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렸던 교사 국외 연수의 기회가 왔다.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만 굳게 믿고 가방을 쌌다. 둘째 아이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때였으니 엄마로서 참 용감한 결정이었다. 태평양을 건너가 만난 캐나다인들에게서 상식과 문화의 차이들을 발견하는 일은 흥미로웠다.
강의와 숙제, 조별활동까지 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주말엔 원어민 친구들과 시내 관광도 하고 그들의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밤 10시까지 지지 않는 해 때문일까, 두고 온 아이들 때문일까?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아서 원어민 친구 에이미와 늦은 시각까지 포근한 여름밤 공기에 싸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녀는 눈빛이 초롱초롱한 교포 2세 대학생이었는데 가보지 못한 어머니의 나라에 대해 질문이 많았다.
원어민 친구 중에 영어교사가 있었는데 몇몇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분을 칭찬했다.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을 도우려는 그의 사려 깊은 마음과 영국식 예절에 모두 감동한 듯했다. 선해 보이는 얼굴에 살짝 얹어진 콧수염 때문일까. 우리는 그분을 ‘켄 아저씨’라는 편한 이름으로 불렀다.
어느 날 강의실에서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윤동주를 알아요?”하고 불쑥 물었다. “여기가 캐나다 맞지?” 잠시 현실을 점검하고 했다. 어떻게 시인의 이름을 아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시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취미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시를 읽는 것이라고 했다. 이국인의 입에서 서투른 발음으로 불린 시인의 이름이 어찌나 반가운지 아는 대로 그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시인은 ‘자신의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일본 땅에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장래가 촉망되었던 27세의 젊음이 사인도 알 수 없이 차가운 유골이 되어 돌아왔다. 하얀 보자기에 싸여 용정역에 내리던 그의 슬픈 귀향은 오래도록 소녀시절의 내 마음에 남아있었다.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 속에 얽힌 그의 생애를 조금 나누었을 뿐인데 어느새 파란 눈의 신사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서점에서 산 책 속에서 영역된 그의 시를 발견했다며 읽어주었는데 자세히 귀 기울여보니 그것은 바로 ‘눈 오는 지도’였다. 그 시에서 나오는 섬세한 우리말 단어들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시에 푹 젖어 있었다. “순이는 실제 인물이었을까?”라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대신 그 이름이 가진 순박한 이미지와 무언가의 상징일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비평도 함께 나누었다.
태평양을 건너와 듣는, 이국인이 읽는 윤동주의 시가 굳어진 내 마음 밭에 장맛비라도 뿌린 걸까? 자꾸 눈물이 났다. 시 한 편 읽을 여유도 없이 직장 일과 육아로 숨차게 달음질해온 나날이었다. 한 때는 나도 그의 시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위로를 받았던 단발머리 소녀가 아니었던가.
한국으로 돌아올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우리는 파티를 준비했다. 한복으로 곱게 단장하고 한국 음식을 준비하고 교수님들과 원어민 친구들을 모두 초대했다. 한국가요에서 영시낭송까지 다양한 장르의 순서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우리의 갈채를 한 몸에 받은 사람은 바로 켄 아저씨였다. 그는‘눈 오는 지도’에 자신이 만든 곡을 붙여 조용한 기타 반주로 불러주었다.
된장과 치즈만큼이나 다른 두 문화가 한 편의 시로 만나 하나 된 순간이었다. 문학과 음악을 매개로 한 먼데서 온 사람들의 만남.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강의실 칠판 구석에 누군가 써 놓았던 문구처럼 “사람은 어떤 면에서 모두 다르며 또 다른 면에서는 모두 같다.”
떠나오는 날 우리는 이제 겨우 익숙해진 캐나다 식 포옹으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젖은 눈으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그들을 보며 ‘정’이라는 것이 한국인만의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국 땅, 캐나다 에드먼턴에 난데없이 순이가 떠난 그날의 눈이 하염없이 내려 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