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이 넘으신 엄마가 저 만치 쌩하고 앞서 가시며 ‘얼른 와’하고 함박웃음으로 손짓을 하신다. 저렇게 신명이 나실까. 미국에 사는 막내딸이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엄마의 발걸음이 가볍다. 지하도 안에서 넘쳐나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빨리 걷기가 쉽지 않은데 엄마는 “그렇게 걸어서 언제 다녀?”하신다.
손에 무얼 들기라도 하면 “내가 들을게. 무겁다.”하신다. 중년의 딸이 팔순의 엄마께 짐을 지우다니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엄마는 막무가내로 씩씩하시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 있어도 엄마 전화를 받을 때는 밝은 목소리로 변하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보니 우린 서로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내숭 떨고 있는 건 아닐까? 약간 속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그 씩씩함이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가장 감사한 점이다.
마음이 젊으신 엄마 탓일까? 막내로 태어나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일까? 나에게는 현실을 늦게 깨닫는 중병이 있다. 새해가 밝았는데도 지난해 년도를 며칠씩 기록하는 증세가 있었고 초등학교 때는 어른이 되기 싫었다. 결혼을 하는 것도 엄마가 되는 것도 용기가 안 났고 요즘은 다 큰 대학생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것도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월은 늘 저만치 앞서 가고 나는 그 뒤를 어리둥절 마지못해 따라 가고 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다. 사람들을 부담 없이 살피기엔 지하철만큼 좋은 장소도 없다. 표정과 외모를 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그 사람의 삶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혼자 머릿속에 소설을 써 보기도 한다. 한참을 상상 속에 헤매고 있자면 사람들은 일어서고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 다른 삶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발견한 점은 내가 나와 같은 중년의 아주머니들이나 흰 머리카락이 드문드문한 아저씨들 보다는 젊은이들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가서 그들을 나의 동년배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우리선배 아무개 닮았네, 내 친구 누구, 후배 누구....... ”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 옆에 앉은 파마머리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나이에서 오는 연륜이나 품위보다 눈가의 주름이 먼저 눈에 띄는 그저 나이든 여인. 나와 제일 가까운 등장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자각은 한참 후에 온다. 씁쓸한 현실파악. 또 한 발 늦었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은 젊음이 지나갔다고 생각한 삼십 대 중반의 나이였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젊음을 고국에 두고 온 모양이다. 잠시 방문한 고국에서, 골목과 모퉁이에서 나의 젊음과 자꾸만 마주친다. 어릴 적 엄마가 TV를 보시다가 “저 배우가 저렇게 늙었구나. 세월을 누가 막을까? “하시며 안타까워하시던 생각이 나는데 요즘 내 아이들에게 같은 대사를 읊고 있다. 그러면 딸은 ”오래 사셨네요! “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나는 ”금방이었거든! “ 하면서 억울해한다.
지하철 안의 냉방이 너무 잘 되는지, 엄마가 닭살이 돋은 내 팔을 감싸 안으신다. 엄마는 아직도 포화 상태였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내 얼굴을 그리워하신다. 갑자기 몇 해 전 보낸 노화 방지 크림은 잘 발랐냐고 물으신다. 이렇게 기습 질문 받을 줄 알았더라면 열심히 발라둘걸. 누군가 여배우가 늙는 것은 ‘유죄’라더니, 딸도 노모 앞에서 자꾸 늙어 가면 중죄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지하철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내가 타고 있는 지하철 칸과 나란히 겹쳐진다. 실물일까, 반사체일까? 몇 겹의 유리창 사이로 어느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비친다. 반대 방향 기차가 점차 속력을 내더니 여인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방향으로 미끄러진다. 유리창에 잠깐 나타났던 여인의 모습처럼 젊음은 그렇게 잠깐 내게 현실이었던 듯하다.
선배여, 후배여, 친구들이여, 젊은 날의 나여! 고국의 지하철 유리창엔 나의 젊음과 잘 만져지지 않는 현실이 교차한다. 서로 별 사이 아니라는 듯 스쳐 지나는데, 마음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자꾸만 손을 흔든다. 그녀는 멀어지고 나를 태운 지하철은 정신 차리라는 듯, 점점 빠르게 미래로 달음질친다.