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칠성이 따라온 길

by 모든 햇살


몬태나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숙소를 나섰다. 발이 뜨거운 메뚜기들이 건조한 풀 섶에서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첫 번째 마을에 닿으니 서쪽 산등성이 위로 노랑과 주황의 선이 과감한 노을이 펼쳐졌다. 지금부터 열 시간 서쪽으로 달려야 시애틀에 닿는다. 차를 기름으로 채우고, 해바라기 씨앗 한 봉지를 샀다. 그새 노을은 빛을 잃고 밤이 내려앉았다. 서늘해지는 공기를 가르며 차는 밤 속으로 달음질쳤다.

“요 아래 다리가 있어요. 송어가 있대요. 잡은 사람은 못 봤지만.” 숙소 주인의 말에 남편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낚싯대를 들고 나섰다. 폐광된 구리 광산으로 들어가는 나무다리엔 여기저기 큼지막한 구멍들이 있었다. 구멍 아래론 거미들이 한 살림을 차렸다. 세월이 흐른 지금, 빈집들이 즐비한 마을엔 맑은 햇살마저 쓸쓸해 보였다. 거미줄 아래 냇물 속엔 송사리들이 노닐고 유유히 흐르는 냇물은 지나간 날의 짧은 영화를 비웃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냇가로 내려갔다. 돌멩이들 사이로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 유난히 반짝이는 물빛이 어쩐지 정겨웠다. “그렇구나! 이곳은 몬태나!” 잊었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몬태나의 강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노만과 폴의 고향 냇가, 그들의 낚시를 기억해내니, 어느새 고향마을에 온 듯 마음이 포근해졌다. 배운데 없는 낚시질이란 물고기를 모독하는 행위라며 어린 두 아들에게 낚시를 가르쳤던 아버지. 날 파리를 낚싯줄 끝에 묶었다. 줄을 더 멀리 깊은 곳으로 던지기 위해 좌우로 오가며 낚싯대에 힘을 주는 연습을 했다. 물 위로 오가는 줄의 춤사위. 마지막 순간 잡았던 줄을 풀어주면 줄은 아주 멀리 널뛰기를 했다. 물 위에 띄워진 날 파리의 버둥거리는 날갯짓이 송어들을 유인했다.

그들과의 해후를 즐기며 냇가를 거닐다 돌아오니 남편은 아직도 낚싯대를 다리 아래로 드리우고 있었다. “큰 고기는 없나 봐!”하는 순간, 빛처럼 휙 지나가는 팔뚝만한 송어 한 마리. 햇살에 비친 황금빛 뱃살을 나에게 들켰다. 자리를 옮겼다. 물살이 센 곳에선 지렁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신 나게 춤을 추었다. 물었다. 낚싯대가 휘는 모습이 심상치 않더니, 살이 오른 송어 한 마리가 낚싯줄 끝에서 펄떡였다. 연이어 걸려든 송어 두 마리. 어설픈 우리에게 걸려들다니. 시애틀에 새벽에 도착하려면 해지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남편은 아쉬워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해바라기 씨앗을 꼭꼭 씹으며 달리다 보니, 블랙 풋(Black Foot)이라는 낯익은 이정표가 보인다. 달빛이 흔들어주는 저 검은 강물을 따라 올라가면 노만과 폴이 아버지로부터 낚시를 배우던 곳에 이르겠지.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모두 저 강에 연결되어있다. 언제고 떠올리면 잔잔한 미소가 가득해지는 소중한 기억들과, 기억하는 것조차 고통인 모든 일이. 일어난 일을 기록하지 않고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일어났는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신 아버지. 노만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 덕에 오늘밤 저 강은 먼데서 온, 낯선 내게도 다정히 말을 건네준다.

그들의 사랑은 여러 빛깔이었다. 무슨 일이든 정석이 중요했던 엄한 아버지의 사랑.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하던 어머니의 절제된 사랑. 그리고 동생의 위험한 선택을 끝까지 존중해 주어야 했던 여린 형의 사랑. 물 위에 낮은 선을 그으며 무지개를 일으키던 낚싯줄, 그 날렵한 춤사위처럼 자유롭고 열정적이었던 폴의 사랑.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서로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였다.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의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서로를 포기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 나름의 최선으로 사랑할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감사할 일이다.

반듯한 반달이 왼편 창에 나타났다. 나를 따라오다가 어느 틈엔가 앞서 가며 길을 인도한다. 앞산 위에 올랐다가 침몰하는 배처럼 한쪽 모퉁이만 내놓고 있더니 검은 강물 속으로 빠져버린다. 한동안 나타나질 않다가 뒤돌아보면 왼편 뒷좌석 창에서 빼꼼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밤새 숨바꼭질이다. 달이 숨어버릴 때마다 오른쪽 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북두칠성은 창에 그려 붙인 듯 여전히 나를 따라온다. 별은 달보다 멀리 있다. 달은 지구 둘레를 부지런히 돌며 움직이고 별은 멀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가까운 달은 산으로 언덕으로 길의 방향에 따라 요리조리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 있는 별은 그저 제 자리에서 조용히 내 밤길을 비추고 있다.

나이 들어 사귄 친구가 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거부 반응이 생긴다고, 자기에겐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의 모습이기도하기에 이해하기 쉬웠다. 처음 만난 사람이 너무 성큼 다가서면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나에게도 나만의 거리가 필요하다. 그녀와 나는 달 거리의 친구보다 별 거리의 친구가 되는 게 좋겠다. 아이들이 집을 떠난 후 나는 어쩔 수 없이 별 거리에 있게 되었다. 잔소리가 쉬웠다. 별 거리에 있는 지금. 사랑을 표현할 다른 방법을 연구 중이다. 누군가의 달이 되거나 또 누군가의 별이 되어도 좋다. 다만 누군가의 길을 비추어 주는 일로 우리의 호흡은 그 의미를 더하기 때문에.

불빛이 화안하게 어둠을 밀어내는 도시로 들어선다. 이 도시의 이름은 ‘미줄라’, 몬태나 주립대학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폴은 대학생활을 했다. 스릴을 즐기던 반항아 폴은 왜 아버지의 권위를 떠나 더 멀리 가지 않았을까? 큰 도시로 형이 초청하였을 때 왜 가지 않았을까? 호기심과 용기는 왜 그를 몬태나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였을까?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해바라기 씨앗들이 뱃속을 울렁거리게 한다. 피곤한 눈을 감는다. 몬태나의 맑은 강물이 돌돌 다정하게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를 달렸을까? 부스스 눈을 뜬다.

"아직 거기 있을까?"

북두칠성을 바라본다. 반짝이는 별에서 별안간 강물 소리가 난다. 몬태나의 강물이 아이다호까지 따라왔다. 새벽녘에 집에 도착할 텐데. 베개 속에도 강물이 흐를까? 폴이 끝내 몬태나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어디서든 들리는 이 강물 소리 때문이었나 보다. 강에 담긴 그들의 이야기가, 맑은 햇살을 반사하는 수면 위의 수많은 유리조각이, 어느새 훌쩍 날아올라 별이 되어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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