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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09. 2023

끝이 없는

팔루스 밀밭에서

   팔루스(Palouse) 밀밭에 바람이 일렁인다. 이곳에선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도 숨을 데가 없다. 바람이 너울너울 붓질을 시작하면 밀은 몸을 수그려 온몸으로 바람의 길을 일러준다. 바람을 따라가던 시선은 결국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에 이른다. 밀밭은 끝이 없다. 어디엔가 끝은 있겠지만 내 눈이 그 끝을 따라가지 못한다. 눈을 감고 지평선 너머로 오래오래 펼쳐질 밀밭을 상상해본다.    

   “태양은 왜 계속 빛나고 있나요? 파도는 왜 계속 해변에 부딪히나요?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가 세상의 끝이라는 걸 그들은 왜 모를까요?” 앳되지만 울림이 단단했던 가수가 부른 오래 전 노래다. 한 사람에게 전부였던 그 무엇이 사라져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태연히 그대로다. 세상의 얼굴은 차갑기만 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간절했던 가치를 비웃는 듯, 아침에 쓰레기 수거차가 오고 오후엔 우편물이 배달된다. 

   누군가에겐 실연, 누군가에는 사별, 또 다른 누구에겐 파산. 어쩌면 1막 1장의 끝처럼 밀의 허리를 꺾을 듯 지나가는 강풍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침한 춤을 춘다. 시간과 망각의 도움으로 크고 작은 바람을 가는 허리로 견딘다. 그렇게 눈은 조금씩 멀리 보는 법을 알게 된다. 먼데 초점을 맞출수록 잦은 바람에 시시비비하지 않고 한낮의 태양과 천둥치는 밤도 견뎌내며 익어간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너무 매달리지 않는다. 

   밀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시점에서 자신을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고개를 숙이는 일이 더 쉽지 않을까? 밀들이 서로 키를 재며 허리를 꼿꼿이 들고 콧대를 세우는 일이란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 무의미할 뿐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날엔 하늘로만 길이 열려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추수의 날까지 자라고 열매 맺고 땅에 떨어져 또 다른 밀로 태어나게 하는 일. 센 바람 맞은 밀이 아주 부러지지 않도록 서로 몸으로 받쳐주는 일. 어쩌면 이런 일들이 가장 밀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밀은 뿌리내린 공간에 일정 기간 존재한다. 시간의 지붕아래서 그 흐름에 따라 성장하고 노화한다. 연두의 밀 이삭은 황금으로 변해가며 조금씩 고개를 숙인다. 마침내 수확의 날이 온다. 그렇게 애썼던 일들이 기대 이상의 풍작이 될 지, 기대와 달리 쭉정이를 거두게 될 지는 곡식을 떨 때까지 잘 알 수 없다. 밀이 수명을 다해도 이듬해 밀밭엔 어김없이 또 다른 밀들이 푸르디푸른 싹들이 척박한 땅을 밀고 올라온다.  

   ‘임시’라는 단어를 곱씹어보면 공허와 불안이 몰려온다. 내가 디디고 선 땅이 언제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가죽 구두를 사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빛나는 돌에 빗댄다. 오늘도 내일도, 까마득한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바란다.

   요즘 특별히 기특하게 여기는 꽃은 백일홍이다. 다른 꽃들이 모두 지고난 뒤에도 다채롭고 선명한 색의 꽃들이 계속 새 꽃봉오리를 올린다. 결기 어린 꽃은 첫 서리 내린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고개를 떨군다. 새봄에 심고 싶은 꽃은 천일홍이다. 동글동글 작은 꽃을 피워 올린다. 색과 모양이 변하지 않아 드라이플라워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나는 백일홍과 천일홍으로 축제가 지나간 자리의 허전함을 밀어내려는 걸까? 눈부신 젊음의 때엔 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꽃이 더욱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은 나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자연으로 돌아가듯 인간의 육체도 죽음을 맞는다. ‘죽을 수밖에 없는’(motal)은 인간을 일컫는 대명사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끝이 없는’(eternal)의 가치가 새롭다. 창조주는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두셨다고 솔로몬은 말했다. 그것이 바로 밀밭이 내게 아름다운 이유였다. 

    “이 세상에 행복한 자가 있다면 그것은 광대하고 끝없는 지평선을 자유롭게 즐기는 사람들뿐이다.”  - Henly David Thoreau, <Wal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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