 위로 올라갈수록 곤충의 날개같이 얇아졌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가지를 흔들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날개들은 헬리콥터의 날개처럼 팽글팽글 회전하며 멀리 날아올랐다. 들판으로 산으로 그리고 더러는 뿌리내려 자랄 수 없는 이 광장까지 진군했다.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면 날개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부드럽게 회전을 하며 차가운 벽돌 위에 내려앉았다.
늙은 나무에서 이제 막 내 무릎쯤 자란 나무까지, 나무는 세대를 이어 숲 전체에 퍼져있다. 나뭇잎이 색을 바꾸고 잎을 떨구는 일, 날개가 씨앗을 품는 일, 그리고 바람이 이는 일까지 이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일마다 퍼즐이 되어 더욱 큰 그림을 이룬다. 그 그림 속에서 숲은 새들과 다람쥐 그리고 사람을 불러 베푼다. 고요해 보이는 숲은 사실 숭고한 재생산의 소명으로 분주하다.
연령초 길의 끝에서 길은 다시 말이 사라진 길과 합쳐 하나가 된다. 몇 걸음 걷다 보니 키 작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몇 안 남은 잎으로 다소곳이 인사를 한다. 남편과 나는 생명의 긴 역사 속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속으로 타박타박 걷는다. 등 뒤에서 새 악장을 준비하는 숲속의 연주자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수런거린다. 저만치 길의 끝에 주차장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