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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4. 2023

무례한 양귀비꽃

  빗방울이 창에 맺힌 어둑어둑한 아침이었다. 문득 창밖으로 던진 시선이 붉은빛에 닿았다. 무얼까? 창으로 다가가 내다보았다. 두 송이의 붉은 양귀비꽃이었다. 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갈라진 봉오리 껍질이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지난밤 어느 순간, 여린 꽃잎은 단단한 껍질을 열었다. 작은 껍질이 어찌나 좁았던지 촘촘히 접혔던 줄무늬가 선명하다. 마침내 피어오른 커다란 꽃잎이 호롱불처럼 너울댔다.  

  얼마 전 병원 복도에서 보았던 그림 속 그 양귀비꽃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투박하고 색도 단순했다. 연보라 바탕 위에 줄기, 잎, 그리고 붉은 꽃송이들을 도화지 전체에 듬성듬성 뿌려놓았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점이 있었다. 그림을 돋보이게 하려고 매트 안에 그림을 가두는 것이 보통인데, 그녀는 초록의 거친 줄기들을 쭉쭉 뻗어내어 매트 위에 꽃송이들을 얹어놓았다. 어린 아이의 그림이려니 했는데 그 예의 없는 파격에 흠칫 놀랐다. 

  그림 아래 ‘희망’이라는 제목이 달려있었다. 그제야 주변의 작품들과 그 전시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암으로 투병하는 분들의 그림 전시였다. 매트 안에 갇힌 도화지가 사람의 한계라면 그것을 넘어서는 기도는 매트 위 꽃송이로 피었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입김보다 가벼운 사람의 실존이었다. 

  가버나움의 한 여인은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 12년 동안 재산을 다 허비했고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느 날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그가 지나간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그의 몸을 이리저리 밀치는 소란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그녀의 떨리는 손이 그의 옷자락을 만졌다.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 믿었던 그녀의 무례한 순간에 시간의 밖으로 나팔소리가 울렸다.  

  기도는 단단한 껍질을 여는 여린 꽃잎, 무례하게 피는 꽃, 앓는 여인의 뻗은 손, 그리고 사람의 가장 정직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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