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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Jul 18. 2023

흔들리다

   여름날 오후 햇살이 따끈하다. 사과나무 그늘에 앉았다. 바람이 불어와 뒤뜰에 모여선 꽃들을 만진다. 잎이 넓은 해바라기와 에키네시아부터 여린 잎의 코스모스까지 바람에 살랑거리는 부채질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할리나무 그늘에 자리 잡은 봉숭아와 노루오줌은 한결 여유로운 모습으로 바람을 타고 있다.   

   흔들리다가 바람이 잠시 잦아드는 때가 있다. 지휘봉을 멈춘 순간처럼 모두가 미동도 없는 짧은 순간, 잎 하나가 파르르 떨리면 거기에 어떤 생명체가 깃들었다는 뜻이다. 눈이 얼른 그 떨림을 따라간다. 벌이나 나비가 날아든 것이다. 호박벌이 꽃 위에 날아 앉는 순간, 화분이 잔뜩 묻은 다리를 박차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 짧은 순간에도 여린 꽃잎은 흔들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각자의 매력을 뿜어낼 때, 눈이 어두운 벌은 향기를 따라와 양식을 얻는다. 꽃술 위에 엎드려 제집인 양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녀석도 있고 서로 같은 꽃에 앉으려고 몸싸움을 하며 꽃을 흔들기도 한다. 이 작은 생명체들은 자기 배를 채울 뿐 아니라 꽃피우고 열매 맺는 생명의 일에 감당하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굴뚝새는 유난히 조심성이 많다. 올봄에도 녀석들이 사과나무 새집에 입주했지만, 새끼들이 태어날 때까지도 집이 비어있는 줄만 알았다. 어느 날 우연히 어미가 벌레를 물고 들어가는 순간을 포착했다. 멀리서 오래 지켜보고 나서야 녀석의 습성을 알아냈다. 벌레를 잡아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가까이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뒤에 가만히 숨는다. 바람이 일어 나뭇잎이 일제히 수런거리면 그 틈을 타 순식간에 집으로 날아든다. 녀석은 감쪽같이 바람을 타고 움직였다. 흔들리는 순간은 녀석에게 기회가 된다. 

   가만히 있는 것은 이미 생명을 다한 것일 뿐이다. 수레국화는 가는 허리를 휘청대고 해바라기의 긴 꽃대가 땅으로 허리를 숙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한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살아있는 것들의 군무에 오늘따라 마음을 빼앗기는 건 무슨 이유일까? 

   뙤약볕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는 맥이 빠져있었다. 누군가 일으켜주길 바라는 것도 사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흔들릴수록 뿌리가 깊게 내린대. 나를 다독이려고 애썼다. 나의 악함과 무능을 인정하는 건 쓰라린 팩트 폭행이다. 그러나 지친 손을 하늘로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은 회복의 신호다. 봐! 이렇게 멋진 춤을 추고 있잖아. 흔들리는 잎들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엄마는 탄력이 좋잖아. (Mom, you are resilient.) 몸이 뻣뻣해서 도무지 춤에는 재주가 없는 내게 딸은 왜 이 말을 했을까? 어쩌면 이 말은 바람을 잘 탄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바람을 탄다는 건 잠시 바람의 방향으로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편다는 것. 아주 꺾이지 않는다는 것. 흔들린다는 건 바람과 비, 호박벌과 나비에게 반응한다는 것.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그래서 아직 자라날 여지가 있다는 것. 

   마당 가득 흔들리는 모든 잎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오후, 그들과 함께 바람의 음악을 타는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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