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나의 젊은 시절, 이 단어의 뜻은 ‘남들이 다 알아들은 농담을 한 박자 뒤에 알아듣고 혼자 웃는 사람’이었다. 스위치를 돌리면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오던 백열전구와 달리, 형광등은 두어 번 껌뻑인 뒤에 마침내 환한 빛을 내주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이곳에서 먼저 온 사람들이 내게 농담을 하면 나는 자주 형광등이 된다. 유머감각을 타고난 그들이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도 입 꼬리를 살짝 올리기 시작하면, 나는 맘속으로 제발 농담이 아니길 바란다. 내가 눈을 껌뻑이는 사이 웃어야 할 시간이 지나가고 이런 반응은 분위기를 애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인 내게 농담은 나를 긴장하게 하는 넘지 못할 벽이다.
단어의 뜻을 모를 때는 물론이고 문장 속 단어의 뜻을 아는 데도 뭐가 우스운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 딸아이는 내게 너무 글자 그대로 풀려고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단어의 뉘앙스나 문화적인 요소들을 알아야 이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한국 코미디를 볼 때이다. 휴대전화와 컴퓨터 사용이 증가하면서, 신조어들과 줄임말에 대한 국어학자들의 염려가 더는 소용없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말을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이론적 주장은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에 두 손을 든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멀리 떠나와, 오래전의 모국어에 익숙한 나는 이제 모국어로 만든 코미디를 이해하는데도 형광등 신세가 되어버렸다.
종종 이곳 사람들의 유머감각에 감탄하기도 한다. 나물 무침에 마지막으로 떨구는 참기름 두어 방울처럼 유머는 생활에 부드러운 감칠맛을 더해준다. 수술 대기실에서 환자에게 던지는 그들만의 유머는 긴장과 불안을 풀어주는 데 더할 나위가 없다. 낯가림이 심한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가벼운 농담으로 낯선 사람과의 얼음을 깬다. 잠시 함께 웃은 이유로 좁은 공간엔 갑작스레 봄기운이 돈다.
이렇듯 긍정적 역할을 하는 유머가 내가 상상치 못한 순간에 끼어들 때가 있다. 내게는 이런 유머가 제 자리가 아닌 퍼즐을 구겨 넣은 불편한 모양새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에 온 지 몇 개월 되었을 때 내가 살던 아파트에 특수기동대(SWAT)가 출동했다. 장갑차에 방탄조끼를 입은 경찰이 단지 안으로 투입되었다. 옛 애인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범인이 여인을 위협한 사건이었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방송이 나오더니 연달아 총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한참 지나 아이의 하교 시간이 다가오기에, 사태가 해결되어 가는지 살짝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방탄벽 뒤에 서서 햄버거를 먹으며 낄낄거리는 경찰들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들에겐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찾아내야 하는 강박관념이라도 있는 걸까?
대학 신입생 때였다. 미국인 교수님이 회화 수업을 갑작스럽게 휴강하자 하시더니 영어 연극을 보러 가자고 하셨다. 문제는 연극이 희극이라는 점. 사태를 파악하고 꼬리를 빼려할 찰나, 교수님이 옆자리가 비었다고 손짓을 하셨다. 연극은 앞자리에서 봐야 된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이셨다. 연극이 시작되고 교수님의 얼굴엔 연신 웃음이 폭발하는데 그럴 때마다 바로 옆에 앉은 친구에게 얼굴을 돌리셨다. 친구는 뜻도 모르는 채, 교수님의 흥을 깰 수 없어 억지로 따라 웃었고 나는 그런 친구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을 보고 웃었다. 한 시간이 넘는 고통의 웃음. 차라리 비극이었다면 가만히 울상을 짓고 앉아 있기라도 했을 것이 아닌가. 내 인생의 가장 잔인한 코미디였다.
몇 해 전 해변에서 지인들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끝낸 때였다. 나는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남자가 개를 데리고 내 옆으로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의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입을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저녁식사 용으론 너무 작지?”하는 것이다. 귀를 의심한 소리를 들은 나는 “뭐라구요?”하고 되물었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는 “농담이야!”하며 씩 웃었다. 농담이란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의 농담은 내 맘을 상하게 했다. 웃음으로 다른 사람을 경멸하다니! 비웃음에 베일 때 그 느낌은 예리하고 싸늘하다.
그런가 하면 비극적 소재를 희극에 사용하는 때도 있다. 영화, ‘행복한 장의사’에서 김창완이 라면을 끓이는 장면이 있다. 고생만 하다 먼저 간 아내를 생각하며 라면도 맘껏 못 먹였다고 눈물을 짓는다. 여기서 장면이 바뀌거나 상을 물렸으면 좋으련만. 금세 사기꾼 같은 눈매를 희번덕대며, 파 넣어야지, 달걀도 넣어야지 하더니 유난히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신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일에 목숨 건 사람처럼 눈이 이글거린다. 고인을 기억하는 몇 초의 시간을 무색하게 하고 인간의 얕은 성정을 비웃는다. 금기된 소재를 이용한 블랙코미디는 넌지시 조롱하는 묘미가 있지만 어쩐지 뒷맛이 쓰다.
개그 콘서트의 ‘진지록’에 의하면 진지왕은 진지함을 미덕으로 여겨 백성에게 웃는 것을 금하였다. 남들을 웃기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벌하였다. 왕은 죄인들에게 시제를 주고 그들이 지어낸 말이 사람들을 웃게 하면 매질을 했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이 한 말을 듣고 웃는 것을 은근슬쩍 즐기고 있었다. 맞을수록 성취감을 느끼는 웃기는 죄인들의 이야기이다.
이렇듯 희극은 상황에 따라서 비극이 될 수도 있다. 비극 또한 희극의 소재가 될 수도 있듯이. 막중한 나라 살림을 하는 정치인들의 행보가 희극으로 간주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미국인의 유머감각은 긴장과 슬픔을 부인하고 싶은 절박감에서 나온 연약한 마음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진지왕의 비극은 못 말리는 죄인들이고, 나에게 있어 진정한 비극은 나를 웃기지 못하는 희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