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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리아, 나의 바니타스

by 모든 햇살

그림은 어쩐지 괴상한 기운을 뿜어낸다. 세밀한 정물화인데 화려하게 핀 꽃들 뒤로 시들어 말라버린 검은 꽃송이들이 그림자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다. 먼데 푸른 하늘이 화병을 얹어놓은 검은 창틀과 대조를 이룬다. 어쩐지 자꾸 눈길을 끄는 이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화풍 바니타스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 그 영화가 덧없다는 것, 그리고 죽음의 필연이 바니타스의 메시지다. 꽃과 상징을 담은 정물들이 등장한다. 꽃으로 인생의 화양연화와 죽음을 동시에 보여주고 그 영화가 잠깐이라는 명징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렇다고 절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허영을 버리고 겸손한 삶을 살라는 긍정이다.

어울리지 않는 영화와 죽음이 한 캔버스에 담겨있어 기괴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러나 그 양극의 공존, 그 기괴함이 바로 살아가는 일인 걸 어쩌랴. 매혹적인 꽃과 말라버린 꽃, 녹슨 칼과 동전, 깨진 왕관, 불 꺼진 촛불. 그림은 사람의 눈을 사로잡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고 마침내 삶의 실상을 차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거실엔 한 아름의 루나리아가 있다. 화병에 가득한 것은 꽃이 아니다. 보라가 무리 지어 피어나던 봄보다, 씨앗이 익는 늦여름을 고대했다. 씨앗과 씨방의 외피가 다 쏟아져 내린 뒤에 마른 가지에 남은 것은 씨방 속의 얇은 막, 반투명의 은빛 동그라미였다. 햇살 들어오는 창가에 두면 은전들이 은은하게 빛을 반사한다. 꽃이 질 때마다 서운했던 마음이 루나리아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다. 마른 씨방의 반전이다.

이키네시아가 여름부터 가으내 단정한 분홍 꽃을 연이어 피웠다. 늦가을 꽃들이 다 사라진 마당에 이키네시아만 남았다. 가지 끝마다 성게 같은 봉긋한 씨앗을 달고 있다. 꽃대가 꺾이거나 씨앗을 담은 모양새가 일그러지지 않고 단단했다. 루나리아 화병에 이키네시아를 함께 꽂았다. 은빛과 검정이 잘 어울려 한 단계 올라선 세련미를 느낀다. 그들과 더불어 긴 우기를 견딘다.

의외의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다니, 주름이 깊어진 탓인가 보다. 오드리 헵번의 주름진 미소는 왜 그리 고왔을까. 주름진 엄마의 얼굴은 왜 그리 고맙고 아름다울까. 사람의 주름은 정직한 말을 한다. 루나리아도 그렇다. 화려함을 잃은 것만이 줄 수 있는, 꾸미지 않은 얼굴에서 투명한 아름다움이 보인다.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하늘을 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초라한 들꽃에서 은전의 반전을 상상할 수 없었다. 꽃에 열광했던 젊음을 지나, 다음 세대를 품은 씨앗을 기특하게 바라보는 눈을 얻었다. 이제 씨앗까지 다 비워낸 루나리아 씨방은 검은 창틀 저 너머의 하늘을 바란다. 썩어야 꽃을 피우는 것은 이생뿐,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만나게 되는 반전을 꿈꾼다. 육체의 모든 언어와 오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빛, 그 빛을 반사하는 영예를 꿈꾼다.

햇살 받은 루나리아가 하얗게 빛을 쏟아낸다. 살아가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무게를 잃은 야윈 얼굴의 그들은 나의 찬란한 바니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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